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변호인의 첫 승소

2화: 교대표의 빈칸
린박은 법원 복도에서 소라를 만나고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검은 손목 보호대를 왼손에 감고 있었다. 창고에서 넘어져 손을 다쳤다는 말을 들은 지 닷새가 지났다. 린박은 경찰 조사에 나오지 않았고, 회사에는 사직서를 냈다. 마웅은 그가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마웅 씨가 직접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소라가 말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먼저 이야기할 수 없어요. 오늘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본인이 정해 주세요.”
린박은 복도 끝을 확인했다. “회사가 조사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창고 문을 열고 약을 찾은 건 저예요. 그런데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진 않았습니다.”
소라는 통역을 맡은 린에게 먼저 그의 동의를 확인했다. 린박은 베트남어로 말해도 괜찮다고 했다. 린은 구체적 표현이 모호한 곳마다 다시 물었다. 그는 그날 야간조 교대 직전에 손을 베어 응급약을 찾으러 창고에 들어갔다. 마웅이 카드를 대 문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혼자 있었다. 노트북이 사라진 사실은 다음 날 들었다.
“왜 경찰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제가 창고에 들어간 시간은 카드 로그에 없습니다. 그날 밤 직원 카드가 바뀌었어요.”
“카드를 누가 사용했습니까?”
“마웅 형이요. 제가 손을 다쳐서 장갑을 못 꼈습니다. 형이 문을 열어 줬어요.”
린박은 손목 보호대를 만졌다. 계약 연장 면담을 앞두고 있었다. 회사가 사라진 노트북을 이유로 보상을 요구할까 봐, 그는 창고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숨겼다. 마웅이 대신 의심받는 걸 알았을 때도 말을 못 했다.
“회사에서 조사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까?”
“관리자가 창고 물건을 가져간 사람은 처벌받을 거라고 했어요. 제가 약을 찾으러 간 걸 말하면, 노트북도 제가 가져갔다고 의심할 거라고 했습니다.”
소라는 녹음이나 진술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린박은 아직 피고인도 증인도 아니었다. 그의 말은 소라가 의뢰인과 전략을 논의할 단서였지만, 법정에서 쓰려면 정식 절차가 필요했다. “말씀하신 내용을 마웅 씨에게 전해도 됩니까?”
“그가 먼저 말하라고 했어요. 네.”
소라는 마웅의 접견 신청을 다시 넣었다. 구치소에서 그는 린박이 말했냐고 묻지 않았다. 소라가 먼저 그의 선택을 물었다. “린박이 창고에 들어간 건 자신이었고, 당신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법정에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그가 증언하는 걸 원합니까?”
마웅은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말하면 회사가 계약을 끊을 거예요.”
“그건 그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당신이 증언을 부탁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도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있고요.”
“저는 혼자 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건은 빨리 끝날 수 있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당신이 원하면 그 선택을 함께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가족의 체류를 보장하진 않습니다.”
마웅은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아내를 만나게 해 주세요. 아이를 먼저 보고 싶습니다.”
린이 통역을 이어 갔다. “가족에게 사건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묻는 겁니까?”
“아니요. 아이에게 제가 말하고 싶어요.”
소라는 통역사에게 가족을 만나는 자리와 사건 상담을 분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웅은 아내가 변호인을 만나 체류 문제를 상담해도 된다고 동의했다. 다만 사건의 세부 내용은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린은 아내에게 상담 기관을 안내했고, 마웅은 구치소 면회실에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 마웅은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있자”고 답했다.
한편 검찰은 새 교대표와 출입카드 로그를 추가 제출했다. 마웅의 카드로 문이 열린 것은 맞았지만, 같은 시간대에 카드 관리자 계정이 문 잠금장치를 수동 해제했다. 기록에는 계정 소유자가 표시되지 않았다. 회사는 교대 때 반장이 카드를 대신 사용한 관행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카드가 마웅 손에만 있었다는 검사의 전제와 맞지 않았다.
소라는 회사 창고 책임자 백진호를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진호는 재고 누락이 생기면 담당 직원의 급여에서 공제된다고 말했다. “노트북은 2시 25분에 확인했습니다. 그전에는 거기 있었어요.”
“직접 보셨습니까?”
“저는 목록을 확인했습니다.”
“목록은 언제 작성했습니까?”
진호가 서류를 넘겼다. “아침에 정리했죠.”
“그러면 2시 25분에 노트북을 봤다는 기록은 누가 남겼습니까?”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제출한 재고표에는 ‘02:25 확인’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문서 작성 시간은 다음 날 오전 9시였다. 소라는 그 차이를 기록했다. 진호는 노트북이 사라진 정확한 시각을 모르는 듯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단순히 관행대로 시간을 적은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소라는 사건 기록을 펼쳐 CCTV 관리 업체에 보낼 요청서를 작성했다. 영상이 끊긴 시각에 전원이 나갔는지, 저장 서버에 수동 삭제 기록이 있는지, 관리자 계정이 접속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회사가 제출한 영상 파일은 사건 당일 경찰에게 복사본으로 전달됐다. 원본은 별도 서버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통역사 린은 소라의 책상 옆에서 진술 문안을 다듬었다. “마웅 씨 말에서 ‘창고 문을 열었다’는 건 본인이 카드를 대서 열었다는 뜻이 맞아요?”
“그가 직접 대답하게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손을 다친 린박 대신 문을 열었다는 말이지만, 카드 소유를 빌려준 건지 본인이 조작한 건지 구분해야 해요.”
소라는 문장 하나를 지웠다. 린의 질문 덕분에 애매한 부분을 그대로 둔 채 법원에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음 접견에서 마웅은 카드를 직접 댔다고 말했다. 창고 문을 열고 린박이 약품을 찾는 동안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 신발 자국은 어떻게 설명하죠?”
“제가 문 앞에서 발을 돌렸습니다. 바닥에 물이 있어 미끄러웠어요.”
“창고 안쪽에 발자국이 있다면요?”
“그건 모릅니다.”
소라는 그 답을 과장하지 않았다. 마웅이 문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진술은 CCTV 공백과 겹쳤다. 신발 자국이 문턱 안쪽까지 이어지는지, 물이 흐르면서 발자국이 번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소라는 현장 사진을 요청했다. 검찰이 제출한 사진에는 창고 문턱이 아니라 노트북 선반만 찍혀 있었다.
첫 공판 준비기일에서 검사는 카드 기록을 근거로 마웅의 창고 출입을 주장했다. 소라는 카드 사용이 확인될 뿐, 창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재판장은 본 공판에서 CCTV 원본과 카드 서버 기록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검사는 노트북의 지문 감정을 추가로 요청했고, 소라도 동의했다.
법정을 나온 뒤 마웅은 유치장 복도에서 소라에게 말했다. “린박은 증언해도 돼요. 제가 부탁했어요.”
“그가 원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게 기다리는 중입니다.”
“제가 그 사람을 지키려고 한 게 아닙니다.” 마웅은 소라를 똑바로 봤다. “그 사람 이름이 나오면 회사가 우리 둘을 같이 자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먼저 죄를 인정하면 아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소라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마웅은 두려워서 침묵했지만, 그 침묵 때문에 그의 말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에서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다툴지 결정할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날 오후 검찰에서 새 자료가 왔다. CCTV 원본 서버에 11분 공백은 있었지만, 관리 로그에는 삭제 명령이 남지 않았다. 다만 서버에 마지막으로 접속한 계정은 회사 안전관리자 계정이었다. 백진호는 그날 밤 노트북 재고 확인을 요청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전후로 장비를 옮긴 적은 없다고 했다.
소라는 진호의 첫 진술서와 재고표를 나란히 놓았다. “노트북은 2시 25분에 있었다”는 문장은 직접 목격이 아니라 다음 날 작성된 기록이었다. CCTV가 끊긴 시각은 누가 창고에 들어왔는지 보여 주지 않았다. 마웅의 카드만으로는 노트북이 사라진 순간을 특정할 수 없었다.
린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린박 씨가 내일 참고인으로 오겠다고 했어요. 단, 회사 직원이 보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겠대요.”
소라는 빈 진술서 한 장을 꺼냈다. “그럼 법원에서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뭔지부터 물어봐야죠. 우리가 원하는 증언을 시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본 걸 그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해요.”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는 회사가 야간조 교대를 다시 짜고 있었다. 마웅은 가족을 만났고,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말했다. 하지만 재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CCTV 공백을 메울 자료는 없었다. 소라는 다음 날 진호가 증언대에 서기 전에 질문 순서를 전부 다시 짜기로 했다. 그녀는 린과 함께 마웅에게 “창고에 들어갔다”와 “창고 문을 열었다”의 차이를 다시 확인했다. 마웅은 문턱을 밟았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안쪽 선반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고 말했다. 린은 그가 확실하게 말한 문장과 추측한 문장을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이렇게 구분하면 판사가 저를 믿을까요?” 마웅이 물었다.
“믿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는 범위만 말하는 겁니다.” 소라가 답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도 됩니다.”
린박은 복도에서 그 말을 듣고 손목 보호대를 풀었다. “저도 본 것만 말하겠습니다. 회사에서 뭐라고 할지는 제가 감당할게요.” 마웅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린박은 바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아직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고, 오늘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