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보호자는 살림부터 합니다

9화: 주방의 기록
수레가 본관 정문을 통과하자 베른이 달려 나왔다.
"보호자님. 시장에서 사람이 하나 왔다 갔습니다. 봉투를 맡기고 수령 서명을 받아 갔어요."
서현은 수레에서 내리기 전에 봉투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베른이 내민 겉봉에는 시장 서기의 이름과 수령 시각이 적혀 있었다. 봉인은 깨끗했지만 한쪽 끝에는 굳은 붉은 밀랍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카엘이 손을 뻗었다.
"제가 열겠습니다."
"열기 전에 기록부터요."
서현은 수첩을 펴고 봉투 번호를 적었다. 수령자는 베른, 수령 시각은 겨울 둘째 달 16일 늦은 오후. 열람자는 윤서현과 카엘 로웬. 베른에게도 확인 서명을 받았다.
리아가 문 안쪽에서 봉투를 바라보았다.
"또 문서예요?"
"오늘은 식사 시간 전에 끝내겠습니다."
"문서를 지키느라 식사를 늦추면 안 돼요."
리아의 말에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주방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봉투 안에는 시장 서기가 보낸 거래 확인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거래를 막는 명령이 아니라 시장 장부에 남길 공식 확인본이었다. 테오 라반이 양모 한 자루와 약초 두 상자를 실제 검수한 뒤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양모의 등급과 중량은 거래표의 값과 일치했고 곡물 두 포대와 장작 한 묶음은 사흘 안에 인도하기로 했다.
마지막 줄에는 짧은 주의가 붙어 있었다.
현물 정산 거래는 거래 자산과 수령 물량을 동일한 기록에 남길 것.
서현은 그 문장을 읽고 카엘에게 사본을 건넸다.
"시장 서기는 거래 자체를 막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거래 자산과 물량을 한 기록에 묶으라는 뜻이에요."
"에드윈의 서한을 의식하고 있군요."
"모두가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적어야 합니다."
서현은 원본 봉투를 다시 접었다. 겉봉에 남은 붉은 밀랍은 종이에 붙이지 않고 작은 종이 위에 털어 별도로 감쌌다. 본관에서 본 밀랍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같은 발신자를 지목할 수는 없었다.
카엘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보관합니까?"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물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인하기 전까지 버릴 이유도 없고요."
그들은 거래 확인서를 기록실의 새 서류함에 넣었다. 서현이 잠그고 카엘이 옆 장부에 열람 시각을 적었다. 이번에는 리아도 문 앞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됐습니다."
서현이 말하자 주방 쪽에서 마리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번엔 이쪽 기록을 좀 봐 주시오."
마리엔은 주방 선반 앞에 작은 나무판 세 장을 세워 두었다. 판마다 아이들의 이름과 식사 시각이 적혀 있었다. 옆에는 배식 패 뒷면에 눌러쓴 짧은 메모가 쌓여 있었다.
"이건 언제부터 적은 겁니까?"
"첫 생존표를 만들 때부터요. 음식이 모자라면 양을 줄인 기록만 남기면 안 됩니다. 먹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도 봐야 하니까."
마리엔은 노아의 패를 펼쳤다.
"노아 도련님은 사흘 동안 저녁 육수를 먹은 뒤 입술 안쪽이 따갑다고 했습니다. 어제는 손등을 긁었고요. 아침 죽을 먹은 뒤에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식탁 아래에서 손을 빼냈다. 손등에는 옅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건 마석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음식 때문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육수를 먹은 뒤 나타난 반응이라고 적었지."
마리엔은 리아의 판을 옮겨 놓았다.
"리아 아가씨는 이틀 동안 밤에 세 번씩 깼습니다. 저녁이 늦은 날에는 속이 답답하다고 했고요. 미나 아가씨는 잠들기 전에 문 쪽 소리를 확인합니다. 콩죽이 늦어지면 더 오래 깨어 있고요."
리아가 곧장 반박했다.
"제가 잠을 못 잔 건 음식 때문이 아니에요. 문밖에서 누가 움직이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것도 기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음식과 시간과 소리가 한꺼번에 겹치면 무엇이 아이를 깨우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서현은 세 판의 메모를 나란히 놓았다. 공통으로 겹치는 것은 저녁 식사에 들어간 육수였다. 육수에는 훈제육과 감자 그리고 창고 안쪽에서 찾은 붉은 열매 가루가 들어갔다.
마리엔이 선반 아래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는 말라 쪼그라든 붉은 열매가루가 남아 있었다.
"이걸 넣으면 고기 냄새가 약해집니다. 북부 주방에서 쓰던 양념이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날에는 꼭 이게 들어갔습니다."
"어른들도 같은 걸 먹었잖아요."
카엘이 물었다.
"어른들은 양이 적었고 저녁을 일찍 먹었습니다. 아이들 그릇에는 식히려고 육수를 더 부었지요."
마리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습니다."
서현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손등의 계약 인장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계약 인장이 알려 주는 것은 계약 위험이지 아이의 모든 증상이 아니었다.
"알레르기라고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할 일은 원인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겁니다. 이 양념은 버리지 말고 봉인해서 따로 보관하세요. 앞으로 사흘 동안 아이들 음식에는 넣지 않습니다."
노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내가 먹으면 안 되는 게 또 생기는 거예요?"
"네가 문제라서 바꾸는 게 아니야. 모두가 어떤 음식에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기록이야."
"그럼 내 양도 줄어요?"
"아니. 양은 그대로고 재료만 달라져."
서현은 마리엔을 보았다.
"기본 죽은 세 그릇 모두 같은 양으로 주세요. 양념만 빼고 감자를 조금 더 풀어 속이 부담스럽지 않게 하죠. 저녁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끝내고 물을 한 잔씩 마십니다."
마리엔이 눈썹을 올렸다.
"그러면 어른들 것도 따로 해야 합니다."
"성인 몫을 따로 만드는 건 괜찮습니다. 아이들 식사량을 줄이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리아가 세워 둔 판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모두 같은 걸 먹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양을 먹는 것과 같은 재료를 먹는 건 다릅니다. 몸이 다르면 확인할 것도 달라요."
서현은 판 아래에 새 항목을 적었다.
저녁 종료 시각.
양념 유무.
식후 가려움과 속 불편.
잠든 시각과 깬 횟수.
마리엔은 그 목록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주머니 입구를 밀랍으로 막았다.
"주방 양념도 이제 장부에 올리겠소. 작은 재료라고 빼놓으면 나중에 누가 넣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니까."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록은 마리엔 씨가 관리해 주세요. 저는 식량과 비용을 맞추겠습니다."
"내가 주방 예산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아직 예산권을 넘기는 건 아니에요. 오늘부터 주방 사용 기록의 공동 확인자가 되는 겁니다."
마리엔은 짧게 웃었다.
"이 집에서는 그게 꽤 큰 자리군요."
저녁 솥에서는 향신료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마리엔은 감자를 으깨 콩의 껍질을 부드럽게 풀었다. 육수는 아주 묽게만 사용했고 붉은 열매 가루는 넣지 않았다. 아이들의 그릇에는 같은 양의 죽이 담겼다. 어른들의 그릇은 절반보다 조금 적었지만 식탁에 앉는 시간은 평소보다 빨랐다.
노아는 숟가락을 들고 한참 냄새를 맡았다.
"이번에는 안 따가울까요?"
"먹고 나서 몸이 말해 줄 거야. 불편하면 바로 알려 줘. 참는 게 잘 먹는 건 아니야."
노아는 한 숟가락을 삼켰다. 그리고 손등을 확인했다.
"아직 괜찮아요."
"지금 괜찮다고 내일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야. 그래서 적는 거야."
서현은 아이들의 그릇 옆에 작은 선을 그었다. 리아는 그 선을 보며 물을 마셨고 미나는 그릇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오늘은 문이 덜 시끄러워."
"문이 조용한 게 아니라 저녁이 빨리 끝나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좋아."
식사가 끝난 뒤 마리엔은 주방 불을 한 번만 보충했다. 서현은 동쪽 방의 이불을 확인하고 물그릇을 침대 옆에 두었다. 카엘은 복도 끝과 정문 사이를 돌며 잠금쇠를 확인했다.
"오늘 밤에도 순찰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잠든 뒤에는 문 여는 소리를 줄여 주세요."
카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열쇠 꾸러미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쇠붙이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리에 감았다.
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카엘은 원래 이런 걸 안 했어요."
"원래와 달라진 건 집의 상황입니다."
카엘은 무표정하게 대답했지만 천 조각을 두 번 확인했다.
리아는 잠자리에 들기 전 서현이 만든 표의 빈칸을 살폈다.
"제가 깬 횟수도 적을게요."
"네가 꼭 적을 필요는 없어요."
"제 몸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제가 아는 게 제일 빠를 거예요."
서현은 펜을 내밀었다.
"그럼 기록하고 싶을 때만 적어요. 잠을 지키는 일보다 기록이 먼저가 되면 안 됩니다."
리아는 작은 글씨로 첫 칸에 선 하나를 그었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밤은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서현은 주방의 불이 줄어든 뒤 한 번 더 동쪽 방을 살폈다. 노아는 옆으로 누워 있었고 손등의 붉은 자국은 더 번지지 않았다. 리아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미나는 문 쪽이 아니라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서현이 돌아서려는 순간 미나가 눈을 떴다.
"아침까지 있어?"
"있어."
"문이 열려도?"
"문이 열리면 먼저 확인하고 다시 돌아올게."
미나는 서현의 손등에 손가락을 올렸다.
"잉크가 오늘은 안 울어."
계약 인장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서현은 그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럼 지금은 자도 돼."
미나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손을 바로 빼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서현은 기록지에 첫 결과를 적었다. 노아는 식후 가려움을 호소하지 않았다. 리아는 밤중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미나는 한 번 눈을 떴지만 문을 확인하지 않고 다시 잠들었다.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원인이 확인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제보다 나은 밤이었다.
서현은 기록지 아래에 문장을 덧붙였다.
3일 동안 같은 조건을 유지할 것. 증상이 재발하면 재료와 시간을 다시 대조할 것.
아침 종이 울리기 전 정문에서 마차 바퀴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카엘이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보호자님. 후견 위원회 문장이 달린 마차입니다."
서현은 봉인된 양념 주머니와 시장 거래 확인서를 차례로 서류함에 넣었다. 어젯밤의 안정된 기록은 아직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다.
정문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현 보호자. 문을 열어 주십시오. 감사관 에드윈 세라트입니다."
서현은 잠든 아이들의 방을 한 번 바라본 뒤 카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고리가 천천히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