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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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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눈을 뜨자는 사람들

“……아빠 추워…….”

통신 랙 철망 안쪽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얼어붙은 유리 조각처럼 서늘했다.

“문 열어 줘…… 붉은 게 또 보여…….”

김 주임이 영하의 냉동실 안에서 손톱을 뜯기며 내뱉었던 처절한 비명이었다. 그것이 수십 미터 떨어진 방재실 구석의 쇠창살 안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살아나고 있었다.

스륵. 슥.

민석의 굳은 손톱이 통신 랙의 환기용 구멍을 천천히 긁어내렸다.

방재실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생수병을 쥐고 갈증을 달래던 생존자들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덜그럭.

누군가 쥐고 있던 플라스틱 물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물방울이 튀는 작은 소리마저 천둥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저…… 저게 무슨 소리야?”

어둠 속에서 중년 남자의 메마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트 단골손님이었던 배상철이었다.

“저 안에 있는 놈이 왜 창고에 있다는 김 서방 목소리를 내? 둘이 무전이라도 주고받았다는 거야? 괴물들끼리 텔레파시라도 통한다는 겁니까?”

“조용히 하십시오!”

한결이 낮고 단호하게 귓전을 울렸다.

“소리를 높이면 통로 쪽으로 진동이 퍼집니다.”

한결은 숨을 죽인 채 천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철망 너머에서 들려오는 민석의 목소리는 분명 김 주임의 음색을 완벽히 모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초자연적인 감응이 아니었다.

방재실 천장 모서리를 가로지르는 은색 공조 닥트관에서 미세한 웅웅거림이 느껴졌다.

“공조 배관입니다.”

한결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방재실로 철수했을 때 수동 댐퍼 레버를 잠갔지만 환기용 알루미늄 덕트 자체는 물류창고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김 주임이 냉동실 철문을 들이받으며 지른 고음의 비명이 얇은 함석 배관을 타고 메아리쳐 이곳까지 전달된 겁니다. 민석 씨는 그 공진음을 듣고 따라 읊은 것뿐입니다.”

“배관이고 공진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박두식의 거친 고함이 한결의 말을 찢고 들어왔다.

콰앙!

박두식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 끝으로 제어반 하단 콘크리트를 사납게 내리찍었다. 징 하는 금속 진동이 바닥을 타고 생존자들의 발바닥으로 번졌다.

“팀장님, 소리 내지 마세요!”

수아가 기겁하며 제지하려 했으나 박두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저놈들은 벽 너머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6미터 랙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며 사냥을 하고 있단 말이다!”

박두식이 방재실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거친 군화 발소리가 좁은 공간을 압박했다.

“김 서방 그놈, 눈이 새빨갛게 뒤집힌 채로 날 똑바로 노려보고 뛰어내렸어. 통조림 캔을 발로 차서 굉음을 일으키고 내가 허둥대는 틈을 타서 정확히 덮쳤다고. 눈가리개 뒤에 숨어서 더듬거리는 우리를 비웃으면서!”

박두식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퇴역 군인 출신으로 스스로 질서의 지배자라 믿었던 남자가 괴물의 시야와 완력 앞에 무력하게 짓눌렸던 충격이었다.

생존자들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상철이 울먹이듯 물었다.

“눈먼 채로 앉아서 저 괴물이 철망을 뜯고 나오길 기다려야 합니까? 문밖에서 다른 놈이 기어 들어오면 어떡해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박두식이 어둠을 향해 몸을 돌리며 선언했다.

“우리도 봐야 해.”

방재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뭐라고요?”

수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눈을 뜨자는 거다.”

박두식이 담담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두가 다 같이 눈가리개를 벗고 돌아다니자는 게 아니야. 나를 포함해서 건장한 셋이 조를 짠다. 교대로 딱 5초, 길어야 10초씩만 문틈으로 바깥 복도를 확인하는 거다. 모니터에 덮어둔 담요도 살짝 들춰서 화면만 얼른 확인하고 덮으면 돼. 복도에 놈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대비를 할 거 아닌가!”

“미친 짓입니다.”

한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라 말했다.

“팀장님, 당신은 지금 생존자 전원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려는 겁니다.”

“뭐라고?”

“민석 씨가 왜 저 철망 안에 갇히게 되었는지 벌써 잊었습니까? 스마트폰 액정 화면의 미세한 반사광을 1초도 안 되게 본 대가가 저겁니다. 모니터 화면이든 문틈이든 붉은빛의 잔상을 망막에 담는 순간 이성이 무너집니다.”

“그건 이 계집애랑 멍청한 녀석들이 당황해서 그런 거고!”

박두식이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단련된 사람이라면 찰나의 순간에 상황만 확인하고 눈을 감을 수 있어. 눈뜬 놈을 상대로 눈을 감고 싸우는 전쟁이 세상에 어디 있나? 적의 위치도 모른 채 귀만 쫑긋 세우고 있는 게 살아 있는 사람 꼴인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한결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만약 누군가 문틈을 보고 돌아왔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붉은 안개에 오염되었는지 아닌지 눈가리개를 다시 쓴 뒤에 당신은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방재실의 공기가 덜컥 내려앉았다.

“눈을 감추고 있으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민석 씨도 변이하기 직전까지 우리 질문에 대답을 했습니다. 10초를 보고 온 사람이 10분 뒤에 괴물이 되어 뒤에서 동료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서로가 서로의 눈가리개 안을 의심하며 칼을 들이대게 될 겁니다.”

한결의 논리는 차갑고 빈틈이 없었다.

배상철을 비롯해 박두식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생존자들의 발소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눈가리개 뒤에 감염자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보이지 않는 어둠보다 더 끔찍한 공포였다.

박두식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궤변 늘어놓지 마! 네놈이 그 빌어먹을 귀로 언제까지 우릴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다음 놈이 덮칠 때는 네 귀가 찢어질 거다!”

그때였다.

쿵.

방재실 후면의 육중한 방화문 너머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울렸다.

모든 사람의 숨이 멎었다.

쿵. 드르륵.

마치 누군가 무거운 쇠붙이를 바닥에 질질 끌며 철문 바로 앞을 지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왔어.”

배상철의 턱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문 앞에…… 괴물이 왔어……!”

“모두 움직이지 마십시오.”

한결이 나지막이 경고하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공포는 이미 이성을 집어삼킨 뒤였다. 박두식의 선동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배상철이 비명을 지르며 문 쪽으로 내달렸다.

“싫어! 난 확인해야겠어! 문에 달린 외시경으로 딱 한 번만 보면 되잖아!”

배상철의 거친 손이 자신의 눈가리개 매듭을 쥐어뜯었다. 천 쪼가리가 풀리며 그의 관자놀이가 드러나는 찰나였다.

파악!

한결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배상철이 거칠게 내쉬는 숨결과 옷감이 스치는 방향은 한결의 머릿속에 선명한 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한결의 손바닥이 배상철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크악!”

배상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한결의 다른 쪽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콘크리트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쿵!

“입 닥치십시오.”

한결이 배상철의 귓가에 차갑게 읊조렸다.

“눈가리개를 벗는 순간 당신은 우리 손에 죽습니다.”

배상철은 사지가 굳은 채 버둥거렸다. 한결의 완력은 단호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한결은 배상철을 제압한 채 문 쪽을 향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쿵. 드르륵. 덜컹.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방재실 안의 생존자들은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문이 부서지고 피투성이 괴물이 난입할 것만 같은 공포가 목을 죄었다.

지우가 살금살금 다가와 문 옆의 벽면에 귀를 바짝 댔다.

잠시 소리를 분석하던 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발소리가…… 아니에요.”

한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한결이 벽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생물의 발소리라면 체중이 실리는 리듬과 숨소리가 섞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3초에서 4초 간격으로 정확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쇠판이 바닥을 치는 소리입니다.”

“쇠판……?”

박두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물류창고에서 캔이 쏟아질 때 하역 통로 바닥에 쓰러졌던 지게차 주의 안내판입니다. 얇은 함석판이죠. 공조 닥트에서 역류하는 환기 바람에 흔들리며 문틀 하단을 규칙적으로 치고 있는 겁니다.”

한결의 차분한 진단에 방재실 안을 짓누르던 살인적인 긴장감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배상철이 벽을 짚고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풀릴 뻔했던 그의 눈가리개 끝자락이 식은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 하마터면…….”

배상철이 제 손을 내려다보며 울먹였다. 만약 한결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쇠판 하나 때문에 스스로 눈가리개를 벗고 미쳐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박두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쇠파이프를 쥔 채 한결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바람이었다 치자. 하지만 다음엔 진짜 놈들이 올 거다. 그리고 한결 씨, 당신 눈가리개나 만져 봐. 다른 사람들 꼴은 안 보이지?”

박두식의 지적에 한결은 조용히 자신의 눈가를 더듬었다.

셔츠를 찢어 만든 천은 이미 땀과 기름, 먼지에 찌들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 전 김 주임과의 몸싸움에서 튄 핏자국까지 말라붙어 눈꺼풀을 찌르고 있었다.

다른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동안 눈을 가린 채 극도의 긴장 속에 갇혀 있다 보니 땀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 짓무르고 따가웠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거친 섬유가 안구를 긁어대는 고통에 다들 무의식적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눈가리개 자체가 생존자들을 갉아먹는 고문 도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땀에 젖어 썩어가는 천 쪼가리를 언제까지 감고 있을 건가? 가려워서 비비다가 벗겨지면? 끈이 삭아서 끊어지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건가?”

박두식의 반박은 현실적이었다. 무작정 참으라는 원칙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방재실 안이 다시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수아였다.

“차광 구역을 만들면 돼요.”

수아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모두의 고개가 수아 쪽을 향했다.

“차광 구역이라니?”

박두식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방재실 안쪽 비품 창고에 자재가 있어요.”

수아가 손가락으로 벽면을 짚으며 설명했다.

“서버 랙을 들여올 때 썼던 대형 포장용 검은 암막 비닐이 여러 롤 남아 있어요. 벽면에 붙이는 두꺼운 은박 단열재랑 대형 골판지 박스도 쌓여 있고요.”

수아의 목소리에 점점 확신이 실렸다.

“방재실 구석 한편을 골판지와 은박재로 완전히 둘러싸고 그 위에 암막 비닐을 서너 겹 덧대어 밀폐 텐트를 치는 거예요. 빛이 단 1%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암실을 만드는 거죠.”

한결의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수아가 말을 이었다.

“그 암실 안에서라면 눈가리개를 벗어도 안전해요. 땀에 젖은 천을 빨아서 말리거나 깨끗한 거즈로 교체할 수 있고 짓무른 눈가에 소독약을 바를 수도 있어요. 빛이 아예 없는 곳이니까 눈을 뜨더라도 붉은 안개를 볼 위험이 전혀 없잖아요.”

완벽한 타협점이었다.

눈을 떠서 상황을 확인하겠다는 박두식의 위험한 도박을 막아내면서도 생존자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 고통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암실이라면 눈가리개를 정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단,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가서 정비를 마친 뒤 다시 눈을 완벽히 가리고 나와야 합니다.”

생존자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거라면…… 살 것 같네요.”

배상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두식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지만 더 이상 반박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흥, 탁상공론이 아니길 바란다. 당장 만들어 봐.”

박두식은 쇠파이프를 바닥에 긁으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갈등은 봉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에는 여전히 꺾이지 않은 고집이 웅크리고 있었다.

“수아 씨, 지우 씨. 저와 함께 자재를 확인하러 갑시다.”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이 비품 창고 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떼던 순간이었다.

톡. 톡.

통신 랙 안쪽에서 쇠창살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민석이었다.

조금 전까지 김 주임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녀석이 철망에 이마를 댄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결아.”

한결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김 주임의 목소리도, 민석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자애롭고도 떨리는 중년 여성의 음성이었다.

“한결아…… 엄마 장 다 봤다…… 어디 있니……?”

마트 밖 도심 한복판에 홀로 남아 있을 한결의 어머니, 바로 그녀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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