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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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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목소리 명부

통신 랙 안에서 민석이 철망을 긁었다.

쓱. 쓱.

그 소리가 멎을 때마다 방재실 안의 숨도 함께 멎었다. 누구도 랙 쪽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결은 찢어진 팔뚝을 눌렀다. 피는 줄었지만 손가락 사이가 끈적했다.

“그 상처부터 묶어.”

박두식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눈을 봐야 확인하지. 네가 이미 변한 건지 아무도 모르잖아.”

“눈을 보자는 말은 지금 여기서 하지 마세요.”

수아가 서류함을 여는 소리가 났다. 종이 뭉치와 플라스틱 약통이 부딪혔다.

“소독약 있어요. 붕대도요.”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박두식이 한결 쪽으로 다가왔다.

“상처로 안개가 들어갔을 수도 있어.”

“피가 나는 것과 안개를 본 것은 다른 일입니다.”

한결은 수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자 팔뚝 전체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신음을 삼켰다.

지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씨 숨이 빨라졌어요.”

“소독약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질문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오래 남았다. 수아가 붕대를 감는 손을 멈췄다.

한결은 바닥을 더듬어 연필 하나를 찾았다. 서류함 아래에 굴러 있던 것이었다.

“이름을 적읍시다.”

박두식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 출석부?”

“출석부가 아니라 기준입니다.”

한결은 종이 위에 연필을 세웠다.

“이름과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대답할 때 숨이 몇 번 끊기는지 적고 발소리도 기억합니다. 눈을 확인할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구분해야 합니다.”

“목소리도 흉내 낸다.”

철망 안쪽에서 민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준입니다.”

지우가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한 가지 소리만 기록하지 않습니다. 목소리와 숨과 발소리를 함께 기록합니다.”

수아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줄을 나누며 이름을 적을 자리를 만들었다.

“제가 기록할게요.”

“첫 번째는 저부터 하겠습니다.”

한결은 랙에서 멀어졌다. 팔의 상처가 맥박처럼 욱신거렸다.

“강한결. 방재실 안쪽 제어반 앞.”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붕대 찢어지는 소리.”

“세 번 숨 쉬고 대답하세요.”

한결은 숨을 세 번 고른 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아는 응답 사이의 간격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숨 세 번. 목소리 떨림은 조금 있어요.”

“소독약 때문입니다.”

“발은 왼쪽으로 조금 끌려요. 다친 팔을 들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지우가 말했다.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변화까지 모두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수아도 이름과 위치를 말했다. 이어 발뒤꿈치로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첫 번째는 가볍고 두 번째가 길어요.”

지우가 소리를 듣고 말했다.

“오른쪽 발에 힘이 더 실려요.”

“다음에 같은 소리가 나면 수아 씨로 확인합니다.”

박두식이 코웃음을 쳤다.

“그걸 믿으라고?”

“믿는 게 아니라 비교하는 겁니다.”

한결은 종이의 다음 줄을 손톱으로 눌렀다.

“팀장님 차례입니다.”

“난 됐어.”

“모두가 기록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명령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먼저 기록해야 합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랙 안에서 민석이 숨을 길게 뱉었다. 사람의 숨처럼 들렸지만 끝에 젖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박두식이 쇠파이프를 바닥에 세웠다.

“박두식. 방재실 문 옆.”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민석이 웃는 소리.”

“세 번 숨 쉬고 다시 대답하세요.”

박두식이 숨을 고르는 순간 바깥 셔터가 울렸다.

쿠웅!

방재실 벽이 흔들렸다. 박두식의 세 번째 숨이 끊겼다.

한결이 손바닥을 들었다.

“지금 대답하지 마세요. 밖의 것이 우리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셔터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왔다.

“박두식.”

김도현의 목소리였다. 아니면 민석이 흉내 낸 목소리였다.

지우의 차례가 되었다. 지우는 이름과 위치를 말했다. 세 번 숨을 쉬는 동안 두 번째 숨에 기침이 섞였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밖에서 팀장님 이름을 부른 소리.”

“세 번 숨 쉬고 대답해.”

지우는 세 번째 숨 뒤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박두식이 즉시 일어섰다.

“늦었어.”

“기침 때문에 멈춘 겁니다.”

“기침은 핑계야.”

그가 지우 쪽으로 다가가자 한결이 발을 내디뎠다. 팔 상처가 당겼다.

“멈추세요.”

“비켜.”

“손대면 명부는 끝납니다.”

“명부가 사람보다 중요해?”

“사람을 묶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수아가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깐. 지우 씨의 숨이 이상해요.”

방재실 바닥은 차가웠다. 그러나 제어반 아래쪽에 깔린 전선 몰딩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기가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결은 그 진동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사람들의 위치를 다시 세었다. 수아는 종이 옆에 무릎을 꿇었고 지우는 랙에서 두 걸음 떨어져 있었다. 박두식은 문과 지우 사이에 서 있었다.

눈을 뜨지 않아도 공간은 선명했다. 다만 그 선명함은 빛이 아니라 서로의 숨이 만드는 빈자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사람의 숨이 사라지면 방 안의 모양도 함께 무너질 터였다.

“저 기침해서 그런 거예요.”

“기침 뒤에는 숨이 두 번 이어져야 하는데 한 번만 이어졌어요.”

수아가 손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이쪽에서 바람이 와요.”

“환풍은 다 껐잖아.”

“모터는 껐어요. 덕트 안에 남은 공기가 빠지는 것 같아요.”

한결은 지우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은 빨랐지만 일정했다. 그는 지우의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는 진동을 확인했다. 떨림은 있었으나 발이 스스로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지우 씨는 아직 변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박두식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랙 안에서 두 번의 긁는 소리가 났다.

쓱. 쓱.

지우의 호흡이 그 간격으로 끊겼다. 지우가 일부러 숨을 참은 것인지 랙의 리듬을 따라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우 씨. 제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 앞에…….”

지우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왼쪽인가요?”

“아니요. 오른쪽…….”

말이 바뀌었다. 방 안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박두식이 지우의 팔을 잡았다.

“이제 묶어.”

“놓으세요!”

지우가 몸을 비틀었다. 한결이 손을 뻗기 전에 랙 안에서 민석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최지우. 통신 랙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

그 문장은 지우가 방금 말한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민석은 그 질문을 들을 수 없었다. 한결은 입을 다물게 했고 누구도 지우의 위치를 다시 말하지 않았다.

“저 아니에요.”

지우가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말한 게 아니에요.”

한결은 랙을 보지 않은 채 철망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탕. 탕.

민석이 같은 간격으로 철망을 두드렸다.

탕. 탕.

수아가 숨을 죽였다.

“저 안에 있는 건 명부를 듣고 있어요.”

방재실 외벽의 비상 통신 스피커에서 잡음이 흘렀다.

지직.

누군가 아주 가까이서 숨을 쉬었다. 세 번 짧게 들이마시고 한 번 길게 내쉬는 호흡이었다. 보안팀 호출음과 같은 리듬이었다.

그리고 명부에 적지 않은 이름이 낮게 울렸다.

“서영…….”

방 안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통신 랙 안의 민석이 똑같이 따라 했다.

“서영.”

박두식이 철망 쪽으로 한 발 다가갔다.

“문을 열어.”

“안 됩니다.”

한결이 가로막았다.

스피커 너머에서 그 이름을 부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수아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어 주세요.”

한결은 명부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방재실 안에서 너무 크게 울렸다.

명부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록이었다. 동시에 어둠 속 누군가에게 사람을 찾는 좌표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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