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보관소의 실종 기록

3화: 기억하는 청소원
오선희는 유리 앞으로 종이 묶음을 밀었다.
“내 이름도 적혀 있잖아요.” 유리가 말했다.
“그건 네가 쓴 편지야.”
“제가 언제 썼는지 기억이 없어요.”
“기억 안 나는 게 이상한 일이니? 너는 여덟 살 때부터 기억이 자주 비었어.”
유리는 묶음을 펼치지 않았다. 문서의 수신인과 발신인을 먼저 확인했다. 수신인은 한유리, 발신인은 오선희. 첫 장에는 오래된 주소와 이관 번호가 적혀 있었고, 도장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구청 별관의 것이었다. 선희는 서류가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유리에게 보낸 것이다.
민규는 유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다시 심해졌다. 그는 감사관 해진에게도 누구냐고 물었다. 해진은 자신의 명찰을 가리키며 이름을 말했지만, 민규는 그 이름을 잠시 뒤 잊었다. 세 사람은 문서에 적힌 이름을 반복할수록 서로의 기억이 흐려지는지 관찰했다. 다만 한 차례의 확인만으로 규칙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유리는 문서 원본을 선희에게서 빼앗지 않았다. 대신 서류의 바깥 봉투를 촬영하고, 종이 가장자리의 눌린 흔적을 살폈다. 편지 본문은 아직 읽지 않았다. 누구든 이름과 내용을 읽으면 변화가 생길 수 있었다. 보존 원칙은 문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지금은 사람을 지키는 벽이기도 했다.
“별관에 가면 제 기록이 더 있나요?”
“있을 거야. 하지만 그곳은 지도에서 사라졌어.” 선희가 답했다.
해진은 별관이 폐쇄된 지 12년이라고 했다. 건물은 철거됐고, 문서도 본청으로 이관됐다는 게 공식 설명이었다. 그런데 봉투에는 여전히 별관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해진은 자신이 이 문서를 승인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출입증 뒷면의 인계 메모는 그녀의 서명과 닮았지만, 날짜는 기억나지 않았다.
민규는 시설 도면을 찾으러 갔다. 그가 보관실 밖으로 나가자 유리는 잠시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표에 적힌 글자를 읽고서야 ‘서민규’라는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걸 떠올렸다. 기억은 사람을 따라오는 게 아니라, 어떤 매개에 걸려 있었다.
유리는 서류를 접어 들고 이동하지 않기로 했다. 원본을 옮기면 장소가 바뀐다는 이야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문서가 보관소를 움직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신 별관 이관표에 적힌 번호를 현행 목록에서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폐기 완료였다. 그러나 번호 앞의 두 자리가 지금 쓰는 분류 체계와 맞지 않았다. 옛날에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주소 단위로 기록을 묶었다.
해진은 자신의 감사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이전 열람 기록이 17건 남아 있었지만, 문서 제목은 전부 공란이었다. 그녀는 유리가 읽은 신고서 접수번호를 입력했다. 단말기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라고 했다. 해진은 자기 서명이 찍힌 흔적을 보고도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내가 이 문서를 인계했다면, 왜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까요?”
선희는 대답 대신 문밖의 정수기를 가리켰다. 물을 마신 뒤에야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잊지 않을 수 있다는 듯했다. 그녀는 종이 대신 벽에 연필로 이름을 적었다. ‘한유리’. 글씨가 끝나자 글자의 가운데가 희미해졌다. 선희는 같은 이름을 다시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름을 붙잡으려다 더 빨리 놓쳐.”
“그럼 뭘 붙잡아야 하죠?”
“그 애가 한 일을.”
선희는 유리가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길을 잃은 아이를 집에 데려다줬다고 했다. 그 아이는 선희의 손녀였다. 유리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지만, 선희는 아이가 젖은 운동화를 벗어 현관에 놓았던 장면을 묘사했다. 다음 날 유리의 어머니가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했고, 그 뒤로 선희는 유리를 기억하게 됐다고 했다.
민규가 돌아와 건물의 오래된 환기 도면을 펼쳤다. 지하 기록관에서 폐쇄 별관으로 이어지는 서비스 통로가 점선으로 남아 있었다. 지도에는 폐쇄 처리됐지만, 벽면의 공기 흐름은 지금도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민규는 통로가 실제로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해진은 허가 없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았다.
“공식적으로는 철거된 건물이에요. 그 안에 문서가 있다는 주장은 기록으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확인하러 가야죠.” 유리가 말했다.
“위험할 수 있어요.”
“오늘 밤 제 이름이 신고서에 접수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다리면 그 다음은 확인할 수 없어요.”
유리는 문서를 봉인 상태로 남기고, 서류의 번호와 출입 시각만 기록했다. 해진은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민규는 통로 열쇠가 있는지 확인하러 먼저 내려갔다. 선희는 청소 카트를 밀고 뒤따랐다. 아무도 그녀에게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가 갈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하 3층 벽에는 오래된 방화문이 있었다. 표지판에는 ‘폐기물 임시보관’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손잡이는 최근에 닦인 흔적이 있었다. 민규가 열쇠를 돌리자 문은 안쪽으로 열렸다. 벽 너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록된 통로가 나타났다.
민규는 문을 열자마자 손전등을 안쪽으로 비췄다. 통로는 건물 도면보다 길었다. 왼쪽 벽에는 배관이 지나갔고, 오른편에는 선반 번호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물자국이 없는데도 젖은 흙 냄새가 났다. 유리는 그 냄새가 상자에서 맡은 것과 같은지 확인했다. 더 깊은 곳에서 흙 냄새가 강해졌다.
해진이 문턱을 넘으려 하자 민규가 손을 들어 막았다. 통로 입구에는 ‘폐쇄 구역, 2인 이상 진입 금지’라는 낡은 표지가 붙어 있었다. 세 사람은 이미 두 명이 넘었지만, 민규는 하나의 손전등만으로 길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시설 점검용 줄을 문고리에 묶고, 다른 끝을 유리의 손목에 감지 않도록 그녀에게 쥐여 줬다. 길을 잃으면 줄을 세 번 당겨 신호하기로 했다.
선희는 카트를 밀고 통로로 들어왔다. 바퀴가 문턱을 넘는 순간, 복도 뒤의 방화문이 닫혔다. 해진이 돌아가려 했지만 손잡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출입 단말기는 연결이 끊겼다. 문이 잠긴 건 고장이 아니라 안쪽으로 이동한 뒤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유리는 뒤를 보지 않고 선희의 카트에 실린 걸레 자루를 살폈다. 자루에는 익숙한 주소 하나가 적힌 봉투가 묶여 있었다.
“그 주소가 어디죠?”
“네가 살던 집.”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말하면 네가 그 집을 찾으러 갈 테니까.”
“그게 왜 위험해요?”
선희는 대답 대신 카트를 밀었다. 통로의 천장에는 문서 이관 표식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번호가 하나씩 거꾸로 되어 있었다. 민규는 잘못 붙인 안내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는 번호의 인쇄 상태를 확인했다. 표식은 오래전에 붙었고, 잉크가 종이 섬유 안쪽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바꿔 붙인 게 아니었다.
첫 번째 방화문은 열리지 않았다. 민규는 열쇠를 바꿔 끼웠지만 자물쇠가 맞지 않았다. 문틈에서 종이 조각이 밀려나왔다. 유리는 손대기 전에 문 위의 표기를 읽었다. ‘가족 주소별 임시 보관.’ 그 문구는 현재 분류 체계에 없는 방식이었다. 해진이 문서 보관 번호를 대조하려 했지만, 본부와 연결되지 않았다.
유리는 문고리 주변을 살폈다. 키홀이 아니라 문서 보관함의 봉인 구멍이 달려 있었다. 그 구멍에는 인장이 찍힌 얇은 종이테이프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뜯지 않고 빛을 비춰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한유리. 발신자는 공란이었다.
“이 문은 열쇠가 아니라 수신인이 열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름을 말하면 더 지워질 수도 있어.” 선희가 말했다.
유리는 자기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아까 만든 확인표를 꺼냈다. 이름 대신 기록관리사라고만 적힌 종이였다. 그것을 봉인 구멍 아래에 밀어 넣자 방화문 안쪽에서 작은 금속 소리가 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잠금쇠 하나가 풀렸다.
해진은 자신의 출입증에 남은 희미한 서명을 문틈에 댔다. “내가 인계했다면, 이 문을 여는 데 내 서명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서명은 남아 있네요.” 유리가 말했다.
“그럼 서명만으로 문을 열어 보죠.”
해진은 출입증을 밀어 넣었다. 잠금쇠가 두 번째로 풀렸다. 민규가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조금 열렸다. 그 순간 안쪽에서 바람이 밀려 나와 손전등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종이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줄을 세 번 당겨 모두 멈추게 했다. 누군가 앞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민규는 비상 손전등을 켰다. 바닥에는 사람 키 높이로 쌓인 서류 더미가 있었고, 맨 위에 낡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유리는 어린아이였고, 옆에는 얼굴이 지워진 어른이 서 있었다. 선희는 사진을 보자 자루를 놓쳤다. 해진은 사진을 집으려다 손을 거뒀다.
유리는 사진의 모서리를 들고 뒷면을 확인했다. 접착제 아래로 글자가 비쳤다. ‘인계된 아이의 이름을 읽지 말 것.’ 그 아래에는 누군가의 손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오늘 날짜였다.
민규는 먼저 뒤로 물러서 유리가 손전등을 잡을 수 있게 했다. 빛을 비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진 가장자리에 새 지문이 찍혀 있었다. 손가락 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눌린 방향이었다. 해진은 사진을 놓고, 선희는 걸레 자루를 꽉 쥐었다.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유리는 이름 대신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통로 끝에서 누군가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통로 끝에서 누군가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유리도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엄마?”
벽 너머의 응답은 기록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