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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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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차광 구역

한결은 자신도 모르게 통신 랙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한결아…… 어디 있니……?”

철망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장을 마치면 꼭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묻던 사람. 오늘 저녁에 함께 먹을 것을 사러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전화가 끊기기 전에도 저녁거리부터 걱정했다. 한결은 장바구니 손잡이가 손바닥에 남긴 자국을 아직 기억했다. 그 사람이 정말 문밖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면 어쩌나.

그는 손을 뻗어 철망을 더듬었다. 차가운 쇠살 저편에서 민석의 숨이 들렸다. 여기에 없는 사람이 저 안에 들어 있는 듯했다.

“한결 씨.”

수아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

한결은 움찔했다. 손끝이 철망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아는지…….”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저 안에는 민석 씨가 있어요.”

민석이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엄마 장 다 봤다…… 어디 있니……?”

지우가 낮게 말했다.

“똑같아요. ‘다 봤다’ 다음에 숨이 반 박자 끊겨요. 세 번 다요.”

한결은 랙에서 손을 거두었다. 같은 말의 반복이 지금 바깥에서 어머니가 보낸 신호라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반대로 민석이 그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다.

“아무도 랙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거칠었다.

“수아 씨. 자재를 보러 갑시다.”

뒤따라 몸을 돌린 순간 눈가리개가 눈꺼풀을 긁었다. 마른 피가 묻은 가장자리가 살에 달라붙어 있었다. 눈이 따가웠지만 손을 대면 매듭이 헐거워질까 봐 참았다.

팔뚝의 상처도 다시 욱신거렸다. 손을 뻗었다가 거둘 때마다 굳은 피가 소매 안쪽을 당겼다.

배상철이 물었다.

“정말 만들 수 있습니까? 저도 이거 때문에 눈을 못 뜨겠어요.”

“만들어야 합니다.”

수아가 비품 창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눈을 감고도 갈아 맬 수 있는 곳부터요.”

창고 안은 종이와 비닐 냄새로 가득했다. 수아가 선반 아래에 쌓인 골판지 상자를 끌어냈고 지우가 벽에 기대 있던 두꺼운 롤을 받아 들었다. 검은 암막 비닐이 바닥에 펴지며 무거운 파도 소리를 냈다.

“여기 천장에는 비상등이 하나 있어요. 창은 없지만 불빛이 아예 없는 방은 아니에요.”

수아가 말했다.

한결이 문을 닫아 보자 문짝 아래로 가느다란 바람이 흘렀다. 그는 발끝으로 문턱을 짚고 수아에게 틈의 길이를 알려 주었다. 수아는 골판지를 길게 접어 문 안쪽에 덧댄 뒤 그 위로 비닐을 내려뜨렸다. 문이 열릴 때는 누구도 안쪽 부스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비상등에도 상자를 씌웠다. 수아가 전구 둘레의 뜨거운 부분과 거리를 둔 채 금속 테두리에 차광판을 고정했다. 한결은 전원을 끄는 스위치를 만지지 않았다. 다시 켜지는 순간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박두식이 쇠파이프로 바닥을 툭 쳤다.

“그럼 등만 덮고 그 아래에서 천을 갈면 되잖아. 언제까지 상자 놀이를 할 거냐?”

“출입문이 열리면 방재실 빛이 들어옵니다.”

수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등만 가리면 문 아래와 선반 틈은 남아요. 안쪽에 한 겹 더 만들어야 해요.”

한결은 골판지의 단면을 만져 보았다. 두꺼운 상자를 세워 네 벽과 지붕을 만들고 단열재를 그 바깥에 둘렀다. 반짝이는 은박 면은 골판지와 검은 막 사이에 묻었다. 어느 쪽에서 빛이 새더라도 노출된 반사면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수아가 테이프를 찢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났다. 박스 모서리를 붙이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비닐을 벽면 위로 겹쳐 올렸다. 암막 비닐 한 장을 더 감싼 뒤 출입구에는 서로 어긋나게 두 장을 늘어뜨렸다.

한결은 지붕을 살짝 밀어 보았다. 종이판 하나가 휘며 안쪽으로 내려앉았다. 수아가 선반에 있던 포장용 막대를 지붕 위에 가로질러 얹자 처진 부분이 팽팽해졌다. 머리가 닿아 막이 찢어질 여유까지 없애야 했다.

“한 번 밀고 들어간 뒤 안쪽 것을 열어요. 두 막이 동시에 벌어지면 안 됩니다.”

수아가 손바닥으로 통로를 짚어 보게 했다. 직선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라 몸을 한 번 꺾어야 하는 짧은 길이었다.

배상철이 빈 상자를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그의 손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

“이걸로 입구 앞에 턱을 만들면 어떻습니까? 발이 먼저 닿게요.”

“좋아요. 안에서 막을 밟지 않게 해 줄 거예요.”

수아의 대답에 배상철은 테이프를 찾아 상자를 고정했다.

한결은 벽과 바닥이 만나는 선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한 곳에서 찬 기류가 손등을 스쳤다. 작은 구멍이 있었다. 수아가 그 자리 위에 비닐 조각을 붙이고 다시 골판지로 눌렀다.

“한 번 더.”

한결이 말했다.

“손으로 전부 돌고 나서 사람을 넣읍시다.”

박두식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당신 귀가 이젠 빛까지 듣나?”

“틈으로 공기가 드나들면 빛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틈도 있을 텐데.”

“그래서 겹쳐 덮는 겁니다.”

박두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쇠파이프 끝으로 완성된 벽을 두어 번 건드렸다. 수아가 그 손목을 붙잡았다.

“흔들지 마세요. 검사 끝날 때까지요.”

한결이 첫 이용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수아는 창고 문을 닫고 출입을 맡았다. 지우는 안쪽 입구의 비닐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기로 했다. 배상철은 문 옆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서 있었다.

“안에서 눈가리개를 풀겠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은 지금 말해 주십시오.”

배상철이 먼저 동의했고 다른 생존자들도 낮은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박두식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수아가 동의한 사람이 과반이라고 알린 뒤에야 한결은 입구로 발을 옮겼다.

한결은 바닥의 골판지 턱을 발끝으로 확인하고 첫 장막을 밀었다. 천천히 몸을 옆으로 틀어 안쪽 장막도 통과했다. 뒤에서 비닐이 제자리로 떨어졌다.

사방에서 두꺼운 종이 냄새가 났다. 바깥의 숨소리가 얇게 들렸다.

“들어왔습니다.”

“두 막 다 닫혔어요.”

수아가 대답했다.

한결은 눈을 감고 매듭에 손을 올렸다. 묶인 천을 조금 느슨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바닥에서 비닐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멈춰요!”

지우의 외침이 입구 밖에서 튀어 올랐다.

한결은 손을 멈췄다. 발뒤꿈치 아래로 바닥막의 끝이 말려 올라오는 감촉이 전해졌다. 비닐을 고정하던 테이프가 떨어진 것이었다. 뒤꿈치를 움직일수록 골판지 벽 밑에서 찬 공기가 밀려왔다.

“눈 감고 계세요. 매듭 다시 조이세요.”

수아의 말에 한결은 천을 다시 당겼다. 눈가가 쓰렸지만 매듭을 묶고 손등으로 덮인 자리를 확인했다.

“됐습니다.”

그가 두 장막을 차례로 빠져나오자 수아가 바닥을 살폈다. 배상철이 붙인 입구 턱 옆으로 발을 디딜 자리가 좁았다. 한결의 뒤꿈치가 그 틈의 비닐을 밟아 당긴 것이다.

“내가 턱을 잘못 놨군요.”

배상철의 목소리가 꺼졌다.

“그 자리를 밟게 만든 건 우리 전부입니다.”

수아가 새 골판지를 가져왔다.

“통로를 더 넓히고 바닥막 위에 발판을 얹어요. 비닐 끝은 발판 아래로 넣어야 해요.”

박두식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도 이렇게 벌어졌는데 누구 눈을 맡길 생각이지? 내 말대로 망보는 편이 낫겠군.”

한결이 그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우 씨가 막이 들리는 소리를 들었고 제가 발밑 틈을 느꼈습니다. 이 실패를 고치지 않고 사람을 넣었다면 위험했겠죠. 그래서 시험한 겁니다.”

수아는 바닥판을 덧대고 네 귀퉁이를 손으로 눌렀다. 배상철이 함께 비닐을 잡았다. 지우는 안쪽 장막이 바닥에 스치는 위치를 듣고 입구 폭을 다시 맞췄다.

“발판만 밟으세요. 첫 막이 닫혔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두 번째 막에 손대지 말고요.”

수아가 한결의 발을 새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배상철은 비품 창고 문을 맡고 지우는 두 막의 소리를 맡았다. 안쪽 사람의 눈이 가려진 동안에도 밖에서 손을 쓸 사람이 둘은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아무것도 끌리지 않았다.

한결은 안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수아가 창고 문을 닫았다는 말을 했다. 두 장막이 내려앉은 뒤 방재실의 유도등도 창고의 비상등도 한결의 눈꺼풀에 닿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벽 네 면과 지붕의 이음매를 한 번 더 눌렀다. 발판은 흔들리지 않았고 바닥으로 흐르는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매듭에 닿은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면 그 눈을 먼저 열어야 했다.

그는 매듭을 풀었다.

마른 천이 피부에서 떨어질 때 살이 당겼다. 한결은 손바닥으로 한동안 눈을 덮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력을 잃었던 시절의 어둠이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그때는 선택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어둠이었다.

“괜찮습니까?”

수아의 목소리가 장막 너머로 들렸다.

“빛은 없습니다.”

한결은 눈을 다시 감고 새 거즈를 눈 위에 댔다. 수아가 방재실 구급함에서 가져와 미리 안쪽 선반에 두고 간 깨끗한 거즈였다. 땀에 젖은 눈가를 물 묻힌 천으로 닦고 새 천을 단단히 묶었다.

“나갑니다.”

“매듭 확인하고 첫 막만 여세요.”

밖으로 나온 한결이 매듭을 수아에게 만져 보게 했다. 수아는 관자놀이와 콧등의 틈을 손끝으로 짚었다.

“됐어요.”

배상철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도 할 수 있는 거죠?”

“한 사람씩입니다. 오래 머물지 말고 밖에 두 사람이 지킵니다. 안에 들어간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천을 풀고 새 천을 묶어 확인받은 뒤에만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막이 흔들리면 멈추고요.”

“내 목부터 살펴야겠어.”

박두식이 쇠파이프를 세우며 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김 주임에게 졸린 목에는 여전히 쉰 숨이 걸렸다.

수아가 창고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지금은 배상철 씨 차례예요. 눈가리개 매듭이 풀려 있어요.”

“내가 이 방 책임자야.”

“여기서는 차례보다 상태를 먼저 봅니다. 팀장님 목은 밖에서 거즈로 감을 수 있어요.”

박두식은 대답 대신 쇠파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한결이 배상철의 등을 짚어 발판 앞에 세웠다. 한동안 쇠가 바닥을 긁는 소리만 났다. 끝내 박두식은 길을 막지 않았다.

한결은 낡은 눈가리개를 주먹 안에 구겼다. 민석의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러 갈 수는 없었다. 대신 배상철이 안전하게 들어갈 순서를 지켰다.

그때 천장 한쪽에서 아주 낮은 잡음이 났다.

치직.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끊어 둔 비상 통신 스피커가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매장 방송을 내보내던 천장 스피커 쪽이었다.

치지직.

지우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사람 목소리가 섞였어요.”

잡음이 한 번 더 일었다. 한결에게는 아직 말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의 손끝이 팔 위에서 굳어 가는 것은 분명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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