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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사서는 달빛으로 빚을 읽는다3화

야간 사서는 달빛으로 빚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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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오빠가 남긴 빈 책

“윤도하라는 이름이 왜 거기 있어요?”

도진은 대답하기 전에 매점의 셔터를 확인했다. 지연과 경자는 아직 안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고 있었다. 다툼은 끝난 게 아니었지만, 다음날 병원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생겼다. 책은 닫혔고 표지의 물기는 말랐다.

“책을 반납하고 나면 설명하겠다고 했잖아요.”

“아뇨. 열람 끝나면 확인할 게 있다고 했죠.”

“같은 말 아닙니까?”

“아니요. 지금은 장부를 보여 달라는 말이에요.”

도진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윤하는 그의 손에 놓인 지하 서랍 열쇠를 빼앗지 않았다. 책이 가리키는 이름을 봤다고 해서 도진에게 진실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금 무엇을 숨기는지 물을 수 있었다.

“당신은 오빠가 여기 왔다는 걸 알았어요?”

도진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때 매점 입구의 종이 울렸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들어섰다. 목에 건 은색 명찰에는 ‘기억도서관 계약관리실, 서해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야간 열람 중인 책이 회수 시한을 넘겼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반납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미 열람은 종료됐어요.” 도진이 답했다.

“장부에 완료 표시가 없습니다.”

“당사자들이 약속을 정리했습니다. 책이 닫혔어요.”

서해진은 매점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책을 주세요.”

윤하는 그 손과 책을 번갈아 보았다. “책을 가져가면 안에 담보된 기억은 어디로 가죠?”

“담보 기억은 기록고에 보관됩니다.”

“얼마나요?”

“계약 조건에 따라 다릅니다.”

“기억을 돌려받은 사람이 있나요?”

남자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열람자는 약관에 동의했습니다.”

도진은 서랍 열쇠를 주먹 안에 감췄다. “그 약관은 도시가 바뀌기 전 문서입니다. 현재 이용자에게 적용되는지 재검토해야 합니다.”

“선임 사서가 계약을 해석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래서 재검토를 요청한 겁니다.”

해진은 윤하를 향해 손바닥을 폈다. “신입이시죠. 책을 넘기면 초과 열람 책임은 여기서 끝납니다.”

책이 윤하의 손에 닿은 순간, 첫 장의 빈 공간이 다시 따뜻해졌다. 여기에 도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책을 넘긴다면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도 함께 넘기는 셈이었다.

“이 책이 경자 씨의 거라면, 돌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기억책은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인데요?”

“관리실이 보관합니다.”

“당사자가 살아 있는데요.”

“당사자가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 보관의 의미가 없습니다.”

윤하는 경자의 매점 쪽을 보았다. 그 말이 맞다면, 책은 사람 대신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을 마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도서관이 정할 수 없었다.

해진은 손을 내린 뒤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지금 인계하지 않으면 윤하 씨의 임시 자격이 취소됩니다. 담보 기억도 회수 신청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어요.”

도진이 낮게 말했다. “그건 협박입니다.”

“규정 안내입니다.”

윤하는 계약서를 받지 않았다. “제 기억이 뭐였는지 아세요?”

“열람 장부에 기재돼 있습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해진은 침묵했다. 도진도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알고 있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윤하는 책을 펼쳤다. 담보 기억을 되찾으려 한 건 아니었다. 경자가 직접 약속을 선택하고 지연과 내일의 시간을 정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빈 첫 장에는 이제 다른 문장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문을 열지 못해도 떠나지 않았다.’

윤하는 경자에게서 들은 말이 아니라, 경자가 지연의 말을 듣는 동안 선택한 시간을 읽었다. 그 순간 책의 가장자리에서 윤하의 마지막 기억이 되살아났다.

열일곱 살의 자신은 폐역 승강장에 서 있었다. 도하는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았다. 대신 매점 앞에 젖은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윤하는 그 우산을 들고 병원으로 달렸다. 오빠가 이미 병원에 갔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날 밤 그는 말없이 사라졌고, 윤하는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오빠를 잃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기억 속 승강장에는 막차 안내 방송이 울렸다. 도하가 오지 않자 윤하는 매점까지 뛰어갔다. 경자는 그날 자리를 비우고 병원으로 갔고, 매점 문에는 ‘잠시 후 돌아옵니다’라는 종이만 붙어 있었다. 우산은 셔터 앞에 기대어 있었다. 손잡이에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어 오빠가 두고 갔다고 생각했다.

우산 안쪽에는 병원 영수증이 접혀 있었다. 작은 글씨로 ‘윤도하, 응급 처치’라고 적혀 있었지만, 열일곱 살 윤하는 영수증을 읽지 못했다. 비에 번진 숫자만 보고 버스 시간표 뒤에 끼워 넣었다. 집에 돌아온 뒤엔 그날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며칠 뒤 우산이 사라지자 약속의 마지막 흔적도 사라졌다고 여겼다.

“오빠는 어디 있었어요?” 지금의 윤하가 물었다.

기억 속 도하는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창문 너머로 비를 보고 있었다. 윤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복도 끝으로 고개를 돌리던 도하만을 기억이 비췄다.

“너 오면 안 돼.” 도하가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내가 잘못한 걸 네가 대신 갚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이 누구에게 향했는지, 그 순간엔 알 수 없었다. 기억은 장면의 끝에 다다르자 다시 젖은 종이처럼 흐릿해졌다. 윤하는 도하가 왜 병원에 있었는지, 왜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약속을 어겨 그를 잃은 건 아니라는 사실만은 처음으로 분명해졌다.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책장은 저절로 넘어갔다. 서해진이 책을 잡으려 했지만 윤하는 몸을 돌려 책을 가슴에 붙였다.

“그날, 오빠는 병원에 있었어요.”

도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하 씨, 그건—”

“당신이 알고 있었죠.”

“도하 씨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기억을 맡기고, 네가 그 밤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 기억을 돌려주면 넌 그를 찾으러 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나쁜 일인가요?”

도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에 쥔 열쇠를 내밀었다. “지하 기록고에 네 담보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열려면 장부를 같이 봐야 해요.”

해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해진은 명찰 뒤에서 투명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열람자가 담보를 제공하면 기록고가 관리합니다. 사서가 임의로 반환하면 그 기억과 연동된 다른 기록까지 손상될 수 있어요.”

“다른 기록이 뭔데요?” 윤하가 물었다.

“그건 열람자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내 기억이 다른 사람 기록에 붙어 있다면 알아야죠.”

해진은 잠시 눈을 피했다. “도서관은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지, 관계를 판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반환 시점은 당신들이 정하네요.”

“보관을 맡긴 사람은 계약에 동의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윤하는 손바닥에 남은 종이의 온기를 느꼈다. 말싸움에서 이기려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된 기억을 자기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었다. 해진은 카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승인 절차를 밟으세요. 오늘은 책만 인계받겠습니다.”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책은 당사자의 약속이 끝나 닫혔습니다. 회수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걸 입증할 기록은요?”

윤하는 경자와 지연을 돌아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내일의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당사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기록고는 승인 없이 열 수 없습니다.”

“그럼 승인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윤하가 말했다.

“심사에는 며칠이 걸립니다. 그 사이 책은 회수될 겁니다.”

“오늘 밤은 안 돼요. 열람이 끝났고 책은 이미 닫혔어요.”

“그 판단은 관리실이 합니다.”

매점 안에서 지연이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엄마, 내일 병원은 아홉 시야. 늦지 마.”

“응. 문자할게.”

“전화도 해.”

“전화도 할게.”

두 사람의 약속이 짧은 목소리로 매점 밖까지 왔다. 책의 표지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물이 바닥에 닿기 전에 윤하는 안쪽 표지를 들춰 보았다.

희미한 필체가 드러났다.

‘윤하야, 네가 이 책을 읽을 때는 내가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네가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 괜찮아.’

서명은 윤도하였다.

윤하는 책을 닫았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오빠의 행방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는 그 빈칸을 도서관이 대신 채워 주리라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도진이 열어 준 지하 서랍 열쇠를 받아 들었다.

“기록고를 보여 주세요. 제 기억부터 확인할 거예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계약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철수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회수 때까지 결정하세요. 도서관의 규칙을 따를지, 자격을 포기할지.”

“그 선택은 제 쪽에서 할게요.”

그가 나간 뒤, 지연은 경자와 함께 셔터를 내렸다. 두 사람은 내일 병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약속은 기억책이 아니라 두 사람의 입으로 남았다.

윤하는 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도진은 한 손에 램프를 들고 앞서 걸었다. 계단 아래에서 오래된 서랍들이 빽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안쪽 서랍에는 윤하의 이름이 아니라 ‘윤도하’라고 쓰인 작은 종이표가 붙어 있었다.

그녀가 손잡이를 당기자, 안에서 책이 아니라 종소리가 났다.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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