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불이 난 자리의 증언3화

불이 난 자리의 증언

불이 난 자리의 증언

AD
스폰서 광고

3화: 불꽃을 본 자리

다음 날 아침, 김보라는 작업장에 들어가는 대신 바깥에서 걸음을 되짚었다. 화재 당시처럼 교대 기록을 들고, 입구에서 전기실까지 천천히 걸었다. 서은결은 거리를 재고 사진을 남겼다. 보라는 세 걸음마다 멈췄다. “여기서 처음 냄새가 났어요. 바로 안쪽에서 난 게 아니라, 환풍기 쪽으로 들어왔어요.”

“불꽃을 본 곳은?”

“저기 분전반 앞. 제가 몸을 돌렸을 때 두 번 튀고, 마지막 한 번은 문 쪽으로 번졌어요.”

보라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은결은 그 선을 따라 바닥의 물길과 천장 그을음을 살폈다. 불이 번진 통로와 보라가 본 불꽃은 일직선이 아니었다. 다만 화재 뒤 소방수가 밀어낸 재와 잔해가 흔적을 흐렸다. 은결은 초기에 표시했던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 동료 감식관에게 보라가 짚은 좌표를 별도로 기록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보였다는 걸 확인했다고 쓰면 안 돼요?” 보라가 물었다.

“보라 씨가 이 자리에서 그렇게 기억한다고 기록할 수 있어요. 불꽃이 실제로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다른 증거와 맞춰 봐야 합니다.”

보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내가 기억을 틀리게 하면, 회사는 그걸로 다 끝내겠죠.”

은결은 대답을 아꼈다. 바로 전날 정기훈 이사는 기자들에게 개인 열풍기 가능성을 먼저 말했다. 그 문장은 이미 지역 뉴스에 실렸고, 댓글에는 작업자 부주의라는 말이 달렸다. 보라는 그 댓글을 읽지 않겠다고 했지만, 동료들 휴대전화에는 같은 기사가 계속 떴다.

야간조 두 사람이 통제선 밖으로 왔다. 한 사람은 작업대 끝에서 열풍기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그런 기기를 본 적 없다고 했다. 말이 갈렸다. “작업이 추워서 한동안 썼어요. 그런데 불나던 날은 제가 쓰지 않았어요.” 작업자는 먼저 말한 뒤, 바로 주변을 둘러봤다. “제 이름을 적으면 계약 연장 안 해 주겠죠.”

보라는 발끈했다. “열풍기 쓴 적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걸 왜 숨겨?”

“누나가 대신 잘리진 않잖아요. 나는 다음 주 면접도 잡혀 있어요.”

보라는 입을 다물었다. 은결은 두 사람을 분리해 따로 진술을 받았다. 기기를 사용한 사실과 화재가 시작된 원인은 다른 질문이었다. 작업자는 회사에서 금지 공지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작업장에는 임시 난방이 없었다고 했다. 보라는 공지 자체를 못 봤다고 했다. 기훈은 게시판 사진을 내밀었다. 게시 날짜는 화재 사흘 전이었다. 그러나 게시판은 야간조 탈의실 반대편 사무실에 있었다.

“반장 회의에서 전달했다고 했잖아요.” 보라가 기훈을 노려봤다.

“전달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누가 말했어요?”

기훈은 답하지 못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은 회사가 원인을 정한 다음에 하네요.” 보라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저희가 그 게시판을 봤는지, 위험하다고 말했는지는 나중이고요.”

은결은 보라를 말리지 않았다. 감정이 커지면 진술을 중단할 수 있지만, 그녀의 분노가 조사에 부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정 이사님, 게시 공지와 전달 기록을 보존해 주세요. 전달했다고 보고한 사람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기훈은 얼굴을 굳혔다. “작업자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은 문제와 설비 문제는 따로 봐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둘 다 확인하겠습니다.”

오전 중 경찰 수사관이 전기 점검 요청서를 확보했다. 설비 증설 뒤 회로 용량 재검토 견적을 받은 내용이었다. 업체는 분전반 점검과 차단기 교체를 권했지만, 회사가 비용 승인을 보류한 상태였다. 요청서 마지막에는 정기훈 이사의 전자 결재가 있었다. 그는 문서를 넘겨받자 미간을 눌렀다.

“이건 최종 결재가 아니었습니다. 견적을 검토하라는 뜻이었어요.”

“그 뒤 점검을 다시 요청했습니까?” 수사관이 물었다.

“예산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예산 회의는 언제 열렸습니까?”

기훈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보라가 말했다. “그 회의 날에도 라인은 돌았어요. 전기실 냄새가 나서 제가 메시지 보냈고요.”

“안전 이사님이 직접 확인하셨습니까?” 은결이 물었다.

기훈은 한동안 문서의 서명을 보았다. “아니요. 담당 팀에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담당 팀은 누굽니까?”

기훈은 안전관리팀장을 지목했다. 팀장은 현장에 없었다. 그는 소방서와 경찰의 추가 출석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기훈은 문서를 빼앗지 않았다. 다만 “회사도 문을 닫으면 안 됩니다. 하청까지 여든 명이 먹고살아요”라고 말했다.

보라는 돌아서려다 멈췄다. “우리도 일자리를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위험하다고 말한 거예요. 불이 난 다음에 열풍기 하나로 끝내면, 다음에 또 누군가 다쳐요.”

기훈은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보라 씨가 말한 내용은 조사에서 확인될 겁니다.”

“확인되기 전에 기사부터 내지 마세요.”

은결은 그 말이 기록에 남도록 요청했다. 기훈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기자에게 말한 건 초기 추정이었습니다. 지금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정 공지를 내겠다고 했다. 보라는 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윤 씨 가족한테 먼저 전화하세요. 그 사람은 병원에서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어요.” 기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병원 번호를 찾았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 그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 보라는 그 뒷모습을 보고서야 어깨를 내렸다.

점심 무렵, 공장 직원들이 작업장 바깥으로 모였다. 회사는 당일 임금을 보전하겠다고 알렸지만 다음 주 출근 계획은 정하지 못했다. 직원 하나가 보라에게 “형이 우리 대신 말한 거냐”고 물었다. 보라는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고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걸 말했어. 다른 사람 이름은 내가 말하지 않았어. 당신들이 본 건 당신들이 결정해.”

그 말은 그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한 사람은 보라가 회사 편을 들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회사가 보라를 내보낼까 걱정했다. 은결은 그들에게 단체 진술을 권하지 않았다. 각자가 본 위치와 시각을 따로 말하고, 필요하면 정식 조사에서 이름 공개 범위를 설명받게 했다. 어떤 사람은 귀가했고, 한 사람은 남아 더 말하고 싶다고 했다. 조사란 모두 같은 결론을 내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후에는 전기 감식 결과가 일부 나왔다. 분전반의 손상은 화재 열에 의한 변형과 아크 흔적이 섞여 있어 정확한 선후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열풍기의 플러그 주변도 손상이 심했고, 현장에서 회로 연결이 확인되지 않았다. 은결은 “발화 원인은 조사 중”이라는 문장을 보고서 초안에 남겼다. 회사가 바라는 결론도, 보라가 바라는 결론도 그 자리에서 쓰지 않았다.

보라는 조사 끝에 정식 진술서의 이름란에 사인했다. “이름을 빼면 제가 말한 게 없어질 것 같아요. 제 이름으로 남기되, 다른 작업자는 각자 결정하게 해 주세요.”

은결은 진술서를 그녀가 다시 읽는 동안 기다렸다. 보라는 서명 뒤에도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이제 저는 계속 일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제가 드릴 수 없습니다.” 은결은 손에 쥔 수첩을 내렸다. “하지만 원인과 관계없이 진술을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건 조사기관에 알릴 수 있습니다.”

“그걸 알리면 정말 보호돼요?”

“완전히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기록이 없으면 아무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보라는 수첩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제대로 적어 주세요. 제가 어제 실수한 것도 같이요.”

은결은 그녀가 화재 전날 라인을 멈추지 못한 사실을 기록했다. 동시에 관리자에게 위험을 알렸다는 메시지, 전달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도 적었다. 어느 한쪽이 모든 책임을 지는 식으로 쓰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 기훈은 기자들에게 정정 입장을 보냈다. 개인 열풍기가 화재 원인이라고 확정하지 않았으며,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보라는 그 문장을 읽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진짜 바뀐 건지, 문 닫을까 봐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둘 다일 수 있습니다.” 은결이 말했다.

보라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감식관님은 위로를 참 못하네요.”

“위로는 잘못하면 기록처럼 남으니까요.”

저녁에 수사관이 은결에게 새 자료를 전달했다. 회사 내부 서버에서 삭제되지 않은 설비 증설 요청 메일이 발견됐다. 기훈에게 보낸 안전관리팀장의 답장은 간단했다. ‘생산 일정 끝난 뒤 확인하겠습니다.’ 메일 발신 시각은 화재 전날 밤이었다.

보라는 그 문장을 보고 손에 쥔 붉은 장갑을 놓쳤다. “저는 그때 라인을 멈출 수 없다고 들었어요.”

은결은 화면의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화재가 나기 전부터 회사는 전기설비를 다시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메일 하나가 화재의 원인이나 형사 책임을 확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읽었고 어떤 결정을 했는지를 추가로 확인해야 했다.

보라는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단체방을 열었다. “제가 보낸 메시지 다음에 이 답장까지 봐야 해요. 회사가 받은 걸 알고도 그대로 뒀다면, 저는 혼자 거기서 멈추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그녀는 내일 경찰에 다시 출석하겠다고 말했다. 은결은 동행할 수 없었지만, 진술서 사본을 요청할 방법을 알려 줬다. 기훈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한 발 들어오려다 멈췄다.

“보라 씨, 내일 아침에 직원들에게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보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엔 말로만 하지 마세요. 그들이 들을 자리에서요.”

기훈은 대답 대신 휴대전화를 켰다. 화면에는 공장 재가동 일정표가 떠 있었다. 그는 일정표를 닫고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 첫마디는 “내일 야간조 전원 임금 보전 공지를 준비해 주세요”였다. 그 결정이 회사 전체를 바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원들 앞에서 설명해야 할 이름이 그의 이름이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