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사서는 달빛으로 빚을 읽는다

1화: 반납함의 아이 이름
도시가 잠든 뒤에도 폐역의 반납함은 가끔 안쪽에서 노크를 했다.
윤하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누군가 갇힌 줄 알고 열쇠를 꺼냈다. 선임 사서 강도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열지 마요.”
“안에 사람이 있으면요?”
“사람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딱, 딱.
두 번째 노크는 반납함 안에서 났다. 도진은 황동 열쇠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쇠고리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했다.
윤하는 손목을 빼냈다. “그럼 책이겠네요.”
“책도 먼저 열면 안 됩니다. 수거 시간은 자정.”
“지금 자정이 지났는데요.”
“오늘의 자정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도서관에선 날짜가 바뀌는 기준이 다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반납함 덮개가 안쪽에서 밀려 올라왔다.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이 철제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모서리에 물자국이 번졌고, 표지에는 제목 대신 세 줄의 글씨가 박혀 있었다.
서윤하.
강도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윤하는 숨을 삼켰다. 자기 이름이 적힌 물건을 모른 척하는 데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오빠가 사라진 이후로,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라면 무엇이든 붙잡았다.
도진이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윤하는 한발 먼저 책을 받았다. 표지의 젖은 종이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순간, 물 냄새가 났다.
비가 오던 밤. 누군가 우산을 접으며 “내일 여기서 만나자”고 말했다. 윤하의 귀에는 남자 목소리의 끝만 남았다. 얼굴은 흐렸다. 목소리를 붙잡으려 할수록 기억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졌다.
“놔요.” 도진이 낮게 말했다.
윤하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이름, 저 아는 사람이 쓴 글씨예요.”
“책에 닿았으면 이미 열람이 시작된 겁니다. 이제 담보를 정해야 해요.”
“담보요?”
“읽을 기억 하나.”
도진은 책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윤하의 손에서 번지는 잉크를 바라봤다. 표지의 글씨 아래로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첫 장을 넘기면, 가장 오래 미뤄 둔 약속을 맡긴다.’
윤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도서관에 입사한 지 사흘. 규칙은 수십 개나 들었지만, 이런 규칙은 교육자료에 없었다.
“이런 건 계약서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아무도 열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럼 당신은 아세요? 내가 뭘 맡기게 되는지.”
도진은 대답 대신 안경을 벗어 셔츠 끝으로 닦았다. 그의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윤하는 책장을 넘겼다.
첫 장은 비어 있었다. 종이가 검게 젖더니 문장 하나가 번졌다.
‘서윤하는 오빠에게 내일 만나자고 약속했다.’
목 안쪽이 조여 왔다. 오빠라는 말은 기억 속에 너무 오래 묻혀 있었다. 윤하가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병원 복도에서 도하의 등을 본 장면이었다. 그 뒤의 시간은 자꾸 끊겼다. 장례식장에 갔는지, 경찰서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보다 그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책이 네 기억을 골랐어요.” 도진이 말했다. “지금 닫으면 아직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럼 책에 적힌 이름은요?”
“책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요.”
“사람처럼요?”
도진은 답을 피했다. 윤하는 첫 장의 문장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가 따뜻했다. 물에 젖은 책에서 날 수 없는 온기였다.
“오빠가 여기 왔었죠?”
“그 질문에 답하면 장부에 제 기억이 담보로 잡힙니다.”
“그게 대답이네요.”
“윤하 씨.”
“저는 이 책을 읽겠습니다. 대신 제 기억을 제가 고를게요.”
도진이 말리기 전에 윤하는 책에 손바닥을 올렸다. “오빠와 마지막으로 한 약속. 그 기억을 담보로 맡길게요.”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물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좁은 복도와 벗겨진 파란 페인트, 우산 아래에서 마주 선 두 사람. 윤하는 열일곱 살이었고 도하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의 코트 어깨엔 빗방울이 반짝였다.
“내일 밤 열한 시, 폐역에서 보자.”
“왜?”
“그때 말해 줄게.”
“또 혼자 결정하지 말고.”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윤하의 젖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윤하가 눈을 떴을 때 첫 장은 다시 비어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분명 중요한 약속을 본 것 같은데, 약속한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도진이 책을 닫았다. “열람 시간은 삼십 분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약속의 흔적을 찾아야 해요.”
“약속을 지키면 기억을 돌려받나요?”
“당사자가 현실에서 약속을 마무리하면 장부가 판단합니다.”
“당사자가 죽었으면요?”
도진은 침묵했다. 윤하는 그 침묵이 규칙보다 오래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주소가 번져 나왔다. 폐역 매점, 4번 승강장.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곳이었다. 윤하는 코트를 여미며 뛰었다. 도진이 뒤에서 열쇠를 챙겼다.
“혼자 가지 마요.”
“같이 오시겠다는 말로 들을게요.”
“그렇게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서님도 규칙만큼 말이 길어지는 날이 있네요.”
도진은 대답하지 않고 앞장섰다. 폐역 계단을 오르자 도시의 밤비가 유리 지붕을 두드렸다. 오래된 매점은 셔터를 반쯤 내린 채였다. 안쪽에 흰 머리를 묶은 여자가 도시락 통을 닦고 있었다.
“경자 씨?” 도진이 물었다.
여자가 손을 멈췄다. “문 닫았어요.”
윤하가 책을 내밀자 경자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책의 표지에 물방울이 맺히더니, 제목 없는 곳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엄마는 네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경자는 책을 보지 않았다. 대신 윤하의 손을 바라봤다.
“그걸 어디서 찾았어요?”
“반납함에서요. 이 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요.”
“주인은 죽었어요.”
“책은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을 적었는데요.”
경자는 행주를 접었다. 손목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죽었다고 말한 적 없어요. 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녀는 매점 뒤편의 작은 방을 열었다. 벽에는 오래된 기차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시간표 아래엔 ‘지연, 저녁 열한 시’라고 적힌 메모가 빛바랜 테이프로 고정돼 있었다.
윤하의 손가락이 저릿했다. 책에서 맡긴 기억과 비슷한 시간이었다.
“딸한테 도시락을 싸 줬어요.” 경자가 말했다. “야간 청소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그 애가 집을 나가고도요. 여기서 기다리면 언젠가 먹을 거라고 생각했죠.”
“왜 전하지 못했어요?”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진 것 같았거든요.”
그 말은 꾸짖음도 변명도 아니었다. 윤하는 그저 오래 들고 있던 도시락 통처럼 무거운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도진이 말했다. “이 책은 경자 씨의 기억을 담고 있어요. 윤하 씨가 대신 사과할 수는 없습니다.”
“알아요.”
“그럼 뭘 하려는 겁니까?”
윤하는 책을 내려다봤다. 세 번째 장에 희미한 글씨가 있었다. ‘지연은 내일 밤 열한 시에 온다.’ 이름이 누구인지, 실제로 올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경자는 웃었다. “그 애 이름은 지연이 아니에요. 어릴 때 그렇게 부른 적은 있지만.”
책의 글씨가 조금씩 지워졌다.
“책도 틀리네요.” 윤하가 말했다.
“사람이 틀린 기억을 책에 맡기면 책도 틀립니다.” 도진이 답했다. “그래서 약속은 기록이 아니라 사람에게 확인해야 해요.”
그때 매점 밖에서 셔터가 세 번 두드려졌다. 경자의 손에서 행주가 떨어졌다.
“엄마.”
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자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윤하는 책을 닫지 않았다. 약속은 도서관이 대신 끝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문 앞까지 걸어갈 용기를 빌려줄 수는 있었다.
“문 열어도 돼요.” 윤하가 조용히 말했다. “대신 무슨 말을 할지는 경자 씨가 정하세요.”
경자는 손잡이를 잡았다. 열기 전, 그녀는 윤하를 돌아봤다.
“책을 가져온 사서 아가씨. 당신은 누굴 기다리고 있죠?”
윤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자기 기억에서 오빠와의 약속이 빠져나간 빈자리만 선명했다.
경자는 손잡이를 잡고도 바로 올리지 않았다. “내가 매주 도시락을 놓았어. 네가 가져가지 않아도 버리지 못했어. 그게 엄마 노릇인 줄 알았나 봐.”
문밖에서 젊은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야. 매점 문 닫기 전에 열쇠만 받으러 왔어.”
“열쇠는 카운터 서랍에 있어.” 경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시락도 하나 남아 있고.”
“또 그 얘기네.”
윤하는 책의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더 읽으려 들자 손가락 아래 종이가 미지근하게 꿈틀거렸다. 경자의 딸은 아직 문밖에 있었다. 두 사람의 약속을 끝내려면 책을 펼치는 일보다 서로의 말을 듣게 하는 일이 먼저였다.
도진이 작게 말했다. “열람 종료까지 십 분입니다. 책은 기다려 주지 않아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잖아요.” 윤하는 문을 바라보며 답했다. “책이 기다려 줄 필요는 없고요.”
경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시락을 먹으라고 말하지 않을게. 그냥 가져가. 싫으면 네가 버려.”
문밖의 기척이 멈췄다. “문부터 열어. 얼굴 보고 결정할 거야.”
경자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윤하는 책에 떠오른 문장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았다. 이번엔 글씨가 사라져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이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셔터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경자가 직접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