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룡의 겨울 신부

3화: 제물 명단의 빈칸
라온은 조개판의 두 번째 표식을 본 뒤 바다 쪽으로 물러났다. 소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위험을 감지했거나, 자신이 모르는 뜻을 알아본 것이다.
“표식이 무엇을 뜻하죠?”
“봉인 해제의 대가를 정하는 표시다.”
“단이가 대가라는 뜻인가요?”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 말은 당신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이죠.”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표식을 처음 본다.”
소하는 조개판을 단이에게 건넸다. “네 이름이 있다고 네가 대가가 되는 건 아니야. 우리가 확인할 때까지 네가 결정할 수 있어.”
단이는 판을 두 손으로 받았다. “저는 이름을 지우고 싶지 않아요. 왜 쓰였는지 알고 싶어요.”
세 사람은 약초방으로 돌아와 표식을 베껴 적었다. 조개판의 홈은 손톱보다 얕고, 특정 방향에서 빛이 닿아야 보였다. 소하는 물과 소금을 조금 발라 문양을 선명하게 했다. 표식은 두 개의 파도 사이에 갈라진 길을 그린 모양이었다. 마을 노래에서 ‘바다를 돌려보낸다’고 부르는 구절과 닮았지만, 마지막 선이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단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자를 세었다. 어릴 때 제단에서 배운 노래였다. “여기서 손뼉을 치라고 했어요. 하지만 조개판은 박자를 반대로 표시해요.”
“누가 그렇게 가르쳤어?” 소하가 물었다.
“장로의 아내요. 제물 후보 아이들을 모아 매년 노래를 가르쳤어요.”
소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제물 의식은 장로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준비하는 절차였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가족에게는 돌아올 수 없다고 알렸다. 그 과정을 거쳐야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라온은 조개판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이건 물길을 닫는 표시가 아니다. 바깥쪽으로 흐르는 길을 찾는 표시다.”
소하는 샘물 표본의 침전물을 가져왔다. 조개껍질 조각과 염분이 다른 두 층이 있었다. “물길을 반대로 돌리면 샘물을 살릴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 다만 바다의 얼음이 깨지면 마을 앞의 물이 빠르게 움직일 거다.”
“그럼 방파제를 점검해야겠네요.”
라온은 바닷속 지형을 알지만, 해안 마을의 둑과 배수로는 몰랐다. 소하는 마을의 오래된 방파제 도면을 꺼냈다. 도면에는 막힌 수로가 표시돼 있었다. 수로를 열면 물이 마을 바깥의 갯벌로 흐를 수 있지만, 입구는 장로의 창고 아래에 있었다.
단이는 살아 있는 옛 제물들의 행방을 찾겠다고 했다. 먼저 장로 집에서 일하는 여성, 마노를 만나기로 했다. 마노는 12년 전 제물로 뽑혔다가 돌아온 아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병으로 돌아왔다고만 알고 있었다.
단이는 친구 둘과 함께 장로의 집으로 갔다. 소하는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라온은 바다에 남기로 했다. 그는 땅 위에서 인간의 시선을 받으면 경계가 커진다고 했다. 소하는 그가 선택한 거리를 존중했다.
장로의 집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노는 안채에서 장작을 나르고 있었다. 단이가 조개판을 보여 주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마노는 판의 표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걸 어디서 찾았니?”
“바위굴에서요.”
“제단 아래에서 본 적 있어. 그때는 제가 글을 몰라서 의미를 몰랐어.”
마노는 누군가 듣지 않는지 확인하고, 장작 더미 뒤로 단이를 불렀다. 소하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마노가 직접 말하기로 할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는 바다로 보내진 게 아니야. 밤에 배를 타고 북쪽 어촌으로 갔어. 장로의 동생이 배를 마련했지. 돌아오면 제물 의식이 거짓이라는 걸 말해야 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어.”
“왜 돌아오지 않았어요?” 단이가 물었다.
“돌아오면 가족도 쫓겨날 거라고 했어. 나는 살아남았지만, 집에 편지를 보낼 용기가 없었어.”
마노는 단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공개해도 된다고 했다. 다만 다른 아이들의 이름은 허락 없이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노가 자원해 증언했다는 기록을 작성했다. 마노는 손바닥에 흉터가 있었다. 배를 잡으려다 밧줄에 쓸린 상처였다.
소하는 그 증언을 장로에게 바로 가져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증인이 있다는 사실을 마을 회의에서 공개하려면, 그들을 보호할 장소와 돌아갈 방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마노가 원한다면 약초방에 머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노는 당장 떠나지 않고, 먼저 북쪽에 사는 다른 생존자에게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 편지는 제가 직접 전달할게요.” 단이가 말했다.
“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제 이름이 기록된 이유를 알아내려면 제가 움직여야 해요.”
소하는 동생에게 길과 동행인을 정할 시간을 줬다. 단이는 혼자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친구 둘과 마노의 조카가 함께 가기로 했다. 소하는 그들의 출발 시간과 연락 방법을 기록했다.
저녁 무렵 장로가 약초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마노가 과거 제물 후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이가 거짓말을 퍼뜨렸다며 조개판을 내놓으라고 했다. 소하는 조개판을 건네지 않았다.
“이 표식은 봉인을 여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해룡이 그렇게 말했나?”
“물길과 얼음 표본이 같은 방향을 보여 줍니다.”
“표본이 사람보다 정확하다고 믿느냐?”
“사람의 기록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로는 마노의 증언을 부정했다. 소하는 공개를 허락한 진술만 읽어 주었다. 마노의 이름과 날짜, 배가 떠난 방향, 손바닥의 밧줄 흉터. 장로는 증언을 들으며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단이의 이름이 조개판에 새겨진 것이 오히려 의식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 이름은 제물이 아니라 해방자의 이름일 수도 있어요.” 소하가 말했다.
“누가 그런 해석을 했지?”
“아직 아무도요. 그래서 조사를 계속해야 합니다.”
장로는 다른 주민들에게 소하와 라온의 계약을 끊으라고 요구했다. 마을 사람들은 침묵했다. 누군가는 소하가 돌아온 것을 반겼고, 누군가는 해룡과 손잡은 일을 두려워했다. 단이는 장로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자원자로 남겨 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그 기록을 보관할 사람도 정하겠습니다. 제 선택을 지우지 못하게요.”
장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약초방을 나가며 수로 도면을 가져가겠다고 경고했다. 도면은 소하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내주지 않았다.
밤이 깊자 소하는 해안으로 가 라온을 만났다. 그는 물속에서 돌아와 젖은 어깨를 털고 있었다. 소하는 마노의 증언과 조개판의 문양을 알려 줬다. 라온은 제물 의식이 봉인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간들이 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고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들은 네게 거짓말했어.”
“나도 바다 아래만 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막지 못했다.”
“그 책임을 모두 당신에게 돌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 약속은 해안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소하는 그의 말에 곧바로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어떤 약속을 할 건지 정해야 해요. 우리 둘이서가 아니라 마을도 함께요.”
라온은 바다 쪽을 바라봤다. “봉인을 풀면 해류가 돌아온다. 그러나 수로가 닫혀 있으면 물이 마을로 밀려올 수 있다.”
“수로는 열 수 있어요. 장로의 창고 밑에 있지만, 도면을 가지고 있어요.”
“그가 도면을 내놓을까?”
“아니요. 그래서 증언과 함께 공개해야 해요.”
라온은 처음으로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도 회의에 가겠다.”
다음 날 마을 회의는 소하의 약초방 앞에서 열렸다. 장로는 라온이 들어오자 칼을 든 경비를 불렀다. 라온은 공격하지 않았고, 바닷가와 마을 사이에 서서 기다렸다. 소하는 방파제 도면과 샘물 표본을 탁자 위에 놓았다. 단이는 마노의 허락을 받은 증언을 읽었다.
주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는 제물 의식이 거짓이었다고 분노했고, 누군가는 겨울을 견딘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소하는 해룡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수로를 막은 돌을 확인하고, 물길을 측정할 사람을 공개 모집했다.
세 명이 나섰다. 노련한 어부 하나, 샘을 관리하는 노파, 장로의 조카. 장로는 회의를 끝내려 했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단이는 조개판을 모두에게 보여 줬다. 자기 이름이 새겨진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바다 쪽에서 큰 파도 소리가 들렸다. 얼음 금이 해안까지 이어지며 방파제 돌 하나가 밀려났다. 라온은 몸을 돌렸지만,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소하와 주민들이 도면을 확인하는 것을 기다렸다.
방파제 밑에는 오래된 수로 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쪽에서 회색 천에 싸인 조개판이 발견됐다. 단이의 이름 옆에는 표식이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장로의 이름도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장로는 그 이름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표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다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회의 뒤 소하는 방파제에 남아 돌이 움직이는 간격을 재었다. 파도가 세 번 밀려올 때마다 오래된 수로 입구에서 물이 한 번 역류했다. 라온은 바다 아래에서 손을 들어 신호했고, 소하는 도면의 수로 선과 비교했다.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은 장로의 창고 밑을 지나 갯벌로 이어졌다. 막힌 곳은 입구가 아니라 창고 내부의 돌벽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막았을 수도 있어요.” 소하가 말했다.
라온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봉인을 만들 때 물길을 바꾸었다. 후대에 인간이 돌을 쌓았을 수 있다.”
“그럼 장로만의 일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선택이네요.”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이제 확인해야 한다.”
단이는 제물 명단의 사본을 공개 기록관에 보관하겠다고 했다. 장로가 빼앗더라도 원본만 없애면 기록이 사라지는 구조를 막기 위해서였다. 소하는 사본을 복수로 만들어 마노와 생존자들이 각각 보관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과 증언을 직접 읽고, 공개 범위를 정했다.
그날 밤 소하는 잠들기 전에 단이의 이름이 새겨진 조개판을 확인했다. 새 이름은 더 생기지 않았지만, 표식의 안쪽에 작은 균열이 퍼져 있었다. 라온은 봉인의 압력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파도 때 수로를 열지 못하면 얼음이 마을의 샘을 완전히 덮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