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룡의 겨울 신부

2화: 계절 계약
단이의 이름이 조개판에 새겨진 걸 본 뒤, 소하는 판을 집어 들지 않았다. 얇은 껍질 안쪽에 물이 맺혀 있었다. 이름 글씨는 마을 장부와 같은 먹으로 쓰여 있었지만, 글자는 조개 표면을 파낸 흔적이 있었다.
“누가 새겼죠?”
라온은 조개판을 살폈다. “봉인을 만든 자들은 인간의 이름을 기록했다. 내가 이 문양을 마지막으로 본 건 오래전이다.”
“그럼 단이의 이름은 누가 새겼을까요?”
“모른다. 그 아이가 오기 전에 이미 쓰였을 수도 있다.”
“그런 대답으로는 부족해요.”
“나도 답을 원한다.”
소하는 조개판을 천에 싸서 바구니에 넣었다. 라온은 그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 둘은 제단을 더 살피기로 했다. 소하는 마을로 돌아가 장로에게 단이의 자원 기록이 보관됐는지 확인하고, 라온은 바다 아래 통로를 살펴보기로 했다. 계약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첫 조건이었다.
얼음 위를 돌아오는 길에 소하는 작은 얼음 조각을 채집했다. 푸른 얼음의 내부에는 소금 결정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얼음이 자랄 때마다 물속 염분이 해안 샘으로 밀려난 듯했다. 그녀는 조각을 천에 싸서 약초방의 냉장 항아리에 넣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하가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 장로는 제물이 해룡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관습을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소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동생의 자원 기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다.
단이는 약초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작은 조개 조각을 쥐고 있었다. “바위굴에서 나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어젯밤 제단 아래에 떨어져 있었어. 장로가 치우려고 했는데 제가 가져왔어요.”
단이는 조개 조각 뒷면을 보여 줬다. 문양은 큰 판과 맞물리는 모양이었다. 소하는 조각을 가져가기 전에 동생에게 돌려줄지 물었다. 단이는 조사에 쓰되 자기가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소하는 약속했다.
약초방에서는 얼음 샘물의 염분을 확인했다. 평소보다 낮았고, 산초 달인 물은 쓴맛이 덜했다. 주민들이 목이 마르다고 느끼는 것도 물속 미네랄이 줄어서일 수 있었다. 소하는 물을 끓이고 잔여물을 천에 걸렀다. 바닥에 남은 흰 가루는 소금이 아니라 잘게 부서진 조개껍질이었다.
“샘물 안에 바다 조개가 섞여요?” 단이가 물었다.
“지하수 길이 바다와 연결된 것 같아. 푸른 얼음이 해안뿐 아니라 샘에도 영향을 줘.”
“그럼 제물 의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겠네요.”
“그걸 장로에게 설명하려면 증거가 필요해.”
소하는 얼음과 샘물 표본을 따로 봉인했다. 단이는 마을 기록관에 들어가 제물 명단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소하는 위험하다고 막으려다 멈췄다. 동생이 자원했다고 기록해 달라고 한 일을 잊지 않았다.
“혼자 가지 마. 네가 원하면 내가 같이 갈게.”
단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아는 아이들과 함께 갈 거예요. 언니는 라온에게 돌아가요.”
소하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조개판을 들고 해안으로 향했다. 라온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물살을 보고 있었다. 옷자락에는 물이 묻지 않았지만, 머리카락 끝에는 작은 물방울이 매달렸다.
“마을 사람은 무사해?”
“샘물이 변했어요. 이대로 얼음이 늘면 겨울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봉인을 풀어야 한다.”
“봉인을 풀면 뭐가 달라지죠?”
“해류가 돌아오고 얼음은 약해진다. 하지만 지하수 길이 다시 열리면 샘물이 바닷물에 잠길 수 있다.”
소하는 그 말을 들으며 새 조건을 추가했다. 봉인을 풀기 전에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지 확인하고, 샘물을 대체할 수원을 마련해야 했다. 라온은 바다 아래 수로의 입구를 알고 있었지만,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장담하지 않았다.
“그럼 계약 기간은 첫 얼음이 녹을 때까지로 하죠. 그때까지 조사와 대안을 함께 찾습니다.”
라온은 처음에 계약을 맺을 때보다 오래 생각했다. “네가 바다 아래로 내려오면, 내가 지켜 줄 수 없는 순간이 생긴다.”
“그 순간을 알고도 선택할게요.”
“나는 네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을 숨기지도 않겠다.”
그들은 두 번째 조건을 정했다. 상대가 모르는 위험을 발견하면 바로 알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은 각자 내린다. 소하는 자신의 손바닥에 약초사의 표시를 다시 그렸다. 라온은 얼음에 푸른 선을 그어 계약의 증표로 삼았다.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바위굴 입구를 조사했다. 소하는 굴 벽에 자란 해조류의 방향을 확인했다. 식물은 바다 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자랐다. 물이 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라온은 해류의 흐름을 설명했다. 바깥바다의 물이 봉인에 막혀 회전하면서 해안 아래로 스며들고 있었다.
“얼음이 벽을 만든 게 아니라, 물을 가두고 있어요.”
“맞다. 봉인의 가장자리가 수로를 눌렀다.”
그들은 바위굴 안쪽에서 오래된 밧줄을 발견했다. 밧줄에는 인간의 매듭이 있었다. 끝에는 작은 조개판이 묶여 있었다. 라온은 그것이 인간이 봉인 장치에 접근한 흔적이라 말했다. 누군가 예전에 바다 아래로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소하는 밧줄을 끊지 않고 길이와 매듭을 기록했다. “마을 사람들은 봉인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들의 말이 진실인지, 기록이 진실인지 확인해야 한다.”
“당신은 왜 그렇게 오래 바다 밑에 있었죠?”
라온은 대답을 미뤘다. “봉인을 지키기 위해서.”
“누가 부탁했나요?”
“내가 약속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소하는 더 묻지 않았다. 서로의 비밀을 강제로 열지 않는 것 또한 계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밤 마을에서는 장로 회의가 열렸다. 단이는 친구들과 함께 기록관에 들어가 제물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지난 12년 동안 바다로 보낸 아이들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서명은 모두 같은 손으로 적혀 있었다. 자원자의 흔적도, 가족 동의도 없었다.
단이는 그 명단의 사본을 가져왔다. 소하는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그중 몇 명은 아직 마을에 살아 있었다. 한 명은 북쪽 도시로 떠났고, 한 명은 장로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물로 사라졌다고 알려진 아이들이 실제로는 마을을 떠나 살아가고 있었다.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단이가 물었다.
“돌아오면 제물 의식이 거짓이었다는 걸 말해야 하니까. 아니면 누군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어.”
이튿날 아침 장로가 약초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소하가 해룡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로는 마을의 평온을 깨뜨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제물 의식은 바다를 달래는 전통이며, 아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마을은 겨울을 견뎌 왔다는 논리였다.
“샘물의 염분이 변하고 있어요. 얼음이 더 자라면 마을은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해룡의 말만 믿는군.”
“표본을 확인하면 됩니다.”
장로는 표본을 보지 않았다. 대신 단이가 가져온 제물 명단을 내놓으라고 했다. 소하는 거절했다. 장로의 눈길이 동생의 손으로 향했다.
“네가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면, 일을 키우지 마라.”
단이는 명단을 가슴에 품었다. “저는 제 이름을 제물로 쓰지 말라고 했어요. 제 선택은 제가 기록할 거예요.”
장로는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그날 저녁 바닷가에 새로운 얼음 금이 생겼다. 푸른 선은 마을 샘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라온은 소하에게 봉인이 한 번 더 흔들리면 지하수가 오염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당장 봉인을 풀면요?”
“해안의 물이 한꺼번에 움직여 마을 아래로 들이칠 수 있다.”
“그럼 기다리면요?”
“샘이 얼어붙는다.”
선택지는 둘 다 위험했다. 소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먼저 제물 명단의 아이들을 찾아 현재의 증언을 받아야 했다. 단이는 살아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장로의 집에서 일하는 여성은 오늘 밤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라온은 바닷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소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함께 갈지, 홀로 기다릴지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바위굴에서 작은 조개판이 다시 떨어졌다. 이번 판에는 단이의 이름과 함께 낯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하는 그 글자를 읽지 못했다. 라온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제물 이름이 아니다.”
“그럼 뭐죠?”
“봉인을 풀 사람의 이름이다.”
단이는 언니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녀는 조개판을 직접 들어 읽었다. 이름 옆에는 두 번째 표식이 있었다. 라온은 그 표식을 보고 처음으로 물러섰다.
소하는 약초방 문을 닫은 뒤, 표본을 날짜별로 나누어 작은 선반에 놓았다. 얼음 조각을 녹인 물, 샘물, 바위굴에서 묻힌 물을 같은 그릇에 담아 두었다. 아침이 되면 바닥에 남은 침전물을 비교할 수 있었다. 단이는 기록관에서 가져온 제물 명단과 자신의 자원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해에 두 번 이름이 적힌 아이도 있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도 있었다.
“이 명단이 전부라면,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도 있어야 해요.” 단이가 말했다.
소하는 마노의 증언에 동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공개 심리에서 이름을 어떻게 가릴지 먼저 정해야 했다. 그들은 한 사람씩 만나 허락을 받고, 증언을 공개할 때는 생존자의 이름을 숨기기로 했다. 단이는 자기 이름만은 그대로 두고 싶다고 말했다. 제물로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자원한 일을 스스로 기록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새벽이 지나자 라온은 바닷물 표본을 가져왔다. 소하가 약초를 우린 물과 비교하자, 샘물에는 바다에서 온 미세한 흰 가루가 더 많이 남았다. 라온은 그 결과를 보고 봉인이 해안을 향해 눌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바다 밑에서 물길을 열 수 있지만, 수로가 막힌 상태에서 힘을 쓰면 마을 쪽으로 물이 밀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하는 도면의 배수구를 확인해야 한다고 답했다.
“내가 먼저 수로로 내려가면?” 라온이 물었다.
“당신은 조류를 읽을 수 있지만, 마을의 배수 구조는 몰라요. 제가 위에서 흐름을 확인하고 신호할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가진 지식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가장 안전한 장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