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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사서는 달빛으로 빚을 읽는다2화

야간 사서는 달빛으로 빚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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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폐관 통보의 봉인

문밖의 여자는 매점 불빛 아래에서 젖은 우산을 접었다. 서른쯤 되어 보였지만 경자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이름부터 불렀다.

“지연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위 열쇠를 집어 들고 뒤쪽 창고의 자물쇠를 확인했다. “내일 새벽에 건물 비운다며. 네가 가진 열쇠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왔어.”

“그건 맞는데.”

“그럼 열쇠만 주면 돼.”

경자는 도시락 통을 내밀지 않았다. 윤하는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도진은 매점 입구에 서서 책의 남은 시간을 세고 있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초침이 정각에서 잠시 멈췄다.

지연은 윤하가 든 책을 흘끗 보았다. “그거 아직도 갖고 있었어요?”

“오늘 처음 봤어요.”

“엄마는 뭐든 오래 갖고 있어요. 못 버리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다른 사람한텐 짐이에요.”

경자는 도시락 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잡이의 붉은 칠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이건 네가 좋아하던 계란말이야.”

“좋아한 적 없어요.”

“네가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좋아하던 거겠죠. 난 매일 김치만 빼 달라고 했는데.”

경자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 속 장면과 현실의 목소리는 어긋날 수 있었다. 책이 틀린 게 아니라, 책을 맡긴 사람이 자기 마음에 유리한 부분만 남겼을지도 몰랐다.

윤하는 책을 열지 않은 채 물었다. “경자 씨, 지연 씨가 도시락을 먹길 바라는 거예요, 아니면 건네고 싶었던 말을 전하고 싶은 거예요?”

“둘 다였는데.” 경자가 잠시 생각했다. “이젠 모르겠어.”

“그럼 오늘은 하나만 정해요. 지연 씨는 열쇠 받으러 온 거고, 그건 주기로 했잖아요.”

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락 통을 뒤로 밀어 두고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윤하는 장부에 책의 시간을 표시했다. 남은 열람 시간은 스물네 분. 책의 표지에는 ‘엄마는 네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라는 글이 다시 떠올랐다. 문장 아래에 작게 ‘금요일, 11시’가 덧붙었다.

“이 책의 기억은 누가 맡긴 거예요?” 지연이 물었다.

“저희도 아직 몰라요.” 윤하가 말했다.

도진은 말없이 윤하를 바라봤다. 도서관 밖 사람에게 장부 내용을 말하지 않는 규칙이 있었지만, 책의 주인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편이 더 큰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맡긴 거면 어떻게 할 건데요?”

“당사자들이 원할 때만 돌려드립니다.”

“그걸 누가 결정하죠?”

“책이 아니라, 기억을 맡긴 사람이요.”

지연이 짧게 웃었다. “그런 말은 쉬워요. 엄마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도 늘 대신 결정했거든요. 여기서도 그러겠죠.”

경자의 입술이 떨렸다. “네가 어릴 때 아빠가 떠난 뒤로, 내가 뭐라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먹지도 않는 음식을 싸서 역까지 가져왔어요?”

“네가 집에 안 왔으니까.”

“집에 못 간 거예요. 야간 자율학습 끝나면 마지막 버스가 끊겼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가 무서워서 친구 집에서 잤어요. 다음 날엔 엄마가 화낼 것 같아서 더 못 갔고.”

경자는 그 말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멈춰 섰다. 윤하의 가슴에 익숙한 통증이 생겼다. 사라진 오빠의 빈자리보다, 누군가 가까운 사람의 진짜 말을 모른 채 살아온 시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날도 금요일이었니?” 경자가 물었다.

“응. 그날은 내가 먼저 오겠다고 했어. 엄마한테 열쇠 돌려주러.”

“그럼 왜 안 왔어?”

“엄마가 역에 안 나와서.”

“나는 도시락을 들고 매점에서 기다렸어.”

지연은 눈을 감았다. “엄마, 그날은 역이 아니라 병원 앞이었어. 외할머니가 쓰러져서 내가 병원으로 갔어. 전화도 했는데 안 받았잖아.”

경자는 손에 쥔 열쇠를 놓쳤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윤하는 책의 문장을 바라봤다. ‘엄마는 네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문장은 여전히 경자의 기억에 남은 문장이었다. 그날 경자는 기다렸고, 지연도 다른 곳에서 기다렸다. 서로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약속의 장소가 달랐다.

“책에 적힌 말이 전부는 아니네요.” 윤하가 말했다.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사실을 보관하지 않아요. 자기에게 남은 감정을 보관하죠.”

경자는 고개를 숙였다. “난 네가 나를 피한다고만 생각했어.”

“나도 엄마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연락을 안 받았으니까.”

“그럴 리가.”

“그때는 그랬어.”

두 사람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윤하는 열쇠를 주워 경자에게 건넸다. 지연은 그것을 받아 창고 자물쇠에 맞춰 보았다. 열쇠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거 다른 열쇠예요.”

“아, 그건 매점 셔터 열쇠야.” 경자가 말했다. “창고 열쇠는 작은 은색.”

지연은 한참 뒤에야 웃었다. “그것도 기억 못 해요?”

“열쇠가 많잖아.”

“엄마는 뭐든 오래 갖고 있다며.”

경자가 말없이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은색 열쇠와 낡은 기차 승차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승차권 뒷면엔 젊은 경자의 글씨로 ‘지연에게, 다음엔 네가 원하는 걸 싸 줄게’라고 적혀 있었다.

지연이 표를 집었다. “이거 기억나요?”

“내가 쓴 건 맞는데, 네가 이걸 본 줄은 몰랐어.”

“그때 도시락 안에 넣어 뒀어요. 난 엄마가 미안하다고 한 줄 알고, 집에 가면 괜찮을 줄 알았어.”

“그런데 왜 안 왔어?”

“외할머니가 아픈데 엄마도 없어서 무서웠어. 엄마가 나보다 할머니를 먼저 챙긴다고 생각했어.”

경자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할머니가 입원한 날, 엄마는 매점에 있었어?” 지연이 물었다.

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간 근무를 바꿀 수가 없었어. 네 외삼촌은 지방에 있었고, 내가 빠지면 매점 문을 닫아야 했지. 할머니가 전화로 괜찮다고 해서 믿었어.”

“나는 괜찮다는 말 못 들었어. 간호사가 보호자를 부르는데 아무도 안 왔어. 네가 올 줄 알고 두 시간 넘게 계단에 앉아 있었어.”

“왜 그때 말하지 않았니?”

“말하면 엄마가 또 미안하다고 할 테니까. 그러면 내가 화낼 이유를 잃잖아.”

경자는 도시락 통의 뚜껑을 만졌다. 손가락이 떨려 닫힌 고리가 두 번 미끄러졌다. “미안하다는 말로 네가 화낼 이유를 없애려고 한 적은 없어.”

“그런데 엄마가 매번 먼저 울었잖아. 내가 달래느라 할 말을 못 했어.”

윤하는 경자가 숨을 들이키는 것을 봤다. 사과 한마디로 끝낼 수 없다는 걸 경자도 알게 된 듯했다. “그러면 오늘은 내가 먼저 듣겠다. 네가 화난 이유를 다 말해. 변명 안 할게.”

“다 말하면 매점 못 닫아.”

“오늘은 조금 늦게 닫아도 돼.”

“그런 말은 쉽게 하네. 여기 재개발 들어오면 엄마 일자리도 끝이잖아.”

경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내가 해결할 일이지, 네가 기다려 줄 이유는 아니야.”

지연은 대답 대신 젖은 우산을 세워 뒀다. 물방울이 낡은 바닥에 둥근 점을 만들었다. “내일 병원 가는 건 약속이야. 이번엔 시간 바꾸면 전화해.”

“전화할게.”

“내가 안 받으면 문자 남기고.”

“알았어.”

“그리고 도시락은 매주 싸지 마.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 만들어요.”

경자는 한 번 웃으려다 실패했다. “그럼 네가 먹고 싶다고 말해 줘.”

지연은 도시락 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오늘은 한입만. 배고파서 먹는 거야.”

“그럼 내일은 네가 먹고 싶은 걸 말해.”

“병원 앞 분식집에서 우동. 외할머니가 퇴원하면 매점 말고 거기서 만나.”

“내가 늦으면?”

“전화해. 기다릴지 말지는 내가 정할게.”

경자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정해.” 지연은 그 대답을 확인하듯 엄마의 얼굴을 한 번 살핀 뒤, 주먹밥을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이번에는 싫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 배고파서 먹어.”
“그날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구나.”

윤하는 책의 표지에서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글씨의 잉크가 푸르게 흐려졌다. 경자가 오래전에 쓰고도 건네지 못한 승차권 한 장. 그 작은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열렸다.

“그럼 오늘은 도시락을 안 받아도 돼요.” 지연이 말했다. “대신 내일 아침에 같이 병원 가요. 외할머니 퇴원하신대요.”

“같이 가자.”

“시간은 내가 정할게요.”

“그래. 네가 정해.”

경자는 도시락 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건 가져가라는 말 안 할게. 먹고 싶으면 같이 먹자.”

지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통을 열었다. 계란말이는 없었다. 안에는 김치 대신 넣은 오이절임과 작은 주먹밥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이번엔 네가 좋아하는 걸 넣었어.” 경자가 말했다.

지연은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간이 세.”

“그럼 물 마셔.”

“엄마가 만든 건 다 그렇지.”

그러면서도 지연은 두 번째 주먹밥을 집었다. 윤하는 책의 가장자리에 손을 대었다. 종이가 전보다 따뜻했다. 표지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내일 아침, 같이 가기로 했다.’

책장이 스스로 닫혔다. 도진이 장부에 손을 올렸지만 기록할 필요는 없었다. 책의 첫 장에 있던 문장이 사라지고, 담보 서랍의 작은 열쇠가 두 번 울렸다.

경자는 딸에게 도시락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지연이 고른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 선택으로 책은 반납 처리됐다.

윤하는 손바닥이 허전해진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맡겼는지 생각해 냈다. 오빠가 만나자고 한 약속. 그러나 누구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그 기억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도진이 윤하를 불렀다. “이제 확인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그는 말없이 지하 서랍 열쇠를 보여 줬다. 열쇠 고리에는 윤하의 이름 대신 ‘윤도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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