회귀한 형사의 마지막 목격자

5화: 엇갈린 목소리
계근실 안의 공기는 빗물 냄새보다 차가웠다.
책상 아래 쓰러진 남자의 턱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도윤은 진혁의 짧은 대답을 들은 채 굳어 있었다. 시선이 바닥의 시신에서 진혁의 메마른 눈가로 천천히 올라왔다.
“아니라고?”
도윤의 목소리가 억눌린 쇳소리를 냈다.
“그럼 지금까지 네가 맞힌 건 뭔데? 오명수가 사무실에서 납치된 것도 컨테이너로 달려온 것도 다 네가 먼저였잖아.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여기서 죽어 있는 건데!”
도윤이 벽을 짚었다. 녹슨 양철 벽이 둔탁하게 울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감식 요원들이 계근실 안쪽을 쳐다보았다.
“오명수 때도 늦었어. 이 사람도 늦었고. 넌 사람이 죽어 나갈 자리만 따라가고 있잖아. 누구한테 뭘 듣고 있는 거야? 칠 년 전 백야원 화재랑 이게 어떻게 연결되는 건데!”
형사로서 당연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진혁이 품은 진실은 어떤 조서에도 적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되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폐쇄 상가 지하에서 총에 맞아 죽어갈 때 이 남자는 없었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수사에서 배제될 터였다.
진혁은 감정을 억누른 채 문틀을 가리켰다.
“문부터 봐.”
“뭐?”
“우리가 들어올 때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안쪽이 아니라 밖에서 채워져 있었어.”
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틀을 보았다. 지원 인력이 뜯어낸 빗장 주변에 칠이 벗겨져 있었다.
“범인이 이 남자를 죽이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는 뜻이야. 열쇠를 챙겨 달아났겠지. 그리고 장갑을 봐.”
진혁이 장갑 끝을 비추었다. 얇은 가죽 장갑 끝에 노란 접착 테이프 조각이 붙어 있었다.
“병원에 서류봉투를 전하고 곧장 이곳으로 불려왔어.”
도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진혁을 노려보다가 수첩을 꺼냈다. 파트너에 대한 불신이 치밀어도 눈앞의 현장 단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도윤이 감식반을 불렀다.
“지문 채취하고 족적 확보해. 문틀 긁힘 자국이랑 빗장 걸쇠도 전부 떠.”
감식 요원들이 들어와 번호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도윤은 증거물 봉투에 담긴 남자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오늘 오후 한 시 이십 분.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걸려 온 전화가 있어. 통화 시간 사십 초.”
“사십 초.”
“그래. 병원에서 출발한 직후야. 누군가 이 남자를 하치장으로 불렀어.”
도윤이 전화기를 봉투에 넣으며 진혁에게 다가섰다.
“네가 뭘 숨기든 난 이 현장부터 밝혀낼 거야. 하지만 진혁아. 하나만 들어.”
도윤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번만 더 내 눈 속이고 엉뚱한 데로 뛰면 문 대장한테 보고하고 네 총부터 압수할 거야. 알아들어?”
진혁은 도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알아.”
도윤이 등을 돌려 빗속으로 나갔다. 진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십 분. 약속한 연락 시각이었다.
하치장 처마 밑으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진혁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빗물이 번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연결됐다.
“네, 서 경위님.”
윤서린의 목소리였다. 수화기 너머의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그녀가 병원 의무기록 창구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윤 간호사. 듣기만 하십시오.”
진혁은 처마 안쪽으로 물러섰다.
“계근실에서 두 번째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멎었다. 서린의 숨소리만이 떨려 나왔다.
“……누구인가요?”
“병원에 봉투를 전달했던 배달원입니다. 현장에서 오토바이와 복장이 일치했습니다.”
서린의 침묵이 길어졌다.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에게 봉투를 건넸던 사람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무거웠다.
“제게 서류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죽은 건가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용당한 뒤 입막음된 겁니다. 한 시 이십 분경에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를 받고 유인됐습니다.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진혁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지금 필요한 건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짚는 겁니다.”
서린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뭘 확인해야 하죠?”
“아침에 후원회 직원을 통해 들었던 오명수 씨 음성메시지 기억합니까?”
“네. 기억해요.”
“오명수 씨 목소리 뒤로 겹쳐 들렸던 말이 있었죠. ‘처음 들은 문장을 잊지 마세요’라고 했던 말.”
서린의 호흡이 멎었다.
“그 목소리와 병원에 찾아왔던 배달원의 목소리가 같았습니까?”
서린은 기억 속 음성들을 되짚었다.
병원 로비에서 헬멧을 쓰고 다가왔던 남자의 목소리.
‘윤서린 간호사 앞으로 온 겁니다. 바쁘니까 얼른 받아요.’
거칠고 숨이 찬 배달 기사의 투박한 말투였다.
그리고 아침에 들었던 녹음.
‘처음 들은 문장을 잊지 마세요.’
낮고 건조한 음성이었다. 한 음절씩 무게를 달아 떨어뜨리듯 기이할 정도로 정돈된 목소리였다.
“달라요.”
서린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병원에 온 배달원은 조급하고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음성메시지 속 목소리는 차가울 만큼 평온했습니다. 망설임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배달원은 범인이 아닙니다. 심부름을 맡긴 자에게 속아 이곳으로 불려온 겁니다.”
“그리고 형사님.”
서린의 목소리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 낮은 목소리…… 병원에서 들었을 때도 낯익다고 느꼈습니다. 칠 년 전 화재가 나던 그날 밤 복도에서 비슷한 음성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린이 말을 멈췄다.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윤 간호사? 괜찮습니까?”
“……머리가 울려서요. 괜찮습니다. 그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하면 이상하게 눈앞이 흐려져요. 안개가 번지는 것처럼.”
진혁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서린은 아직 자신이 치르는 대가를 알지 못했다. 기억을 쥐어짤 때마다 누군가의 얼굴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무리해서 떠올리지 마십시오.”
진혁이 경고했다.
“병원 쪽 기록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서린이 숨을 고른 뒤 어조를 되찾았다.
“칠 년 전 백야원 화재 당시 해온대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명부 원본을 찾았습니다. 결재를 거쳐 사본을 확인하는 중이에요. 오명수 씨 사무실에서 나온 확인표의 번호와 대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나도 현장 수색이 끝나는 대로 합류하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진혁은 빗속을 응시했다.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졌다.
“신원 나왔다.”
도윤이 젖은 머리를 털며 순찰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혁은 조수석에서 계근실 쪽을 보고 있었다. 감식반이 시신을 운구용 가방에 수습해 옮기는 중이었다.
“임재문. 삼십이 세. 서대문구 퀵서비스 업체 소속 기사야. 전과 없고 평범한 사람이다.”
도윤이 수첩을 덮으며 진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컨테이너를 다시 뒤졌는데 오명수 가방이 비어 있었어. 백야원 관련 서류철이나 명단 원본은 흔적도 없었다.”
“명단을 가져갔군.”
“그래. 범인이 오명수를 죽이고 명단 원본을 빼앗아 간 거야. 임재문은 영문도 모른 채 심부름을 왔다가 계근실에 갇혀 살해당한 거고.”
도윤이 운전대에 이마를 기댔다. 피로와 분노가 섞인 한숨이 차 안에 찼다.
“네 말이 맞았어. 단순 강도 살인이 아니야. 철저하게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현장을 치우고 있어. 경찰이 올 타이밍까지 계산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단 말이다.”
도윤이 고개를 들어 진혁을 보았다.
“진혁아. 너 칠 년 전부터 혼자 뭔가 캐고 있었던 거지? 문 대장이 백야원 사건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했을 때 너 뒤에서 들여다봤잖아. 그래서 판을 미리 알고 있는 거지?”
도윤의 눈빛에는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도윤은 진혁의 행동을 비공식 내사나 독자적인 정보원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상식적 설명이었다.
진혁은 도윤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때로는 잘못된 추론이 진실보다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도윤아. 백야원 화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 누군가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입을 막고 있어. 오명수는 그 명단을 지키려다 죽었고 임재문은 그 과정에서 버려진 거야.”
“그럼 다음은 누구냐?”
도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꺾였다.
“오명수가 죽었고 명단은 범인 손에 들어갔어. 그 명단에 적힌 다음 사람이 누군지 네가 알고 있냐고.”
진혁은 입술을 다물었다.
기억 속 첫 번째 시간대에서는 오명수 한 사람만이 살해당했다. 그 뒤에 어떤 피해자가 예정되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범인은 오명수를 납치해 죽이고 명단을 탈취했다. 그리고 서린에게 보낸 봉투에 메모를 남겼다.
‘두 번째는 순서가 다릅니다.’
그때 진혁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서린이 보낸 메시지였다.
첨부된 사진에는 낡은 의무기록부가 찍혀 있었다. 상단에 ‘대외비’가 찍힌 해온대병원 응급실 이송 명부였다.
진혁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끝나기 전에 서린이 받았다.
“서 경위님. 찾았습니다.”
서린의 목소리에 긴장이 실려 있었다.
“사무실 확인표 상단에 적혀 있던 분류 번호가 ‘BY-07-03’이었습니다. 병원 이송 명부 원본을 대조해 보니 그 번호에 대응하는 이름이 있어요.”
“누굽니까?”
도윤도 숨을 죽였다.
“배서율.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연기 흡입으로 이송되었다가 이틀 만에 퇴원한 기록이 있습니다. 주소지가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한 연립주택으로 되어 있어요.”
진혁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두 번째는 순서가 다릅니다.’
진혁은 계근실에서 실려 나간 임재문의 시신을 떠올렸다.
“임재문이 아니었어.”
진혁이 읊조리듯 말했다. 도윤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뭐라고?”
“범인이 남긴 메모. ‘두 번째는 순서가 다릅니다’라는 말은 임재문을 뜻한 게 아니었어.”
진혁의 시선이 하치장 정문 너머 빗줄기 속으로 향했다.
“임재문은 심부름꾼이었을 뿐이야. 범인은 오명수에게서 빼앗은 명단에서 다음 차례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을 건너뛰고 순서를 바꾼 거야. 배서율. 그 사람이 진짜 두 번째 표적이야.”
서린이 전화 너머에서 덧붙였다.
“오명수 씨의 수요일 밤 통화 내역에서 공중전화로 발신된 번호가 있었습니다. 그 공중전화 위치가 북아현동 배서율 씨 주소지에서 백 미터 거리예요. 오명수 씨는 죽기 전 그 사람에게 경고하려 했던 겁니다!”
상황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졌다.
오명수는 명단을 지키려다 실패하자 다음 생존자에게 도망치라고 알리려 했다. 범인은 오명수를 살해하고 명단을 가로챈 뒤 그 통화 상대였던 배서율을 다음 사냥감으로 삼았다.
“주소 불러 주십시오.”
진혁이 외쳤다. 서린이 주소를 읊었다.
“북아현동 삼십사 다시 십이, 청솔연립 지하 일 호입니다.”
도윤이 순찰차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거칠게 울렸다.
“꽉 잡아!”
도윤이 사이렌 스위치를 올렸다.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유리창을 때리는 빗물 위로 번졌다. 타이어가 젖은 바닥을 박차며 하치장 철문을 빠져나갔다.
순찰차는 빗길을 가르며 도로 위로 들어갔다. 사이렌 소리가 도시의 빗속으로 날카롭게 퍼졌다.
진혁은 대시보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첫 번째 시간대에서 비극이 벌어졌던 자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이미 시간표를 앞당겨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비극의 문이 열리기 전에 그곳에 닿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