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역참

2화: 꺼진 봉화의 낮
복녀는 해준이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마당의 사람부터 세었다. 강을 건넌 사람이 열넷, 다리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홉이었다. 역졸은 셋이었지만 한 명은 쓰러진 말을 돌보고 있었다.
“일 끝내고 가려 하면 못 간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사람을 몰아오는 데부터 봐.”
복녀는 그렇게 말하며 빈 먹이통을 해준에게 내밀었다. 그는 통을 받아 물을 채웠다. 행렬의 아이가 손을 뻗었다. 아이는 통을 들지 못해서 해준이 내려놓을 때까지 두 손을 들고 기다렸다.
초령은 담 위의 등불을 모두 껐다. 이상한 불빛이 들어오면 대답하지 말라고 역졸 송찬에게 말했다. 송찬은 평소 같으면 까닭을 물었지만 오늘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다리 위에서 부축하느라 이미 팔이 떨렸다.
해준은 위진에게 다른 군령이 오면 복녀를 먼저 부르라고 했다. 위진은 몸을 일으키고 같이 가겠다고 했다. 붕대 아래에 새 피가 배었다. 해준은 그를 다시 눕혔다.
“세 역을 쉬지 않고 왔다. 한 번은 쉬어도 된다.”
“늦어진 걸 저한테 돌리겠지요.”
위진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누가?”
“다음 군관이요.”
그는 가족이 남쪽 군진에 있다고 했다. 명을 늦추면 그쪽에서도 소식이 끊길 것 같았다. 해준은 그 걱정을 없애 주지 못했다. 가족이 있는 곳으로 말 한 필을 바로 보내고 싶어 하는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초령은 방 밖에서 기다렸다. 해준이 나오자 그녀가 먼저 높은 길로 뛰었다. 해준은 부르지 않았다. 어제 낮부터 아버지가 없었다는 말을 하고 나니, 초령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산 위의 봉화대는 멀지 않았지만 길이 가팔랐다. 두 사람이 말 없이 오르자 숨소리만 나무 사이를 채웠다. 초령은 세 번 멈췄다. 첫 번째에는 해준이 넘어질까 봐 기다리는 척했고, 두 번째에는 고삐 걸 자리를 확인했다. 세 번째에는 변명하지 않았다.
“처음 불이 안 보일 때 올라왔어야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왔으면 찾았을까?”
“모르죠.”
“그럼 지금부터 찾아.”
초령은 해준을 노려보았다. 위로를 못하는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해준도 자기가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면 초령은 그 말이 거짓이라고 바로 알아들을 것이었다.
봉화대 문은 열려 있었다. 문고리가 안에서 빠져 바닥에 놓였다. 초령은 맨 먼저 아버지의 발자국을 찾았다. 젖은 흙에 여러 발이 겹쳐 있었다. 그중 하나를 아버지 것이라고 손으로 따라가다가 멈췄다.
“이렇게 큰 신발은 안 신어요.”
그녀는 자기 짐작을 스스로 지웠다.
해준은 지붕 쪽을 봤다. 연기를 올리는 틈이 젖은 판자로 막혀 있었다. 바람에 내려앉은 모양은 아니었다. 아래에서 받친 막대기가 가지런했다. 봉화가 꺼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령은 막대기를 빼려 했다. 해준이 손을 잡았다. 막대기를 빼면 위의 젖은 판자가 두 사람 위로 떨어졌다. 초령은 팔을 뿌리치다가 구조를 보고 멈췄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바닥에는 아버지가 신던 짚신 한 짝이 있었다. 굽을 천으로 덧댄 것이었다. 왼쪽은 없었다. 짚신 밑에는 검붉게 말라붙은 것이 있었다. 해준은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초령은 만지려다 자기 소매를 쥐었다.
“피예요?”
“그럴 수 있다.”
“누구 피?”
해준은 답하지 못했다. 초령은 짚신을 천으로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이 작은 사람을 안는 것 같았다. 해준은 먼저 밖을 살폈다. 사람이 끌려 내려간 흔적이 옆길로 이어졌다. 비에 흐렸지만 풀 한 줄이 같은 쪽으로 눕고, 그 사이에 오래 걸린 짐승의 길과 다른 넓이가 생겼다.
옆길에는 말 두 필이 지나간 자국이 있었다.
해준은 멀리 보이는 두현역을 봤다. 다리 위의 사람은 아직 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아버지의 흔적을 끝까지 좇으면 저 다리의 사람들을 잃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선택을 초령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다.
초령이 먼저 물었다.
“저쪽으로 간 거죠?”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라가요.”
“다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 말에 초령이 짚신을 더 세게 안았다.
“아버지는 여기 혼자 있었어요. 어제도.”
해준은 봉화대 안을 마지막으로 봤다. 아버지가 쓰던 작은 책상이 엎어져 있었다. 그 아래에 길게 접힌 종이가 끼었다. 초령이 그것을 꺼냈다. 땔감값과 먹이값을 적은 종이였다. 아버지가 그것을 무슨 말을 남기려고 숨긴 것인지, 그냥 떨어뜨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뒤를 펼치자 접수 봉투의 가장자리가 붙어 있었다.
해준은 익숙한 표시를 보았다. 두현역에서 봉투를 잘라 내는 모양과 같았다. 그러나 어제 날짜를 적은 손은 초령의 아버지였다. 짧게 ‘남쪽 명이 북쪽 얼굴로 옴’이라고 적혀 있었다.
초령이 종이를 읽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게 아니에요?”
“그렇게 보이게 했다는 말일 수 있다.”
해준은 종이의 모서리를 가만히 들어 올렸다. 거기에 붙은 봉투 조각은 그의 접수대에 남은 새 군령과 맞닿는 부분이었다. 모양은 같은데 잘린 표시의 간격은 달랐다. 새 봉투의 가장자리를 한 번 더 잘라 낸 흔적이 있었다.
봉투는 중간에서 열렸을 수 있었다.
해준은 그 발견을 끝까지 설명하지 못했다. 밖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책상 뒤에 엎드렸다. 문 앞에 창끝이 나타났다. 군졸이 안을 한 번 보고 밖으로 물러났다.
“여기는 비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말했다.
“다시 불 붙이면 안 된다. 역참으로 가.”
밖의 다른 사람이 답했다. 초령이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해준은 그녀의 입을 막지 않고 자기 팔을 앞으로 뻗었다. 지나가면 그 팔에 닿게 해 두었다. 초령은 팔을 보고 멈췄다.
발소리가 내려간 뒤 두 사람은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초령은 아버지의 흔적이 난 길을 한 번 돌아봤다. 해준은 그 시선을 기다렸다. 지금 찾지 않는 것이 찾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런 약속만으로 그녀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길을 그려 두자.”
해준이 말했다.
초령은 아버지의 종이 빈 곳에 갈림길을 그렸다. 말 자국이 있던 방향에 작은 선을 그었다. 해준은 그 종이를 접지 않았다. 도망가는 사람도 돌아올 길을 남길 수 있었다.
두현역에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군관 정호겸이 서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군졸 여섯이 따라왔다. 복녀는 말우리 앞에서 물통을 들고 버티고 있었다.
“명에 적힌 말이 없다 하니 역참을 뒤져야겠군.”
정호겸이 말했다.
“없는 말을 뒤진다고 생기나.”
복녀는 물통을 내려놓았다.
“두 마리는 몇 달 전에 죽었다. 세 마리는 당신네 군진에서 안 돌려줬고.”
군졸 하나가 복녀에게 가까이 갔다. 해준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그를 불렀다. 정호겸은 해준을 보자 웃었다. 늦게 돌아온 사람을 기다렸다는 웃음이었다.
“다리를 끊지 않았군.”
“아직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편이냐.”
해준은 피난민 쪽을 봤다. 여자는 아이를 품고 있었고 노인은 발을 감싸고 있었다. 편을 대답할 힘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묻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편입니다.”
정호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네가 군령을 골라 읽을 자리라고 생각하느냐?”
해준은 봉투의 원래 조각을 꺼내지 않았다. 정호겸이 그 조각을 알아보면 가져갈 수도 있었다. 위진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붕대가 보이도록 겉옷을 벌리고 있었다.
“중간 전달소에서 제가 받은 봉투를 바꿨습니다.”
위진이 말했다.
“모른 척하라고 했습니다.”
정호겸은 위진을 보았다. 군졸 둘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위진은 해준의 뒤로 숨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가족을 데려갈 수 있다고 해서요.”
그는 들고 있던 작은 나무패를 보여 주었다. 남쪽 군진에 있는 가족을 데려갈 때 쓸 수 있다는 표였다. 정호겸은 그 패를 보고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자기 패인지 아는 사람이 준 패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해준은 위진의 팔을 잡아 계단에 앉혔다. 몸이 무너지면 말도 끝났다. 복녀가 그 앞에 섰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물을 내밀었다.
정호겸이 다리 쪽을 가리켰다.
“늦기 전에 끊으면 네가 받은 명을 지킨 것으로 한다.”
해준은 강을 봤다. 마지막 수레가 다리 위에서 멎었다. 임산부를 누일 곳을 옮기는 중이었다. 송찬이 부축하다가 수레 밑에 손을 끼었다. 아이가 그의 소매를 당겼다.
“지금 끊으면 사람도 떨어집니다.”
“북쪽의 사람은 돌아가게 해.”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정호겸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기다릴 이유를 찾은 얼굴이었다.
“좋다. 네 이름으로 남겨라.”
그는 군졸에게 말을 모으라고 했다. 두현역의 다섯 필이 하나씩 밖으로 나왔다. 복녀가 막으려 하자 군졸이 창을 들었다. 해준은 그녀를 붙잡았다. 말을 지키려고 사람이 찔리면 수레를 끌 사람도 없어졌다.
마지막 말은 아픈 발을 끌고 있었다. 군졸은 그것까지 데려갔다. 복녀의 손에 남은 고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호겸은 해가 질 때 다시 오겠다고 했다. 말들이 떠나는 길을 초령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이 등불 없는 담을 만졌다.
“높은 데가 꺼졌으면, 여기서 보내도 되나요?”
해준은 그녀의 눈을 봤다. 아버지의 짚신은 아직 품 안에 있었다. 다른 역참에 피난민을 보내려면 누군가 이 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잘 보이는 곳에 세워.”
그는 말했다.
초령이 세 등불을 담 위에 올렸다. 불이 켜졌다. 밤길을 열어 두라는 두현역의 약속이었다. 강 건너 멀리, 낮은 언덕에서 작은 불 세 개가 대답했다.
해준은 그 불빛을 보고도 안심하지 못했다. 정호겸의 말들이 다리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달리고 있었다.
명령대로 다리를 끊지 않으면, 양쪽에서 끊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