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보관소의 실종 기록

1화: 내일 접수된 실종 신고
한유리는 종이 상자에서 젖은 흙 냄새가 나는 것을 먼저 알아챘다.
지하 보관소의 제습기는 멈춘 적이 없었다. 벽면 습도계는 48퍼센트를 가리켰고, 장마철에도 이곳은 마른 종이와 먼지 냄새만 났다. 유리는 장갑을 갈아 끼고 상자의 봉인끈을 확인했다. 이관 목록에 없는 물건이었다. 상자 옆면에는 납작한 종이표가 붙어 있었지만, 분류번호도 부서 인장도 없었다.
“그거 오늘 들어온 겁니까?” 서민규가 사다리 위에서 물었다.
시설기사 민규는 천장 배수관의 밸브를 점검하고 있었다. 유리는 업무용 단말기에서 이관 목록을 다시 검색했다. 결과는 0건이었다. 상자를 열려면 인수 확인을 받아야 했지만, 인수자가 없다면 절차를 시작할 수 없었다.
“목록에 없어요. 우선 격리 선반에 두겠습니다.”
“안에 쥐라도 들어 있으면?”
“쥐도 반입 기록은 남겨야죠.”
민규는 웃으며 내려왔지만, 상자 앞에 서자 표정이 달라졌다. 흙 냄새 속에 젖은 잉크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종이표를 만지려다 손을 거뒀다. “지하 3층에서 이런 냄새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빈 선반만 남았죠.”
유리는 상자를 사진으로 찍고 임시 번호를 부여했다. 봉인을 자르지 않은 채 빛을 비춰 안쪽을 확인하려 했으나, 상자는 빛을 흡수하듯 어두웠다. 얇은 틈 사이로 서류 한 장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종이 모서리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실종 신고 접수 인장이었다.
“내부 문서를 꺼내 확인해야 합니다.”
“목록이 없는데도요?”
“그래서 더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영상 기록과 입회자가 필요해요.”
민규는 출입 기록을 열었다. 지난밤 지하 3층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도어 센서는 오전 2시 17분에 열림 신호를 한 번 기록했다가 자동으로 삭제한 흔적이 있었다. 그는 지하 3층의 전원 장치를 점검하겠다며 열쇠를 가져왔다. 유리는 감사팀에 입회 요청을 보냈다. 답변은 업무 시간 이후로 미뤄졌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보관소의 다른 직원들이 점심을 나갔다. 유리는 상자를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 비인가 물품을 방치하면 자신이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민규를 입회자로 지정하고, 봉인끈을 자르는 대신 매듭을 풀었다. 끈은 젖은 것처럼 미끄러웠다. 상자 안에는 서류 봉투와 오래된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한유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리는 숨을 멈췄다. 생년월일은 정확했고, 당시 주소는 어린 시절 살던 연립주택이었다. 접수일은 내일 날짜였다. 실종 신고서의 내용은 짧았다. ‘신고 대상자는 기록관 지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됨. 신고자는 확인 불가.’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민규가 물었다.
“아니요. 오늘 처음 봅니다.”
“그런데 이름은 왜 적혀 있어요?”
유리는 문서를 들지 않고 투명 덮개 아래에서 읽었다. 이름을 읽는 순간 천장 전등이 한 번 꺼졌다. 옆 선반에서 누군가 낮게 기침했다. 유리는 서류를 덮고 보관실을 나섰다. 밖에 있던 동료가 그녀를 보고 인사를 하려다 멈췄다.
“실례지만, 방문증은 어디서 받으셨어요?”
“저예요. 한유리.”
동료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처음 뵙는 분인 줄 알았어요.”
유리는 출입 카드를 단말기에 댔다. 화면에는 ‘임시 방문자’라고 떴다. 소속 직원 번호는 유효하지 않았다. 민규가 그의 카드로 문을 열어 줬다. 그는 유리를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주소와 직급을 묻자 대답을 망설였다. 이름은 기억한다는데, 둘이 함께 일한 첫날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유리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인사 기록을 열었다. 전산 목록에는 한유리가 없었다. 급여 명세서, 교육 수료증, 업무용 전화부까지 검색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개인 머그컵에는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글자가 번져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하 보관소로 돌아가 신고서를 다시 확인했다. 문서를 읽지 않은 민규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했다. 그러나 유리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자 그의 얼굴에서 확신이 사라졌다.
“잠깐만요. 당신이 누구였죠?”
유리는 서류를 덮었다. 민규는 고개를 흔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가 문서를 읽은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는 규칙이 있을지 몰랐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었다. 유리는 서류를 봉인하고 읽은 시각과 입회자를 기록했다.
그때 야간 청소원 오선희가 문 앞에서 말했다. “유리야, 상자 안에 네 이름이 있었니?”
유리는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그런데 선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선희는 젖은 걸레를 쥔 채 상자 쪽으로 한 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신고서, 내일 네가 없어질 거라고 적혀 있어.”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유리가 물었다.
선희는 대답하지 않고 보관실 안쪽을 바라봤다. 상자의 봉인끈이 바닥에서 혼자 미끄러지고 있었다. 유리는 기록물을 다시 봉인하려 했지만, 상자 안의 종이가 바람도 없이 들썩였다. 민규가 손전등을 켜자 빛이 선반 너머에서 꺾였다. 누군가 어두운 통로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열지 마.” 선희가 말했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사람이 아닐 때도 있어.”
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주변을 살폈다. 제습기 소리가 끊겨 있었고, 습도계는 숫자 대신 짧은 가로줄을 띄웠다. 상자에서 올라온 흙 냄새는 점점 강해졌다. 그녀는 원본을 덮개 아래로 밀어 넣고 투명 보존판을 닫았다. 민규는 비상 조명 스위치를 눌렀지만, 보관실 조명만 켜지지 않았다.
통로 끝에서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가려 했고, 선희는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네가 다섯 살 때도 저 소리를 들었어. 그 뒤로 네 엄마가 주소를 옮겼지.”
“우리 엄마를 아세요?”
“네가 묻기 전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을 거야.”
선희는 바닥에 떨어진 봉인끈을 밟았다. 끈은 손상된 종이처럼 부서져 먼지가 됐다. 민규가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지만, 선희는 잠깐 망설였다. “오선희. 이 건물에 19년째 있어.”
민규는 이름을 들은 뒤 그녀를 알아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선희가 다시 유리를 보자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민규는 선희를 이 건물에서 본 적이 있는지 묻고,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도 되풀이했다. 유리는 그가 잊어버리는 순간을 기록했다. 숫자와 시각을 적는 동안만큼은 이름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올라가 개인 물건을 가져오기로 했다. 민규와 선희가 함께 따라왔다. 책상 서랍에는 오래된 가족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초등학생 유리는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고, 옆에는 얼굴이 잘린 어른 하나가 서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유리, 여덟 번째 생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선희는 사진을 보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네 엄마가 이 사진을 맡겼어. 이름을 읽지 않으면 널 기억할 수 있다고 했지.”
“그 말을 왜 이제야 해요?”
“네 이름을 불러도 되는 날이 올 줄 몰랐어.”
유리는 사진을 빼앗듯 들지 않았다. 봉투에 넣어 민규에게 건넸다. “읽지 말고 보관해 주세요.” 민규는 봉투 겉에 날짜와 장소만 적었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그 순간 선희가 유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이름이 없어도 네가 뭘 했는지는 남으니까.”
보관소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안내 방송이 흘렀다. ‘방문자 한유리 님, 본관 1층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유리는 안내 방송 기록을 저장하려 했지만, 스피커가 꺼지며 말을 삼켰다. 민규의 카드에는 그녀가 여전히 방문자라고 표시됐다. 하지만 선희는 그녀의 옆을 걸으며 어린 시절 별명으로 불렀다. 그 별명은 신고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이름은 누가 지웠어요?”
선희는 답 대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내일이 오기 전에 네가 직접 찾아야 해.”
유리는 임시 확인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는데도 손끝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잉크는 검은색이 아니라 오래된 봉투에서 맡았던 젖은 흙 냄새를 풍겼다.
유리는 선희가 말한 별명을 물었다. 이름에 관한 문서가 아니라면 기억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선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리구슬”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주머니에 파란 구슬을 넣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리는 그런 기억이 없었지만, 사진 속 어린아이가 손에 파란 점을 쥐고 있었다. 민규도 사진을 보았으나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제가 정말 이 건물에 왔었나요?”
“응. 엄마가 네 손을 잡고 왔어. 그때도 너는 이름표를 떼어 냈지.”
선희는 기억의 내용 대신 행동을 설명했다. 유리가 차가운 바닥에 앉아 구슬을 굴리고, 기록실 문에 귀를 댔다는 이야기였다. 유리는 사진의 뒷면을 확대해 보았다. 날짜는 물에 번져 있었지만, 지하 보관소의 옛 표식이 남아 있었다. 문서에 적힌 이름을 읽지 않아도 두 사람의 과거가 연결돼 있을 수 있었다.
“내일 신고서가 접수되면 저는 어디로 가게 되죠?”
선희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청소 카트에서 낡은 열쇠를 꺼내 유리에게 건넸다. 열쇠에는 현재 건물 어디에도 쓰이지 않는 삼각형 홈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네가 사라지는 게 아니야. 네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지.”
민규는 열쇠를 보며 자신도 같은 모양을 본 적 있다고 말했다. 지하 3층 벽 안쪽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던 밤이었다. 그는 그때 보고하지 않았다. 보수 공사가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유리는 세 사람의 진술을 별도 기록으로 남기고, 각자 서명 대신 손가락 지문을 찍어 확인했다.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않기 위해서였다.
보관소 전등이 다시 꺼졌다. 이번에는 문이 저절로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