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내 목소리를 훔친 그림자가 구애한다1화

내 목소리를 훔친 그림자가 구애한다

내 목소리를 훔친 그림자가 구애한다

AD
스폰서 광고

1화: 목소리를 훔치는 무대

나린은 무대 바닥에 분필로 열두 개의 흰 원을 그렸다. 합창단이 원 안에 들어가면 서로의 그림자가 겹치지 않는 위치였다. 세 번째 원 앞에는 붉은 선을 긋고, 그 뒤로는 누구도 가지 말라고 표시했다.

“오늘부터 여기까지만 움직여요.”

성악가 이엘은 붉은 선 앞에서 멈췄다. “초연 때는 무대 중앙으로 들어가야 해요.”

“거울천을 걷기 전까지는요.”

“그럼 장면 전환이 달라지잖아요.”

“안전 확인이 끝나면 다시 조정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림자가 당신 목소리를 세 번 따라 했어요.”

극장장 라비안은 객석에서 손목시계를 봤다. “리허설 중단이 벌써 한 시간입니다. 저주에 대해 공식 보고가 없고, 목소리 문제도 피로로 설명할 수 있어요.”

“피로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원인이 피로라는 뜻이 아니에요.” 나린이 말했다.

“왕립극장 초연에선 단원이 무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무대 지시보다 안전 중단이 먼저예요.”

나린은 대극장 무대 뒤편의 검은 거울천을 바라봤다. 천 표면은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처리되어 있었지만, 바로 앞에 서면 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천 뒤에는 좁은 음향 통로가 이어졌고, 옛 합창단의 반주 장치가 남아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누구도 거울천을 만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표면에는 손바닥 자국이 세 개 찍혀 있었다.

“누가 닿았죠?” 나린이 물었다.

“아무도 안 만졌습니다.” 라비안이 말했다. “어젯밤 장막팀이 정리했지만, 손댔으면 기록했겠죠.”

“기록이 없다고 일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음악감독 로에가 악보를 들고 무대 계단을 올라왔다. 그는 은빛 보청 장치를 왼쪽 귀에 고정하고 있었다. 오른쪽 귀는 저주가 남긴 청력 손실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객석에서 나는 소리 대신 단원들의 입 모양과 발걸음을 먼저 살폈다.

“어떤 음을 놓쳤습니까?” 나린이 물었다.

“낮은 화음은 들었습니다. 그 뒤에 이엘 씨가 대사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듣지 못했어요.”

“대사를 하지 않았어요.” 이엘이 말했다. “그림자가 제 목소리로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로에는 그녀의 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악보에도 대본에도 없습니다.”

“그럼 왜 따라 했죠?” 라비안이 말했다.

“그림자가 말한 이유는 아직 몰라요.” 나린은 단원들의 이름과 발화 순서를 적었다. “모방을 들은 사람은 손을 들어 주세요. 목소리를 잃거나 목이 잠긴 사람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말하기 어렵다면 손짓으로 알려 주세요.”

이엘은 손을 들지 않았다. 목소리가 아직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목 앞에서 멈췄다가 내려갔다.

“괜찮습니까?” 로에가 물었다.

“제가 대답하고 싶을 때 물어봐 주세요. 괜찮은지 먼저 결정하지 말고요.”

로에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악보를 뒤집어 빈 면에 새 신호를 그렸다. 두 손을 어깨 높이에 올리면 공연 정지, 한 손을 가슴에 두면 개별 단원의 확인 요청. 말소리가 없어도 전달될 수 있도록 등불 색도 바꾸기로 했다. 나린은 붉은 선을 따라 작은 조명 세 개를 배치했다.

“이런 신호를 쓰면 초연 대본을 바꿔야 합니다.” 라비안이 말했다.

“대본을 바꾸면 되죠.” 나린이 답했다.

“후원자들은 원작의 합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단원들이 사라질 위험을 감수하라고 기대한 건 아니겠죠.”

라비안은 아무 말 없이 객석으로 돌아갔다. 그는 공연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저주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보고서에 남기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린은 그가 가져온 일정표의 한 귀퉁이를 찢어 거울천에 붙였다. 접촉을 막는 임시 표지였다.

“잠깐만요.” 로에가 말했다. “이엘 씨가 서 있던 위치와 그림자가 나타난 위치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다시 재현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나린이 물었다.

“아니요. 지금은 무대에 돌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이엘을 보지 않고 나린에게 답했다. “기억하는 소리의 방향만 알려 주세요. 제가 듣지 못하는 쪽이라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엘은 잠시 생각했다. “제 왼쪽 뒤였어요. 관객석에서는 안 들렸습니다.”

로에는 악보 위에 방향을 표시했다. “그럼 거울천 뒤의 음향 통로에서 나왔을 수 있겠네요.”

“그 통로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비안이 말했다.

“문이 잠겨 있었나요?”

“네.”

나린은 열쇠 기록을 요구했다. 관리인은 문을 잠그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셋이라고 했다. 라비안, 음향 기사, 무대감독인 나린. 그녀는 자기 열쇠를 보여 줬다. 번호가 붙어 있고 봉인도 온전했다. 라비안은 자기가 어제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지만, 열쇠를 직접 내놓지는 않았다.

“저도 열쇠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린이 말했다.

“제 개인 물건입니다.”

“그 통로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공연과 관련된 조사예요.”

“저는 극장장입니다.”

“그래서 안전을 설명할 책임도 있어요.”

라비안은 한숨을 쉬며 열쇠고리를 내려놓았다. 봉인은 뜯기지 않았다. 열쇠 자체도 손상되지 않았지만, 고리에 검은 실이 감겨 있었다. 거울천에서 떨어진 실인지 확인하려면 재료 검사가 필요했다. 나린은 그것을 증거 봉투에 넣고, 라비안에게 확인 서명을 받았다.

그때 무대 조명이 꺼졌다. 비상등이 켜지기까지 두 초가 걸렸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그런데 검은 천 앞쪽에 사람 그림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무대에 있는 단원은 일곱 명뿐이었지만, 그림자는 열 명이 넘었다. 그들이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세 번의 목소리가 이엘의 음성으로 겹쳤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로에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지만, 단원들이 움찔하는 걸 보고 손을 들었다. 정지 신호였다. 나린은 조명 담당에게 무대 뒤 조명을 켜라고 손짓했다.

빛이 돌아오자 그림자들은 거울천 안으로 사라졌다. 이엘의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목을 만지고, 눈을 감았다.

“이엘 씨.” 나린이 부르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린은 더 묻지 않았다.

로에는 청각 신호판을 들어 보였다. ‘목소리 확인은 손으로 답해도 됩니다.’ 이엘은 엄지를 들었다.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가 안전하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질문을 더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라비안은 공연 중단을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대신 객석의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 “저주가 밖으로 퍼질 수 있습니다. 모두 대극장 안에서 대기하세요.”

“문을 잠그면 대피할 수 없어요.” 나린이 말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가두는 건 안전 조치가 아니에요.”

로에는 한쪽 귀를 가리고 무대 아래에서 울리는 저주파를 들었다. 그는 소리의 방향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탓에 균형을 잃고 난간에 부딪혔다. 나린은 그의 팔을 잡기 전에 물었다.

“부축해도 될까요?”

“네. 왼쪽으로요.”

그녀는 그의 왼쪽에 서서 팔꿈치를 잡았다. “거울천 뒤에 소리가 남아 있어요?”

“아니요. 무대 바닥 아래쪽에서 진동합니다. 제게 들리지 않는 쪽으로도요.”

그는 자신의 한계를 숨기지 않았다. 나린은 그 말에 맞춰 바닥에 분필선을 그었다. 진동이 가장 강한 위치는 거울천 앞이 아니라 무대 중앙이었다. 무대 밑에는 오래된 악기실이 있었다.

“저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녀가 라비안에게 물었다.

“반주 장치와 음향 배선입니다.”

“열쇠는요?”

“보관실에 있습니다.”

“그럼 지금 엽시다.”

라비안은 거절하려다, 이엘의 입술에서 피가 맺힌 걸 봤다. 그녀는 말하려다 혀를 깨문 것 같았다. 그는 열쇠를 내놓았다.

조명 담당 수아가 객석 쪽 문을 두드렸다. “대피 신호가 안 들려요. 저 문을 열어도 됩니까?”

라비안은 자동으로 “잠깐 기다려”라고 답하려 했다. 나린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누군가 같은 말을 그림자로부터 들으면 실제 지시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아에게 초록 손전등을 비추고, 문을 열되 한 명씩 이동하라고 표시했다. 수아는 신호를 확인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린 뒤에도 합창은 따라오지 않았다. 말이 아니라 빛과 몸짓으로 전달한 첫 지시였다.

무대 아래 문은 녹슬어 바로 열리지 않았다. 나린은 열쇠를 돌리고 로에는 문을 밀었다. 문틈에서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합창 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보에는 없는 여자 목소리였다. 그것은 나린의 목소리로 “내가 지킬게”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문장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는 듯, 낮게 웃었다.

로에는 나린을 바라봤다. “그 목소리가 당신 말을 따라 했습니까?”

“아니요.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했어요.”

“그럼 누구의 말인지 아직 알 수 없네요.”

“맞아요.”

그녀는 문을 다시 닫지 않았다. 공연을 멈추면 저주가 밖으로 번질지, 계속하면 단원이 더 사라질지 아직 몰랐다. 다만 이 무대는 더 이상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린은 분필로 악기실 문 앞에 붉은 선을 그었다.

“오늘 리허설은 끝입니다. 누구도 혼자 남지 마세요.”

로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단원에게 손짓으로 반복했다. 이엘은 목소리를 잃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천 안쪽에서 누군가 낮게 따라 했다.

“혼자 남지 마.”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