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없는 노조 회계사

3화: 총회에서 읽은 이름
총회가 시작되기 전, 회계실에는 조합원 스물여섯 명이 모였다. 대부분은 야간조를 마치고 온 사람들이었다. 정문식은 의자를 앞줄로 옮겨 앉았고, 박기태는 맨 끝에 서 있었다. 윤세라는 화면에 파업기금 거래 내역을 띄웠다. 현금 8백만 원 인출, 장부 계정 교육비, 지출 결의서 승인자 한 명.
“오늘은 확인된 사용처와 확인되지 않은 금액을 나눠 보고하겠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금액을 횡령으로 단정하지 않고, 사용처가 확인됐다는 이유로 승인 절차를 괜찮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문식이 말했다. “그럼 위원장 사퇴는요?”
세라는 기태를 보지 않았다. “그건 회계 보고와 별도로 조합원이 의결할 사안입니다.”
기태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숙소와 식당에서 확보한 장부를 설명했다. 파업 초기에 숙소비 3백20만 원, 식비 3백90만 원이 쓰였다. 현금 74만 원은 남아 있었고, 그 돈을 조합 계좌로 돌려놨다. 나머지 16만 원은 교통비나 현장 지원으로 지급됐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수령 서명이 없었다.
“그 돈을 누가 받았습니까?” 문식이 물었다.
“작업조 두 곳에 나눠 줬습니다.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믿어요?”
기태는 변명하지 않았다. “믿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증빙이 없다는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세라는 계정명이 교육비로 잘못 적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태가 지출을 숨기려 한 건지, 급히 처리하면서 편의상 넣은 건지는 확인할 자료가 없었다. 현금은 개인 계좌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승인 절차 위반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조합원이 손을 들었다. “파업 때 도시락 받은 사람은 저예요. 야간조 몇 명이 같이 먹었어요. 기태 씨가 계산했는데 영수증은 못 받았습니다.”
다른 조합원도 숙소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저는 가족이 같이 있었어요. 이름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회사에 알려질까 봐 그랬어요.”
문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합원 아닌 가족도 기금으로 지원한 겁니까?”
“파업 중 조합원이 일터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태가 답했다. “가족이 함께 있는 사람을 따로 쫓아낼 수 없었어요.”
세라는 그 지출이 규정에 맞는지 운영위원회에 별도로 검토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말이 겹쳤다. 어떤 사람은 가족 숙박은 기금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파업을 버틴 생활을 지원해야 했다고 했다. 세라는 어느 쪽도 대신 결론 내리지 않았다.
경자가 뒤쪽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급여명세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도 파업 때 첫날 숙소를 지원받았습니다. 나머지 날은 식당에서 일하고 방값을 갚았습니다. 딸이 회계 담당이라서 받은 건 아닙니다.”
세라는 눈을 들었다. 경자는 딸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조합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저는 비정규직이고,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습니다. 야간수당도 6개월 누락됐습니다. 이건 파업기금과 별개로 상담을 접수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받은 숙소 지원을 밝히러 왔습니다.”
문식이 물었다. “특혜가 아니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같은 방을 쓴 사람과 숙소 장부가 있어요. 제 이름은 확인 절차에 제출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급여 청구를 딸이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경자는 급여명세서를 세라에게 주지 않고, 별도 노무상담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세라는 어머니의 이름이 화면에 올라가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조합원의 동의 범위를 지켜야 했다. 경자가 직접 말한 사실만 총회 기록에 남겼다.
문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기금 지원을 받았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돈을 누가 승인했는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위원장님이 혼자 결정했어요.”
기태는 “맞습니다”라고 답했다.
“지부장직을 내려놓으세요.”
“그건 조합원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저는 투표에 따르겠습니다.”
세라는 의결 안건을 두 개로 나눴다. 첫째, 파업기금 지출에 대한 감사 결과를 승인할지. 둘째, 기태의 지부장직을 유지할지. 지출 보고를 승인한다고 해서 기태가 사퇴 면책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퇴를 요구한다고 해서 실제 지원받은 조합원이 돈을 돌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안건에서는 과반수가 회계 보고를 승인했다. 증빙이 없는 16만 원은 별도 확인 대상으로 남았다. 두 번째 안건에서는 기태의 사퇴 요구가 부결됐다. 대신 다음 총회까지 지출 결의 권한을 운영위원회에 맡기고, 월별 장부를 공개하는 조건이 붙었다. 기태는 의결 결과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지부장으로 남지만, 단독으로 현금을 쓰지 않겠습니다. 남은 16만 원을 끝까지 확인하고, 못 찾으면 개인 돈으로 메우겠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또 회계를 흐리는 일이니까요. 대신 조합 규정에 따라 책임을 받겠습니다.”
문식은 그 말을 듣고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믿을지 여부는 다음 장부를 봐야죠.”
“맞아요.” 기태가 말했다. “한 번 공개했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총회가 끝난 뒤 세라는 장부를 잠그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원하면 사무실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거래 내역을 정리해 두었다. 개인 이름과 계좌번호는 가렸지만, 지출 날짜와 목적, 승인자를 남겼다. 그녀는 회계실 밖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를 찾았다.
경자는 급여 상담을 마치고 있었다. “내 수당은 다음 주에 확인할 수 있대. 다른 야간조 두 명도 같이 자료를 내기로 했어.”
“잘됐네.”
“네가 대신 해 주지 않아도 돼.”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직접 말한 게 중요해.”
“네가 회계 보고할 때 내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고마워. 하지만 내가 총회에서 말하기로 한 건 내가 정할게.”
세라는 어머니와 함께 공장 정문까지 걸었다. 평소라면 둘은 각자 다른 버스를 탔지만, 오늘은 같은 노선을 기다렸다. 경자는 투명 파일에서 급여명세서를 꺼내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도 수당이 안 들어오면, 내가 직접 노동청 상담을 신청할 거야.”
“필요하면 상담 동행할 사람을 연결할게.”
“내가 부탁하면.”
세라는 “알겠어”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조합 회계 담당의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기태는 다음 날 조합원들에게 공개 장부 양식을 보냈다. 현금 지출에는 목적과 수령 확인, 승인자 두 명을 적도록 바뀌었다. 문식은 그 양식이 충분하지 않다며 감사위원을 별도로 두자고 제안했다. 운영위원회는 그 안건을 다음 총회에 올리기로 했다.
세라는 16만 원의 사용처를 계속 확인했다. 숙소 관리인이 돌려준 영수증 봉투에서 주차비와 이동비 기록이 나왔지만, 날짜 하나가 맞지 않았다. 그날은 조합원 한 명이 병원으로 옮겨진 날이었다. 누구의 이동에 쓴 돈인지, 지원이 승인된 것인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문식은 회계실에서 세라에게 말했다. “오늘 네가 숫자를 나눠 놓은 건 좋았어. 그래도 기태 씨를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건 다음 장부를 보고 판단하세요.”
“너는 믿어?”
세라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기태 위원장이 사람을 챙긴 건 알아요. 동시에 규정을 어겼어요. 둘 다 사실이에요.”
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답은 회계사답네.”
“회계사라서가 아니라, 아직 결론이 없어서요.”
총회가 끝난 뒤, 포장라인 조합원 윤미자가 회계실 문 앞에 머물렀다. 그는 파업 마지막 날 손목을 다쳐 병원에 갔다고 했다. “그때 택시를 타고 갔는데, 기태 씨가 차비를 줬어요. 영수증은 병원에서 뽑은 것만 있고, 택시 영수증은 없어요.”
“금액이 얼마였습니까?” 세라가 물었다.
“정확히는 몰라요. 2만 원쯤.”
“수첩에는 16만 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안에 포함됐다는 뜻인가요?”
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죠. 기태 씨가 다른 사람도 태워 줬을 수 있어요.”
그녀는 총회에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병원에 간 사실이 알려지면 산재 처리 여부를 회사가 다시 물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세라는 지원 사실만 적고 병명이나 근무 세부는 회계 자료에 넣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미자는 다음 총회 전에 정식 진술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16만 원의 사용처를 확인해 주지 못했지만, 그날 누군가가 다쳐 이동했다는 사실을 하나 더 남겼다.
그날 저녁 세라는 어머니와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버스 창밖으로 공장 교대등이 하나씩 켜졌다. 어머니는 내일도 야간 근무를 나가야 했다. 세라는 자신의 도시락 가방을 열어 빵을 꺼냈다.
“이거 먹을래?”
“너 먹어.”
“두 개 샀어.”
경자는 빵 하나를 받아 들었다. 둘은 조합 회계나 수당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세라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대신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대신, 부탁을 받으면 옆에 있겠다고 했다.
다음 총회 안건에는 회계감사위원 선출과 비정규직 조합원의 수당 상담이 함께 올라갔다. 장부는 공개됐지만, 조합원들 사이의 신뢰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세라는 회계실 마지막 불을 끄기 전에 16만 원 옆의 빈칸을 다시 봤다. 그 빈칸을 채우려면 영수증뿐 아니라, 그날 병원으로 간 사람이 자기 입으로 말해야 했다. 세라는 그 이름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기다릴 때도 있었다. 그날에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