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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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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물류창고

벽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맑고 차분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수아의 목소리였다. 성대의 떨림도 어미의 억양도 바로 곁에 서 있는 수아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방재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굳어졌다.

수아가 자신의 입술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저…… 저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게 아니에요.”

박두식의 거친 숨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쇠파이프가 바닥을 짓이기듯 끌리는 쇳소리가 날카롭게 긁혔다.

“저놈이 방송선 뒤에 붙었어. 아니면 밖에 수아가 한 명 더 있는 거냐?”

“팀장님, 움직이지 마세요.”

한결이 낮게 제지했다. 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귀를 벽면 배선관 쪽에 바짝 밀착했다.

스피커 진동판에서 미세한 전기 노이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밖에서 직접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천장 구석을 지나는 케이블 트레이를 타고 희미한 긁힘이 전해졌다.

통신 랙 안에서 민석이 또다시 몸을 비틀었다. 철망이 흔들리며 마른 쇳소리가 울렸다.

“서영아…… 문을 열어 줘…….”

민석의 혀 짧은 발음 뒤로 스피커의 소리가 겹쳐 들렸다. 스피커는 방재실 안에서 오간 말들을 흡수해 밖으로 흘려보내거나 반대로 외부의 괴이를 안으로 밀어 넣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명부가 놈들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계속 내면 밖의 존재들이 벽을 뜯어낼 겁니다.”

한결이 수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수아 씨. 방재실 공구함이 어디 있습니까?”

“제어반 오른쪽 하단 서랍이에요. 스패너랑 니퍼가 들어 있어요.”

수아가 떨리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서랍 손잡이를 당겼다. 달그락거리는 금속 마찰음이 났다. 그녀가 건넨 니퍼는 묵직하고 기름 냄새가 뱄다.

한결은 손끝으로 스피커로 이어지는 굵은 피복 전선을 더듬었다. 선은 두 가닥이었다. 날을 물리고 악력을 주자 뚝 하는 둔탁한 감촉과 함께 단선되었다.

치이익 하던 노이즈가 거짓말처럼 끊겼다.

수아의 가짜 목소리도 사라졌다. 방재실 안에는 오직 민석의 거친 숨소리와 사람들의 억눌린 심장 박동만이 남았다.

“일단 스피커는 끊었습니다. 하지만 여긴 오래 못 버팁니다.”

지우가 한결의 옷자락을 쥐며 울먹였다.

“목이 너무 말라요. 침도 안 나와요…….”

구석에 모여 있던 다른 생존자들도 헐떡이는 숨을 내쉬었다. 사태가 터진 뒤 반나절 동안 누구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방재실 안은 환풍구가 막혀 산소가 줄어들고 있었고 땀과 피비린내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물이 필요합니다. 상처를 씻을 소독수도 모자라고 마실 물이 없으면 몇 시간도 못 버팁니다.”

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박두식이 코웃음을 쳤다.

“물? 매장으로 나가자고? 진열대마다 눈깔 뒤집힌 괴물들이 깔려 있어.”

“매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수아가 나지막하게 끼어들었다.

“방재실 뒤쪽에 직원 전용 하역 통로가 있어요. 거길 지나면 바로 1차 물류창고예요. 매장으로 나가지 않고도 파렛트에 쌓인 생수랑 통조림을 가져올 수 있어요.”

박두식이 침묵했다. 그 역시 타는 목마름을 견디기 힘든 눈치였다.

“창고 문은 잠겨 있나?”

“비상 레버 방식이라 안쪽에서 밀면 열려요. 대신 천장이 아주 높고 넓어요.”

“좋아. 다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짐승처럼 날뛰는 저 민석 놈은 랙 안에 잠가두고 움직일 수 있는 놈들만 간다.”

박두식의 말에 한결도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를 이끌고 갈 공간이 아니었다.

한결은 지우와 수아 그리고 박두식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나머지 생존자들에게는 방재실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빗장을 걸어두도록 지시했다.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도 한결이 정한 세 번의 두드림 신호가 아니면 문을 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철컥.

방재실 후면 방화문 빗장이 풀렸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일행의 얼굴을 때렸다. 매장의 끈적한 피비린내와는 다른 먼지와 골판지 상자 냄새가 훅 풍겼다.

한결은 문턱을 넘으며 귀를 기울였다.

직원 전용 하역 통로는 좁고 길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타일 바닥에서 나던 경쾌한 반사음이 사라지고 거칠게 마감된 에폭시 바닥의 묵직한 마찰음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여기서부터 물류창고 본 구역이에요.”

수아가 속삭였다.

한결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동안 한결은 좁은 매장 통로와 방재실의 벽면 반사음을 통해 공간의 윤곽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왔다. 벽이 어디 있고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소리의 튕김만으로 눈앞에 입체 지도를 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한결이 바닥을 가볍게 탁 디뎠다.

탁.

그 소리는 평소처럼 선명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허공으로 흩어진 소리는 한참 뒤에야 먼 곳에서 탁…… 탁…… 하고 세 갈래로 쪼개져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뭐지?’

한결의 발걸음이 굳었다.

소리가 벽에 부딪혀 즉각적인 형태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천장은 아득하게 높았고 좌우의 공간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게다가 사방에 세워진 거대한 철제 기둥들이 소리를 무수히 굴절시키고 있었다.

“한결 씨? 왜 멈춰요?”

수아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번졌다. 그녀의 음성이 귓전에서 맴돌지 않고 텅 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 뒤 여러 겹의 메아리로 왜곡되어 돌아왔다.

“공간이…… 너무 넓습니다.”

한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력을 잃었을 때도 이토록 막막한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좁은 방이나 복도에서는 소리가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암흑 속에서는 소리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감각이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한 무기였던 귀가 먹통이 된 것만 같았다.

“천장이 6미터가 넘어요.”

수아가 한결의 떨리는 팔을 붙잡아 철제 기둥에 닿게 해주었다. 차갑고 각진 빔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지게차가 다니는 중앙 통로예요. 양옆으로 4단짜리 파렛트 랙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어요. 철골 프레임 때문에 소리가 흩어지는 거예요.”

“철제 랙……”

한결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끝으로 차가운 강철 기둥을 더듬었다.

그때 박두식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 나갔다. 묵직한 전투화 밑창이 바닥을 쿵쿵 울렸다.

“망설일 시간 없어. 음료 파렛트는 보통 입구 오른쪽에 쌓아둔다. 저쪽에 상자 더미가 만져져.”

“팀장님, 발소리 죽이세요!”

한결이 다급하게 낮게 외쳤다.

“여기선 소리가 어디까지 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잔향 때문에 반경 수십 미터 밖에서도 들릴 수 있어요.”

박두식은 혀를 찼지만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네 사람은 손을 맞잡고 거대한 철제 랙의 측면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사방에서 공기가 맴돌며 웅웅거리는 저주파 소음이 났다. 지게차 충전 설비에서 새어 나오는 잔류 전류음인지 아니면 높은 천장 환기창을 스치는 바람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찾았어요!”

수아가 숨죽여 외쳤다.

그녀의 손이 비닐 랩으로 칭칭 감긴 거대한 사각 더미를 짚고 있었다. 500밀리리터 생수병 수백 개가 규격 파렛트 위에 빼곡하게 얹혀 있었다. 바로 옆 랙에는 박스 채 적재된 통조림들이 만져졌다.

박두식이 단도를 꺼내 랩을 거칠게 찢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며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창고 안에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조용히 뜯어요.”

한결이 주변을 경계하며 속삭였다.

페트병 뚜껑이 따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두식이 물병을 비워내듯 들이켰다. 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지우에게 생수병을 쥐여주었다.

지우는 두 손으로 병을 감싸 쥐고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결도 건네받은 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바짝 말라붙었던 혀와 식도가 살아나는 감각이 들었다. 그는 남은 물로 팔뚝의 붕대를 적셔 굳은 핏자국을 살짝 씻어냈다.

살았다 하는 안도감이 스치는 찰나였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금속 캔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튀는 소리였다.

네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다. 박두식의 손에서 생수병이 멈췄고 지우는 숨을 들이켠 채 굳어버렸다.

한결은 즉시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는 분명 창고 안쪽에서 났다.

‘전방 좌측. 15미터쯤 떨어진 랙 모퉁이다.’

한결이 속삭였다.

“좌측 통로 쪽입니다. 뭔가가 바닥에 깡통을 떨어뜨렸어요. 벽 쪽으로 붙으세요.”

한결이 수아와 지우를 랙 안쪽 틈새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런데 지우가 한결의 손매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소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지우 씨?”

“아니에요, 아저씨. 바닥이 아니에요.”

지우의 떨리는 목소리가 한결의 귓전을 때렸다.

“소리가…… 위에서 났어요. 오른쪽 대각선 위요. 아주 높은 곳에서 쇠를 긁었어요.”

한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위라고?”

한결은 다시 소리의 잔향을 되짚었다.

분명 자신의 귀에는 좌측 콘크리트 바닥 쪽에서 울림이 크게 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소리가 높은 천장과 반대편 벽에 부딪혀 아래로 굴절된 반사음이었던 것일까?

물류창고의 철제 랙은 층고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입체 구조물이었다. 평면의 바닥만을 상정하고 소리를 해석했던 한결의 귀가 수직 공간의 직접음을 놓치고 엉뚱한 반사벽을 짚어낸 것이었다.

‘지우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지우는 반사된 둔탁한 저음보다 금속이 긁히는 찰나의 날카로운 고음을 본능적으로 잡아채고 있었다.

찌르르.

천장 철골 트러스 부근에서 먼지 알갱이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비닐 랩 위에 흙먼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우의 말이 맞았다.

소리는 바닥이 아니라 머리 위에서 나고 있었다.

박두식이 쇠파이프를 고쳐 쥐며 고개를 쳐들었다. 물론 눈가리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어떤 새끼가 저 위에 기어 올라가 있는 거야?”

“쉿. 소리 내지 마세요.”

한결이 박두식의 가슴을 눌렀다.

랙 상단 프레임에서 삐걱거리는 하중 이동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육체가 철제 선반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쇠판이 눌릴 때마다 끼익, 끼익 하는 불길한 마찰음이 천장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짐승의 기척이 아니었다.

두 다리와 두 팔로 랙 프레임을 짚으며 기어가는 인간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래가 끓어오르는 듯 젖어 있고 목구멍이 찢긴 듯한 쇳소리였다.

그 숨소리가 창고의 높은 층고를 타고 내려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특정할 수 없도록 공간 전체가 그 숨소리로 울렸다.

마침내 허공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서영아.”

스피커에서 들렸던 그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스피커의 쇳소리가 섞인 전자음이 아니었다. 진짜 사람의 목에서 터져 나온 처절하고 기괴한 육성이었다.

“서영아…… 물 가져왔어…… 어디 있니…….”

박두식의 숨이 턱 막혔다.

“저 목소리…….”

“아는 사람입니까?”

한결이 낮게 속삭였다.

“……물류 주임이다. 김 서방. 지난달에 딸 데리고 마트에 왔던 놈이야. 딸 이름이 서영이었다.”

변이자였다. 안개를 보았으나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는 대신 자식을 찾는 맹목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창고 랙 위를 기어 다니는 존재였다.

녀석은 딸을 부르며 6미터 높이의 철제 선반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서영아…… 대답해…… 아빠가 다 보여…… 불 켜졌잖아…….”

김 주임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녀석이 바로 일행의 머리 위 랙 선반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철판의 비명이 울렸다.

쿵.

머리 위 3단 선반에서 커다란 박스 하나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피해요!”

한결이 지우와 수아를 낚아채며 몸을 던졌다.

쿠콰쾅!

천장에서 떨어진 대형 골판지 박스가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혔다. 꽁치 통조림 수십 캔이 터져 나오며 사방으로 굴렀다.

챙그랑! 땡그랑! 챙!

수십 개의 쇠 캔이 딱딱한 바닥을 튀며 요란한 쇳소리를 뿜어냈다.

그 끔찍한 소음 폭탄이 물류창고 전체를 집어삼켰다. 사방의 콘크리트 벽과 철제 랙들이 소리를 수천 개로 쪼개며 메아리쳤다.

한결의 귓구멍이 찢어질 듯한 소음에 마비되었다. 이제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 흐, 흐흐…… 찾았다…… 서영이 목소리……!

6미터 허공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쏟아진 통조림 캔 사이로 사납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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