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없는 노조 회계사

1화: 빠져나간 여덟백만 원
윤세라는 장부의 숫자를 세 번 확인했다. 파업기금 통장에는 2천4백만 원이 있었고, 월요일 오전 8백만 원이 현금으로 빠져나갔다. 회계 장부에는 ‘상급단체 교육비’라고 적혀 있었다. 교육은 지난달에 이미 끝났다. 영수증 칸은 비어 있었고, 지출 결의서에는 박기태 지부장의 서명만 있었다.
“기태 위원장님, 이 금액 어디에 썼어요?” 세라가 회계실 문을 열며 물었다.
기태는 공장 휴게실에서 조합원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전화를 벗어 문 옆에 두고, 종이컵 커피를 마셨다. “파업 때 숙소랑 밥값. 급하게 썼지.”
“장부에는 교육비라고 돼 있어요.”
“그때는 영수증을 다 모을 시간이 없었어.”
“8백만 원을 현금으로 찾아 썼는데, 수령자 이름도 없어요.”
기태는 세라의 손에 든 장부를 보았다. “사람들 굶기기 전에 현장으로 갔어. 나중에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조합원 의결 없이요?”
“긴급 지출은 지부장이 처리할 수 있어.”
“규정에는 100만 원 이상은 운영위원회 승인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어요.”
기태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 규정이 현장에 맞았으면 좋겠네. 파업 때는 회의 열 시간이 없었어.”
세라는 회계 장부를 덮지 않았다. 그녀는 기태가 동료들 식사를 챙기고 숙소를 구한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돈의 사용처가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갔는지 확인할 책임도 자신에게 있었다. “그럼 교육비를 숙소비로 바꿔 적으면 안 돼요. 지출 내역과 승인 여부를 따로 정리해야 해요.”
“회계가 사람보다 중요하다는 거야?”
“사람을 지키려고 모은 돈이면 누가 썼는지 공개해야죠.”
기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좋아. 내가 숙소 주소와 식당 이름을 알려 줄게. 영수증은 못 받은 것도 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합원 정문식이 회계실로 들어왔다. 그는 야간조 프레스 작업자였고, 지난 파업에서 가족과 함께 조합 숙소를 이용했다. “기금에서 돈이 빠졌다는 소문이 돌던데, 장부를 보여 주세요.”
세라는 조합원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래 내역은 공개할 수 있지만, 개인 계좌와 가족 정보는 가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식은 “그럼 숫자는 공개하고 이름은 가리는 거냐”고 따졌다. “누가 돈을 가져갔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썼어. 현금으로 숙소비와 식비를 냈고, 영수증이 없는 것도 있어.”
“그럼 영수증 없는 돈은 어쩌려고요?”
“받은 사람을 찾아 확인해야지.”
문식은 세라를 보았다. “위원장님이 다 했다고 하는데 믿으라는 거예요?”
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확인 전에는 믿으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사용처와 승인 절차를 나눠 보겠습니다.”
문식은 회계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난 파업 때 내 월급도 못 받았어요. 그 돈이 어디 갔는지 조합원이 알아야 해요.”
세라는 거래 내역을 인쇄해 조합 게시판에 붙였다. 8백만 원 인출 일자와 장부 계정명, 서명자만 공개하고 계좌번호는 일부 가렸다. 문식은 인쇄물을 한참 읽었다. “기태 위원장님, 이건 아직 설명이 아니에요.”
“알아.”
“그래도 조합원 총회 전에 지출 내역을 다 가져오세요.”
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총회에 나가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먼저 숙소와 식당을 찾아 실제 사용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세라는 영수증이 없는 돈을 기태가 혼자 처리했다는 사실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었다. 기태는 정직하게 말해도 지부장직을 잃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 세라의 어머니 윤경자가 공장 정문에서 딸을 기다렸다. 그녀는 포장라인 야간조 비정규직이었다. 손목 보호대를 찬 채 급여명세서를 투명 파일에 넣고 다녔다. “오늘 급여가 들어왔는데, 야간수당이 또 빠졌더라.”
세라는 서류를 받아 보고 싶었지만 멈췄다. 노조 회계 담당인 자신이 어머니의 임금 청구를 처리하면 특혜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노조 상담을 신청해. 내가 담당하지 않을게.”
경자는 딸을 바라봤다. “네가 회계 담당이니까 내가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가면 내 이름이 먼저 돌아.”
“그럼 더더욱 내가 직접 받으면 안 돼. 상담은 별도로 연결할게.”
“그렇게 멀리해야 공정한 거니?”
세라는 급여명세서를 돌려줬다. “내가 엄마 편을 들면, 다른 조합원이 내가 자료를 숨겼다고 할 거야.”
경자는 서류를 파일에 넣었다. “네가 나를 도우면 특혜고, 안 도우면 무관심이네.”
그 말에 세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혼자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세라는 따라가지 않았다. 회계실에서 돈을 확인해야 했고, 어머니의 수당 문제는 다른 상담자에게 연결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경자가 말한 불공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세라는 파업 때 지급된 식비 영수증을 찾으러 식당으로 갔다. 주인은 기태를 기억했다. 그는 새벽마다 도시락을 주문했고, 조합원들이 밀려들면 식판을 더 내줬다고 했다. “현금으로 낸 날도 있어요. 영수증은 카드 결제분만 남아 있네요.”
세라는 카드 영수증을 복사하고, 현금 지급 날짜를 주인의 장부와 맞췄다. 8백만 원 중 3백만 원은 숙소비, 2백10만 원은 식사비로 확인됐다. 나머지 돈은 교통비와 현장 수당으로 나갔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받는 사람 서명은 없었다.
숙소 관리인은 기태가 방 열쇠를 여러 개 가져갔다고 기억했다. “그때 조합원들이 가족까지 데리고 와서 묵었어요. 침대가 모자라 바닥에 매트를 깔았죠.”
세라는 방 번호와 날짜를 확인했다. 숙박 명단 중에는 어머니 이름도 있었다. 경자는 딸에게 숙소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세라는 명단을 사진으로 찍지 않고, 관리인에게 기록을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 개인 정보가 있는 명단은 조합에 그대로 제출할 수 없었다.
밤 열 시가 넘어 세라는 경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파업 때 조합 숙소에 있었어?”
경자는 한참 뒤 말했다. “그때 집에 가면 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 사람은 파업에 반대했으니까.”
세라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혼자 숙소에 머문 줄은 몰랐다. “숙소비를 기금에서 냈어?”
“기태 씨가 첫날은 냈어. 나머지는 내가 식당에서 일하고 갚았어.”
“왜 말 안 했어?”
“그 돈이 누구 돈인지 몰랐으니까. 나 같은 비정규직이 쓰면 또 특혜라고 할까 봐.”
세라는 어머니의 이름이 수령자 명단에 없고 숙소 기록에만 남았다는 걸 알았다. 기태는 그녀를 도우면서도 조합원 총회에 알리지 않았고, 경자는 그 도움을 빚처럼 갚았다.
“엄마가 받았던 건 정확히 얼마야?” 세라가 물었다.
“기억 안 나. 방값은 기태 씨가 냈고, 밥은 내가 식당에서 설거지하면서 갚았어.”
“숙소비를 기금에서 냈다면 수령 확인이 있어야 해.”
“내가 확인서에 이름 쓰면 내가 특혜 받은 사람처럼 보일 거야.”
“그렇다고 숨기면 나중에 더 의심받아.”
경자는 파일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네가 회계 맡기 전에는 내가 그냥 야간조 노동자였어. 이제는 네 엄마라는 사실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겠지.”
세라는 자신이 걱정하는 건 회계 규정이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건 수당과 숙소비만이 아니었다. 딸의 이름이 장부에 올라간 뒤 동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였다. “내가 조사하지 않을게. 다른 조합원이 확인하고, 엄마도 다른 사람과 같은 양식으로 제출해.”
“그럼 너는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어?”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준을 같이 정해야 해.”
경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지만 파일을 치우지 않았다. 세라는 그날 어머니의 이름을 회계 장부에 적지 않았다. 먼저 그녀가 직접 말하고 싶은 범위를 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세라는 숙소비 일부를 지출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 얼마가 갔는지는 다시 조사해야 했다.
다음 날 조합 회계실에서 기태는 현금 지급 내역을 적은 수첩을 가져왔다. 일부 이름은 별명으로 적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회사에 들킬까 봐 본명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문식은 수첩을 보고 화를 냈다. “조합원 돈을 별명으로 줬다고요?”
기태는 수첩을 덮었다. “그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갔어.”
“그걸 누가 확인합니까?” 세라가 물었다.
기태는 답하지 않았다. 수첩에 적힌 마지막 항목은 ‘야간 포장조, 2명, 46만 원’이었다. 경자의 근무조였다. 세라는 그 줄을 바로 읽지 않았다. 누가 돈을 받았는지, 그녀가 어머니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자료를 어떻게 다룰지 결정해야 했다.
기태는 세라에게 수첩을 맡겼다. “총회에 가져가. 내가 설명할게.”
문식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으로 끝낼 일 아닙니다. 규정을 바꿔야 해요.”
세라는 수첩을 봉투에 넣었다. “오늘은 사용처가 확인된 금액과 확인되지 않은 금액을 나눌게요. 엄마 이름도 다른 사람과 같은 기준으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날 밤 경자는 다시 세라에게 연락했다. “내 수당 상담, 내 이름으로 접수할게. 네가 대신하지 마.”
세라는 동료 상담자를 연결했다. 경자는 급여명세서와 출퇴근 기록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은 숙소 지원도 조합원 앞에서 말할 생각이었다. 세라는 두 문제가 같은 돈에서 만난다는 걸 알았다. 파업기금이 어디로 갔는지 밝히는 일은 어머니를 숨기거나 특별히 감싸는 일이 아니었다.
조합원 총회는 사흘 뒤였다. 그날까지 세라는 현금 지출의 마지막 3백만 원을 확인해야 했다. 수첩에는 사람 이름 대신 작업조와 금액이 적혀 있었고, 그중 하나가 어머니의 야간조와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