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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자리의 증언2화

불이 난 자리의 증언

불이 난 자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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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멈춘 교대벨

비가 내려 공장 바닥에 고인 소방수가 검게 흘렀다. 서은결은 전날 표시해 둔 구역 앞에서 멈췄다. 제어반은 아직 그대로 있었지만, 야간조 작업자들이 출근해 출입문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교대조 명단을 확인하려고 왔다. 한 사람이 “오늘은 일 못 한다고 문자가 왔다”며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안전관리 이사 정기훈은 사람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현장 보존 중이니까 작업자분들은 귀가하셔야 합니다. 급여 문제는 인사팀에서 따로 안내할 겁니다.”

“어제 다친 윤 반장님은요?” 누군가 물었다.

기훈은 답을 망설였다. “병원에 계십니다. 가족에게 연락은 했고요.”

야간조 반장 김보라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전날 조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 달라고 했지만, 동료들은 이미 그녀가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한 작업자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라 언니, 열풍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어?”

보라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내가 본 건 분전반 불꽃이야. 그보다 앞은 모르고.”

“그럼 회사가 우리 말을 들을까?”

“내가 그걸 보장 못 해.”

은결은 멀리서 그 대화를 들었다. 그녀가 대신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현장에 들어가기 전 작업자들에게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할 수 있도록 개인별 면담을 제안했다. 기훈은 재가동 일정이 밀린다며 반대했다. 보라는 처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어제는 오늘부터 교대한다더니, 오늘은 인사팀이 안내한다잖아요. 그럼 우리 여기서 기다릴게요.”

기훈은 입술을 깨물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가동은 아직 확정 못 했습니다. 임금은 회사가 책임질 겁니다.”

“말로는요?” 보라가 물었다. “어제도 제가 메시지를 보내면 확인한다고 했어요.”

작업자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은결은 그들이 통제선을 넘지 않도록 출입구 옆에 면담 공간을 만들자고 했다. 소방 지휘관은 작업자를 한 명씩 불러 짧게 진술을 받을 수 있다고 허가했다. 기훈은 그때서야 생산동으로 들어가려던 지게차를 돌려세웠다. 불이 꺼졌다고 현장이 끝난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직 같은 교대 시간에 묶여 있었고, 누구 하나는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첫 면담에서 생산 라인 담당자는 전날 전기실에서 탄내를 맡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기록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계약직 관리자가 “생산 멈추면 다 같이 손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은결은 익명으로 적을 수 있는 초기 메모와 정식 진술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 작업자는 “나중에 불이 났을 때는 내가 본 것도 다 틀렸다고 할 거잖아요”라고 했다.

보라가 문밖에서 그 말을 들었다. “내 말은 맞았어도, 기록에 안 남으면 없던 일 되는 거야?”

은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기록을 남기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다만 이름을 공개하는 건 별도의 문제라 절차를 확인해야 합니다.”

보라는 “절차”라는 말을 싫어하는 듯 웃었다. “사람들은 월급 날짜를 묻는데, 우린 절차를 기다려야 하네요.”

기훈이 공장 사무실에서 작업 일지를 찾아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은결에게 내밀었지만, 원본 대신 스캔본이었다. “화재 전날 전기 설비 점검 기록입니다. 업체에서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은결은 문서의 날짜를 확인했다. 점검은 한 달 전이었고, 새 생산설비가 들어온 날짜는 그보다 뒤였다. “설비 증설 이후 점검 기록도 있습니까?”

“정식 점검은 아니고, 업체가 연결 상태를 봤습니다.”

“그걸 확인할 작업 요청서가 있겠네요.”

기훈은 시선을 돌렸다. “비용 견적을 받은 뒤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보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 우리한테는 한 번도 안 했어요. 분전반 냄새가 나서 물어봤을 때도 ‘괜찮다’고만 했잖아요.”

“내가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안전팀장님이 말했어요. 이사님한테서 들었다고요.”

기훈은 파일을 닫으려 했다. 은결은 가로막지 않고 물었다. “그 작업 요청서는 어디 있습니까?”

“사무실 서버에 있을 겁니다.”

“삭제되거나 덮어쓰기 되지 않게 보존해 주십시오. 수사팀에도 자료를 요청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기훈은 화가 난 듯 말했다. “공장을 전부 멈춰 놓고 수사팀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직원들 급여는 누가 줍니까?”

보라가 대신 답했다. “저희요. 출근 못 해도 월세는 나가니까요. 그래서 열풍기 잘못이라고 쓰면 다음 달에는 일자리가 남는 건가요?”

기훈은 입을 다물었다. 은결은 회사가 재가동할 수 있는 구역과 조사 중인 구역을 분리할 수 있는지 현장 지휘관에게 물었다. 손상된 전기실과 연결된 생산 라인은 접근을 제한하고, 창고 반대편 포장 구역은 안전 점검 후 임시 출입을 검토할 수 있었다. 작업자들이 모두 돌아가도록 내보내는 대신, 회사는 임시 유급 대기와 병원 동료 연락을 먼저 안내하기로 했다. 완벽한 해결은 아니었다. 적어도 작업자들은 오늘 급여를 잃을지 몰라 기다리던 자리에서 돌아설 수 있었다.

오후에 전기 감식 담당자가 도착했다. 그는 분전반의 차단기 접점을 살피고, 화재로 변형된 부품은 현장 사진과 연결 상태를 남긴 뒤 기관 간 인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열풍기 케이블은 같은 회로에 연결됐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담당자는 단자에서 확인되는 용융 흔적을 가리켰다. “전기적 아크일 가능성은 있어도, 이게 화재를 시작했는지 화재 뒤 생긴 건지는 비교가 필요합니다.”

기훈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열풍기가 원인일 수도 있단 얘기네요.”

“가능성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담당자가 선을 그었다.

은결은 열풍기와 분전반을 함께 보되, 불꽃이 번진 순서를 추정하지 말자고 했다. 현장 바닥에는 소방수가 쓸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통로 쪽 그을음은 약했고 분전반 쪽 천장은 깊게 검었다. 보라의 진술이 현장 흔적과 맞을 수도 있지만, 아직 발화점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작업자가 하나씩 퇴근하던 저녁, 보라는 은결에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메시지 원본을 보여 주면 도움이 돼요?”

“원하시면 정식 자료 제출 방법을 안내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넘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라는 화면을 열고 안전관리팀 단체방을 보여 줬다. 화재 전날 새벽 1시 58분, “전기실 쪽에서 탄내. 차단기 확인 필요합니다. 지금 라인 멈춰야 할까요?”라는 문장이 있었다. 읽음 표시는 0이었다. 그 아래에는 다음 날 오전 8시 12분에 기훈의 계정으로 “생산 일정 확인 후 보겠습니다”라는 답이 남아 있었다.

보라는 화면을 내리지 않았다. “제가 두 시간 더 기다렸으면 윤 씨가 혼자 거기 있었을 거예요. 제가 라인을 세웠으면 임금에서 깎였겠죠. 그걸 제가 결정해야 했어요?”

은결은 그녀의 손을 봤다. 붉은 작업 장갑이 손가락 끝에서 말려 있었다. “위험을 알렸다면, 현장을 멈출 책임은 관리자에게도 있습니다. 다만 이 메시지가 실제로 어떤 결정을 만들었는지는 더 확인해야 해요.”

“그럼 제 이름을 넣어 주세요. 적어도 제가 알렸다는 건 남겨야겠어요.”

보라는 휴대전화를 들고 정식 자료 제출 동의서를 읽었다. 이름과 메시지 내용이 수사팀에 전달되며, 필요한 경우 추가 진술을 요청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녀는 서명하기 전에 펜을 멈췄다. “저 말고 야간조 다른 사람도 같이 불러 주세요. 제가 혼자 봤다고 하면 또 제 기억 문제라고 할 거예요.”

은결은 면담을 개별로 진행하되, 보라가 동료들에게 진술을 강요하지 않도록 했다. “함께 오실 수는 있지만 각자 본 것을 따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보라는 잠시 생각한 뒤 서명했다. “좋아요. 대신 윤 씨한테는 제가 먼저 연락할게요.”

저녁 늦게 경찰 수사관이 작업 요청서 보존을 공식 요청했다. 기훈은 자료를 찾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은결은 그의 얼굴에 남은 불안과 분노를 읽었다. 기훈이 지키려는 것은 회사만이 아니었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80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숫자는 위험 신고를 묵살한 이유를 지우지 못했다.

보라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윤 씨의 가족과 통화했다. 그의 아내는 치료가 끝나면 회사에서 합의금을 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서류부터 가져오래요. 저는 남편이 깨어나서 자기가 본 걸 말하고 싶어요.” 보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메시지를 제출한 일이 윤 씨의 치료비와 고용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통화를 끊은 뒤 그녀는 은결에게 말했다. “제가 괜히 나서서 더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은결은 작업장 쪽을 바라봤다. “복잡한 건 이미 있었어요. 보라 씨가 만든 게 아닙니다.”

보라는 그 말을 곧장 믿지는 못했지만,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내일은 다른 사람도 불러 주세요. 혼자 말하고 혼자 책임지는 건 싫어요.”
보라의 메시지는 제출되었지만, 화재의 원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은결은 제어반을 그대로 두고 정식 인계를 기다렸다. 창밖에는 작업자들이 귀가하지 않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음 급여와 동료의 상태를 기다렸다. 은결은 현장 수첩을 덮으며, 내일은 불이 나기 전 보라가 걸었던 동선을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공장 정문 쪽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훈이 기자들에게 “개인 열풍기 사용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보라는 통제선 안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돌아서지 않고 은결을 향해 말했다. “내일은 동선을 보여 드릴게요. 제 이름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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