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수선하는 야간 공방

2화: 약속은 누구의 것인가
“서린아.”
시계탑 아래에서 들린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낮고 또렷했다. 서린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떠올랐던 노래의 첫 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혀끝에 붙어 있던 이름 하나가 종소리에 밀려난 것 같았다.
태인이 서린의 팔을 잡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대답은 너무 빨랐다. 명자는 서린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옥상 문을 잠그고 낡은 시계탑 쪽으로 이동했다. 태인은 먼저 계단을 내려가려 했고, 서린이 그의 가방끈을 붙잡았다.
“거긴 제 작업장이 아니에요. 허락 없이 들어가지 마세요.”
“그럼 별 조각이 떨어지게 두자는 겁니까?”
“누가 부르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명자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종이 두 번 울리기 전까지만 들어가자. 세 번째 종이 울리면 돌아온다.”
“왜 세 번이죠?” 태인이 물었다.
“오래된 종탑의 안전 규칙이야. 기계가 세 번 울릴 때는 안에 남지 않아.”
“사람이 설계한 규칙이에요?”
“사람이 살아남으려고 만든 규칙이지.”
탑의 문은 녹슬어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 나왔다. 서린은 공구 가방을 앞으로 들고 문턱을 넘었다. 좁은 계단이 나선형으로 위로 이어졌고, 벽에는 시곗바늘과 비슷한 금속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태인은 손전등을 켰다. 빛이 닿은 곳마다 먼지가 푸른색으로 반짝였다.
중간 층에 멈춘 괘종 장치가 있었다. 추는 떨어져 바닥에 누워 있었고, 톱니 하나가 반으로 깨져 있었다. 바늘은 위층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서린은 장치의 축을 확인했다. 마찰 흔적이 최근에 생겼다.
“누군가 만졌어요.”
“누가요?”
“아직 모르죠.”
태인은 손전등을 들고 벽을 비췄다. 그곳에는 오래된 분필 글씨가 남아 있었다. ‘약속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글씨 아래로 작은 이름 세 개가 겹쳐져 있었다. 서린은 익숙한 필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명자는 글씨를 보자 시선을 거뒀다.
“아버지 글씨예요?” 서린이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보셨잖아요.”
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태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지아’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이 멈추자 그는 휴대폰을 껐다.
“누구죠?” 서린이 물었다.
“동생입니다.”
“연락을 피하는 이유는요?”
“제가 물건을 전달하지 못했거든요.”
“무슨 물건이었는데요?”
“생일 선물.”
태인은 그 이상 말하지 않으려 했다. 서린은 한 번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시계가 울릴 때마다 그의 주머니 안에서 은색 가방 고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위층에 도착하자 종탑의 중심부가 드러났다. 천장의 큰 시계판은 바깥에서 볼 때와 달리 안쪽으로 뒤틀려 있었다. 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뚫렸고 그 틈에 푸른 별가루가 매달려 있었다. 별가루는 얇은 실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탑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서린아, 약속했잖니.”
이번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시계의 진동이었다. 서린은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태엽이 너무 세게 감겨 톱니가 축을 밀어내고 있었다. 힘을 더 주면 시계가 부서질 것이다. 금이 간 별을 억지로 붙이는 것보다 먼저, 누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알아야 했다.
명자가 가방에서 얇은 천을 꺼냈다. 천 안에는 작은 천체도가 들어 있었다. 몇 개의 별자리가 지워져 있었고, 나머지는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탑 중앙의 별가루가 천체도에 닿자 하나의 선이 되살아났다. 선의 끝은 태인이 들고 온 시계의 어두운 점과 이어졌다.
“이건 누구의 약속이죠?” 서린이 물었다.
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동생과 한 약속입니다.”
“어떤 약속이요?”
“어릴 때 지아가 겁이 많아서 밤마다 별을 세었어요. 부모님이 따로 살게 된 뒤에는 제가 옆에 있겠다고 했죠. 그런데 저는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왔습니다. 지아가 제 연락을 기다렸을 텐데, 그해 생일에도 못 갔어요.”
“그 뒤로 사과했어요?”
“문자로 했죠. 답은 없었습니다.”
“문자는 사과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아십니까?”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회중시계를 열고 태엽의 저항을 살폈다. 태인이 숨을 고르는 동안 별가루가 한 번 더 흔들렸다. 금이 간 곳은 시계 유리뿐이 아니었다. 그의 말과 기억 사이에도 오래된 균열이 있었다.
서린은 시계의 뒤판을 열어 내부를 살폈다. 톱니 네 개 중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모되어 있었다. 누군가 시간을 늦추려 한 흔적과 앞당기려 한 흔적이 한 장치 안에 겹쳤다. 그녀는 고장 난 톱니를 빼지 않고, 먼저 흔들림의 주기를 재기 위해 가는 종이 조각을 축에 댔다.
종이가 오른쪽으로 당겨졌다가 왼쪽으로 튕겼다. 시계가 같은 순간에 두 번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엽을 풀면 한쪽 흔적만 남겠지만, 그건 고치는 게 아니라 더 강한 힘을 택하는 일이었다.
“둘 중 하나를 잘라 내면 빠르겠죠.” 태인이 말했다.
“빠른 수리와 올바른 수리는 다를 때가 있어요.”
“그럼 둘 다 살릴 수 있습니까?”
“시계만 봐서는요.”
그녀는 태인의 가방 안쪽을 다시 확인했다. 안감에 꿰매진 작은 실밥 하나가 다른 색이었다. 서린이 바늘로 뜯자 접힌 종이 조각이 나왔다. 태인은 자기도 모르는 물건이라고 했다. 종이에는 어린아이 글씨로 ‘비가 그치면 같이 별을 세자’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이름 첫 글자만 남아 있었다. ㅈ.
“지아가 쓴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추측할 수 있어요. 확정하려면 본인에게 물어봐야 해요.”
태인은 종이를 받아 들고 오래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는 건 비 오는 밤의 창문과 동생이 창틀에 앉아 있던 모습뿐이었다. 생일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서린은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지 않겠다고 말하지 못한 시간이 중요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럼 사과하면 약속이 돌아옵니까?”
“저는 사람의 마음을 수리하지 않아요. 시계가 왜 멈췄는지 볼 뿐이죠.”
태인은 종이를 지갑 안에 넣었다. 동생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변명을 준비하지 않고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문장 끝까지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시계 안쪽의 두 진동이 잠깐 같은 박자가 되었다.
하지만 유리의 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계가 저절로 다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태인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진 않군요.”
“말은 시작일 뿐이니까요.” 서린이 말했다. “약속은 그다음에 뭘 하느냐로 남아요.”
탑 아래에서 세 번째 종이 울렸다.
명자가 천체도를 접었다. “나가야 해.”
“별을 고치지 못했어요.”
“오늘 밤은 여기까지다.”
“조금만 더—”
“무리하면 탑의 시간이 너를 삼켜.”
명자는 태인의 팔을 잡아 계단 쪽으로 밀었다. 서린은 별가루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천으로 감싸 들었다. 내려오는 동안 계단이 한 칸씩 어긋났다. 올라올 때 열셋이던 층계참이 내려갈 때는 열네 개였다. 서린은 순서를 세지 않으려 애썼다. 숫자를 놓치면 방향도 놓칠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 공기가 뺨을 식혔다. 시계탑의 바늘은 다시 12시 18분에 멈춰 있었다. 태인의 휴대폰이 켜지며 진동했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었다. 음성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빠, 올해는 안 와도 돼. 엄마가 이사했어. 주소는 보내지 않을게.”
태인은 재생을 멈추지 못했다. 스피커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밤에 무서우면 별을 같이 세 주겠다고. 그런데 네가 제일 먼저 사라졌어.”
메시지는 끝났다. 태인의 얼굴에서 농담기가 사라졌다.
“지아를 찾아가야겠어요.”
“주소를 안 보냈다면서요.”
“예전에 살던 동네를 알아요. 아직 거기 있을 수도 있고, 아니어도 찾겠습니다.”
명자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찾아가서 용서를 받아내려 하지 마. 네가 지킬 수 있는 약속부터 말해.”
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별가루를 공방으로 가져가려다 손바닥이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란 가루가 피부에 얇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어린 시절 노래의 첫 음이 또 한 번 흔들렸다.
“그건 대가야.” 명자가 말했다. “수리도 하기 전에 이미 별빛을 붙잡았어.”
“얼마나 잃었죠?”
“아직 모르겠어.”
“잃을 걸 알고도 말 안 해 주셨군요.”
명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말하면 네가 멈출 줄 알았다.”
서린은 손을 움켜쥐었다. 별가루가 피부 아래로 가라앉자, 어머니가 불러 주던 노래의 첫 소리가 멀어졌다. 가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창문에 비가 맺혔다는 감각만 남았다.
공방에 돌아온 서린은 시계를 확대경 아래 놓았다. 유리의 금은 더 길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멈춘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태인은 탑에서 나온 별가루를 시계의 깨진 톱니 옆에 놓았다.
“제가 먼저 지아에게 가겠습니다.”
“지금?”
“아침이 오면 또 미루고 싶을 것 같아서요.”
그는 비에 젖은 배달 가방을 둘러멨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지만, 서린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시계를 맡긴 사람은 당신이 아니잖아요.” 서린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럼 왜 가져왔어요?”
태인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옮긴 물건이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엔 모른 척하고 지나가지 않으려고요.”
그가 계단을 내려갔다. 열일곱 번째 계단이 삐걱거렸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서린은 회중시계를 다시 열었다. 태엽은 여전히 팽팽했지만, 그 아래에서 아주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남긴 시계의 초침이 한 칸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서린은 어머니의 노래를 한 음 더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