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를 훔친 그림자가 구애한다

2화: 그림자의 합창
새벽까지 누구도 대극장에 혼자 남지 않았다. 나린은 단원들을 조명실에 모으고, 발화 대신 손전등 신호를 정했다. 초록은 출입 허가, 노랑은 질문, 붉은색은 즉시 대피. 목소리를 잃은 이엘은 색 천을 손목에 묶었다. 로에는 악보에 각 신호의 박자를 적었다.
“말을 금지하는 건 답이 아니에요.” 나린이 말했다. “대신 누구도 말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림자가 말을 따라 할 때만 목소리를 빼앗는다면, 대화를 멈추면 되지 않을까요?” 무대 담당 수아가 물었다.
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모방이 시작된 건 대사가 아니라 제가 낸 기준음이었습니다. 말이 아니어도 음성 신호가 될 수 있어요.”
“그럼 노래도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나린은 확인되지 않은 말을 공연 지침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내도 되는 구역과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 구역을 나누기로 했다. 음향 통로를 막고 거울천을 접어 반사면이 무대 쪽을 향하지 않도록 했을 때, 단원들은 하나씩 손을 들어 준비됐다는 표시를 했다.
“이엘 씨도 연습에 참여하고 싶습니까?” 나린이 물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건’이라는 종이를 들었다. 나린은 종이에 펜을 건넸다. 이엘은 짧게 적었다. ‘내 목소리는 내가 쓰겠다고 할 때만 듣는다. 대신 말해 주지 말 것.’
“알겠습니다.” 나린은 종이를 붙여 둔 뒤, 로에에게도 보여 줬다.
그는 악보를 다시 그렸다. 이엘의 솔로 구간은 관객석을 향하되 거울천에서 등을 돌리도록 배치했다. 로에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만큼, 합창의 입 모양과 진동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단원들이 그를 반원으로 둘러싸게 했다.
“이 구성은 제가 기준음을 직접 듣지 못하는 쪽이 있습니다.”
“누가 듣고 알려 줄까요?” 나린이 물었다.
“아무도 제 대신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각자 들은 위치를 표시해 주세요. 겹치지 않으면 연주를 멈추겠습니다.”
로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숨기지 않았다. 나린은 그가 연주를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준비까지 함께 갖춘 것에 안도했다.
수아가 조명 점검을 하러 거울천 뒤쪽으로 이동했다. 나린은 혼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수아는 막힌 통로의 스위치를 먼저 꺼야 했다. 그녀는 로에가 그린 대피 신호를 손전등으로 비추고, 문을 열기 전 팀에 알렸다. 수아가 돌아온 뒤 거울천을 걷어 내자 그 뒤에 녹슨 유리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옛 합창단의 소리를 객석까지 보내던 반사 장치였다.
“거울천은 소리를 반사하지 않아요.” 로에가 말했다. “유리판이 벽에 있어요.”
“그럼 천이 아니라 판이 원인이었군요.”
“아직은 가능성입니다.” 나린은 유리판을 직접 만지지 않고 손전등으로 표면을 살폈다. 각각의 판에는 사람 이름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이엘은 자기 이름을 찾다가 세 번째 판 앞에서 멈췄다. 그 아래에는 오래전 왕립극장에서 사라진 성악가의 이름이 있었다.
“제 어머니 이름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린은 질문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엘은 계속 말하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여기서 노래하다 목소리를 잃었어요.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은 그 뒤 악보를 폐기했다고 했어요.”
라비안은 어두운 통로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 기록은 오래전에 봉인됐습니다.”
“누가 봉인했죠?”
“당시 극장장이요.”
“그 뒤로 같은 일이 이어졌나요?” 나린이 물었다.
“공식적으로는 없었습니다.”
“공식 기록에 없는 일이요?”
라비안은 대답을 피했다. “그 자료를 공개하면 극장 운영 허가가 중단될 수 있습니다.”
“그럼 먼저 공개해야겠네요.”
“초연 전에 이 일을 키우면 관객과 단원 모두 위험해집니다.”
“기록이 위험을 만들었는지 숨긴 게 위험을 키웠는지 확인해야 해요.”
라비안은 반박하지 않았다. 나린은 그에게 유리판 사진을 찍고, 옛 공연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약속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무대에 남은 그림자 흔적을 확인하는 사이, 객석 문밖에서 누군가 물었다. “리허설은 다시 시작하나요?” 목소리는 관객 안내를 맡은 견습생 아라의 것이었다. 나린은 대답하기 전에 문을 통해 얼굴을 확인했다. 아라는 무대 가까이 오지 않았고, 붉은 신호등을 보고 멈춰 있었다.
“아직 아닙니다. 안전 구역에서 기다려 주세요.” 나린이 말했다.
“네.” 아라는 손전등을 들어 초록색을 비췄다.
그 순간 거울판에서 아라의 목소리가 한 번 울렸다. 똑같은 억양과 숨결이었다.
“네.”
아라는 놀라 손전등을 떨어뜨렸다. 나린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출입문에서 물러나라고 신호했다. 이엘은 목을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로에는 소리의 방향을 찾으려 했지만, 유리판이 여러 개여서 반향이 겹쳤다.
“모방이 한 번입니다.” 수아가 기록했다.
“거울판을 가려요.” 나린은 붉은 신호를 들었다. 단원들이 각자 자리에 멈췄다. “아라 씨, 지금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안전한 곳까지 혼자 이동할 수 있습니까?”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목소리는 살아 있었다. 그림자는 한 번만 되풀이했지만, 관객석에 있는 사람의 음성도 따라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로에는 악보를 접었다. “다음 번엔 두 번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연습을 멈출까요?” 나린이 물었다.
“무대 위에서만 멈추면 저주가 번질 수도 있습니다.”
“계속하면 단원이 위험해져요.”
이엘은 ‘한 번 더, 내가 정할게’라고 적은 종이를 들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로 무대에서 한 문장을 말해 보고 싶어 했다. 로에는 그녀에게 마이크를 밀지 않았다. 나린은 확인했다.
“이엘 씨, 지금 한 번 말해 보고 싶다는 뜻인가요?”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사와 다른 문장을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 뒤에 멈출 수 있어요.”
“네.”
이엘은 객석을 향해 섰다. “내 목소리는 내 거예요.”
유리판은 그녀의 말을 한 번 따라 했다. 목소리가 대극장을 울렸다. 이엘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자기 의지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두 번째 모방은 없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정지 신호를 보냈고, 나린은 연주를 멈췄다.
“괜찮습니까?” 로에가 물었다.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괜찮지 않다는 뜻이었다. 로에는 더 묻지 않았다. 나린은 기록에 ‘목소리 모방 1회, 단원 요청으로 연습 정지’라고 적었다.
“그 말이 정답을 찾았나요?” 라비안이 물었다.
“아니요.” 나린이 답했다. “하지만 이엘 씨가 언제 멈출지 직접 정했습니다.”
“초연 전까지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해결하지 못하면 취소할 수도 있어요.”
“취소하면 저주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서요.”
“그건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을 이유로 무조건 강행할 수는 없습니다.”
라비안은 아무 말 없이 극장 운영 허가서를 접었다. 로에는 나린에게 손전등을 건넸다. 두 사람의 손은 닿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먼저 물어보기를 기다렸고, 그는 손을 내밀기 전에 물었다.
“장비를 같이 옮겨도 될까요?”
“네. 무대 밖으로요.”
그들은 각자 다른 상자를 들었다. 길은 좁았고, 로에 쪽으로 바닥의 진동이 더 강했다. 나린은 그에게 자신의 팔을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선을 따라 조명을 켰다. 로에는 한 걸음씩 이동하며 몸으로 느끼는 진동을 알려 줬다.
“여기서 바닥이 울립니다.”
“이쪽엔 유리판이 없어요.”
“그럼 저주가 거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들은 악보실 문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쪽 벽에 걸린 낡은 초연 포스터가 흔들렸다. 포스터 속 합창단은 모두 그림자처럼 검게 칠해져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이엘은 지워진 자리 앞에서 멈췄다. 손끝으로 포스터를 건드리지 않고, 나린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분이 왜 사라졌는지 알고 싶어요.”
“알아볼게요.” 나린이 말했다.
“제가 직접요.”
“네. 원본 기록은 이엘 씨도 볼 수 있게 요청할게요.”
로에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은 악보실에서 시작하죠.”
나린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대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싶어요?”
“제가 듣지 못하는 쪽의 소리도 빠지지 않는 음악이요.”
“그걸 만들 수 있을까요?”
“아직 모릅니다. 단원들에게 물어봐야겠어요.”
그는 악보에 새 표시를 더했다. 악단의 목소리를 한 줄로 묶는 대신, 각자의 소리가 들어오는 방향을 열어 두었다. 나린은 거울판을 가린 천의 끝을 고정했다. 천이 흔들리며 그림자의 윤곽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저는 당신이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린이 말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으니 놓친 음을 제 방식대로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게 단원들 소리를 지울 수 있겠네요.”
“그래서 물어보려고요.” 로에는 악보를 그녀에게 건넸다. “어느 박자가 안전하게 멈출 수 있는지 함께 정해 주세요.”
나린은 악보에 붉은 표식을 세 개 그렸다. 둘은 같은 음악을 듣지 않았지만, 멈추는 시점은 같이 정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관객석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엘이 말했다.
나린은 붉은 비상등을 켰다. “그럼 관객이 오기 전에 객석의 음향 경로를 차단해야 해요.”
밖에서는 초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리허설은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그림자는 관객의 첫 대답을 이미 한 번 배웠고, 다음에는 두 번 따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