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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으로 전함을 삼키다1화

나노머신으로 전함을 삼키다

나노머신으로 전함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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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모래 폭풍 속의 검은 상자

[잔여 배터리: 21.4%]
[목표 수집량: 15.0kg / 현재 수집량: 11.2kg]
[부족분: 3.8kg (가공용 구리 도체 또는 유효 복합 합금)]

황색 모래가 광학 렌즈 표면을 맹렬하게 긁어댔다.
오른쪽 렌즈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균열 틈새로 미세한 석영 분진이 스며들어 시야 가장자리가 뿌옇게 번졌다.
이온은 고개를 30도 숙였다.
노란색 도장이 벗겨진 둥근 머리통 위로 묵직한 돌개바람이 부딪쳐 쇳소리를 냈다.

네레이드 남부의 ‘마른 강’ 평원은 언제나 이랬다.
대기 정화망이 무너진 지 87년이 지난 지금 행성의 하늘은 잿빛이었고 메마른 강바닥에는 고철 뼈대만 뒹굴었다.
이온의 내부 타이머가 짧은 전자음을 뱉었다.

[경고: 사막 폭풍 경보 2단계 발령]
[정착지 방벽 폐쇄까지 남은 시간: 42분]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오늘 할당된 15킬로그램을 채우지 못하면 선별소의 계측관은 충전 배급을 절반으로 깎을 터였다.
전력 삭감은 곧 다음 날 수색 반경의 축소를 의미했다.
수색 반경이 줄어들면 더 질 낮은 고철만 줍게 되고 결국 정착지 외곽의 고철 무덤에 폐기 처분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온은 폐지 수집 로봇이었다.
12년 전 표준형 청소 및 자원 회수기로 출고된 이후 몸체의 수많은 관절은 용접 덧댐으로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이온에게 교체 불가능한 자아 따위는 없었다.
그저 매일 배터리가 0퍼센트가 되기 전에 충전소로 돌아오는 것이 최우선 명령이었다.

찌르르.
내장된 금속 탐지 코일이 낮게 진동했다.
이온은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 렌즈의 초점을 조절했다.
모래 언덕 사이에 45도 각도로 처박힌 거대한 강철 장갑판이 보였다.
반세기 전 대붕괴 당시에 운용되던 군용 병력 수송 차량의 측면 장갑이었다.

"유효 질량 반응 확인."

이온의 음성 스피커에서 버석거리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바람이 점점 거세져 지표면의 모래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온은 바퀴 대신 달린 굵은 고무 무한궤도를 천천히 굴려 수송 차량 잔해의 하부로 기어들어 갔다.

끼이익.
뒤틀린 프레임이 바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차량 내부는 모래와 녹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부서진 좌석 사이로 구형 유압 실린더와 끊어진 배선 뭉치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이온은 왼팔의 유압 집게를 뻗어 굵은 전력 케이블을 움켜쥐었다.
손목 안쪽의 회전 커터가 빠르게 돌며 피복을 갈라냈다.

치익.
[구리 심선 1.1kg 확보. 적재함 수납 완료.]

아직 2.7킬로그램이 부족했다.
이온은 더 깊은 격벽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센서가 바닥 철판 밑에서 둔탁한 질량 반응을 하나 더 감지했다.
일반적인 알루미늄이나 강철 파편과는 다른 밀도였다.
신호의 감도가 너무 높아 탐지기 계측 바늘이 순간적으로 끝까지 치솟았다.

"비표준 합금 신호."

이온은 몸을 웅크려 좁은 틈으로 기어들어 갔다.
차량 엔진룸과 탑승 격실을 나누는 방화벽 하단에 무언가 끼어 있었다.
모래에 반쯤 묻힌 작은 상자였다.

이온은 집게손가락으로 주변의 굳은 흙을 긁어냈다.
상자의 크기는 가로세로 15센티미터 남짓한 정육면체였다.
겉면에는 나사못 구멍도 용접 자국도 없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흑색 표면은 외부의 거센 모래 분진 속에서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채 빛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물체 분석 불가: 표면 반사율 0.01%]
[재질 불명: 분광 데이터 없음]
[추정 질량: 4.2kg]

부피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손바닥만 한 상자가 4킬로그램이 넘는다면 내부에 초고밀도 금속이 차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 하나만 챙겨도 오늘의 할당량은 단숨에 채워진다.

이온은 집게로 상자의 모서리를 단단히 물었다.
그 순간 차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콰르릉!
외부에서 몰아친 돌풍이 수송차의 상부 장갑을 때렸다.
천장을 지탱하던 녹슨 기둥 하나가 우지끈 꺾이며 무너져 내렸다.
무거운 강철 빔이 이온의 둥근 어깨 위로 쏟아졌다.

쿵!
[외부 충격 감지: 좌측 구동축 압력 180bar 상승]
[경고: 프레임 비틀림 허용 한계 도달]

이온은 궤도를 뒤로 물리려 했으나 무너진 잔해가 등 뒤를 막았다.
상자를 물고 있는 집게를 놓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온의 연산 장치는 다른 결론을 도출했다.

'상자를 포기할 경우: 오늘 할당량 미달. 잔여 배터리 18%로 야간 추가 수색 불가. 내일 기능 정지 확률 84%.'
'상자를 회수할 경우: 할당량 초과 달성. 긴급 탈출 시 모터 출력 과부하 12초 필요.'

이온은 고민하지 않았다.
오른팔의 보조 지지대를 바닥에 박아 넣고 유압 모터의 출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치이익!
고무 패킹 틈새로 뜨거운 유압 오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집게가 상자를 틈새에서 억지로 뜯어냈다.
상자가 격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손바닥을 통해 찌릿한 미세 전류가 이온의 메인 버스로 흘러들었다.

찌르르.
[내부 전압 미세 변동: +0.02V]
[식별 코드 없는 유도 기전력 감지]

상자가 등 뒤의 적재함 안으로 털컥 들어갔다.
이온은 무너진 빔 아래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수송차 밖으로 굴러 나왔다.
그 직후 차량 잔해는 완전히 주저앉으며 모래먼지 속에 파묻혔다.

폭풍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하늘은 온통 붉은빛이 감도는 흙먼지로 뒤덮였고 가시거리는 5미터를 넘지 못했다.
이온은 적재함 덮개를 굳게 잠그고 마른 강 정착지를 향해 궤도를 굴렸다.

끼익, 삐걱.
오른쪽 궤도 링크에 모래가 끼어 불쾌한 마찰음이 났다.
배터리 잔량 표시는 14퍼센트로 떨어졌다.
정착지 외곽 경계선까지는 2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그때 전방 20미터 지점의 모래 언덕 위에서 붉은 불빛 두 개가 번뜩였다.
바람 소리를 뚫고 쇳조각이 맞물려 돌아가는 특유의 회전음이 들려왔다.

채르륵, 채르륵.
낮은 자세로 모래를 긁으며 이동하는 네 발 달린 기계의 윤곽이 드러났다.
등 뒤에 녹슨 원형 톱날을 달고 다니는 소형 기계 괴수였다.
대붕괴 이전 자재 절단용으로 쓰이던 건설 로봇이 환경에 적응해 야생화한 개체였다.

이온은 즉각 무한궤도의 구동을 멈추고 엔진 출력을 최소치로 낮췄다.
작업용 로봇인 이온에게는 저 괴수의 장갑을 뚫을 무기가 없었다.
오른쪽 광학 렌즈의 불빛을 완전히 끄고 바닥의 모래더미 속에 몸을 최대한 묻었다.

톱날 짐승은 붉은 탐색 렌즈를 좌우로 돌리며 냄새를 맡듯 대기를 스캔했다.
톱날이 헛돌며 흩뿌리는 모래가 이온의 이마 장갑을 탁탁 때렸다.
괴수의 탐색 렌즈가 이온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온의 코어는 발열을 억제하기 위해 내부 환풍 팬마저 멈추고 침묵했다.

[잔여 배터리: 11.8%]
[내부 온도 상승: 54도]

괴수는 이온을 그저 굴러다니는 오래된 고철 더미로 판단했는지 방향을 틀어 남쪽 협곡으로 사라졌다.
원형 톱의 찌르는 듯한 소음이 바람 속에 완전히 묻힌 뒤에야 이온은 다시 팬을 돌렸다.

"위협 요소 이탈 확인. 이동 재개."

이온은 모래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이었다.
배터리는 9퍼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른 강 정착지는 높이 6미터의 폐컨테이너를 이어 붙여 만든 방벽 도시였다.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막기 위해 굳게 닫히던 육중한 철문 틈새로 이온이 간신히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자마자 거친 바람 소리가 한풀 꺾였다.

정착지 내부는 기름 냄새와 석탄 매연으로 가득했다.
골목 양옆에는 녹슨 함석판으로 지은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남루한 옷차림의 생존자들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온은 곧장 제3선별 계측소로 향했다.
계측소 앞에는 거대한 저울과 파쇄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기름때 묻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계측관이 이온의 낡은 번호판을 흘겨보았다.

"이온-402. 오늘도 간당간당하게 왔군. 쏟아 봐."

이온은 적재함을 열기 전 내부 분리 차단막을 작동시켰다.
하단 비밀 보관함에 흑색 육면체를 격리하고 상단에 실어 온 구리 케이블과 수송차 장갑 조각만을 저울 위에 쏟아냈다.

철컥.
저울의 붉은 디지털 눈금이 멈추었다.

[계측 중량: 15.2kg]
[유효 성분: 동선 1.1kg, 탄소강 파편 14.1kg]

"합격이다. 규정치 15킬로그램 달성. 표준 충전 토큰 1개 지급."

계측관이 무심하게 낡은 황동 토큰 하나를 저울 옆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이온은 집게손으로 토큰을 집어 가슴팍의 수납 슬롯에 밀어 넣었다.
이것으로 내일 하루치의 기본 동력은 확보되었다.

"이온!"

선별장 뒤편 정비 구역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커다란 방진 고글을 얹은 소녀가 공구 가방을 둘러멘 채 뛰어왔다.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 끝에 기름 먼지가 묻어 있었고 뺨에는 그을음이 번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견습 정비사 한민아였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폭풍 경보 울린 지가 언젠데!"

민아는 이온의 앞에 멈춰 서서 양손을 허리에 얹고 쏘아붙였다.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눈동자는 이온의 온몸 구석구석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수송차 하부에서 구리 도체를 분리하는 데 연산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거 봐, 내가 남쪽 폐허는 위험하다고 가지 말랬잖아. 어깨 장갑은 또 왜 이 꼴이야? 찌그러졌잖아."

민아가 주머니에서 낡은 드라이버를 꺼내 찌그러진 어깨 틈새를 툭툭 건드렸다.
그 손잡이는 손때가 묻어 닳고 닳은 구형 군용 복합수지 재질이었다.
민아의 아버지가 남겨주었다는 유일한 유품이었다.

"단순 외판 변형입니다. 내부 프레임의 응력 분산은 정상 범위입니다."

"정상은 무슨. 궤도에도 모래 다 꼈네. 이리 와, 털어줄 테니까."

민아는 이온을 자신의 작은 야외 작업대로 이끌었다.
에어 컴프레셔의 호스를 들어 궤도 사이에 낀 거친 모래를 강한 공기압으로 불어내기 시작했다.
푸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황색 먼지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오른쪽 눈, 렌즈 금 더 갔지? 내가 지난번부터 말했잖아. 조심하라고."

민아가 고글을 고쳐 쓰며 이온의 깨진 오른쪽 광학 렌즈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졌다.
이온의 내부 센서에 민아의 체온이 미세하게 감지되었다.

"선별장에 들어오는 정찰 드론 잔해를 계속 보고 있어. 규격 맞는 렌즈 나오면 내가 제일 먼저 빼둘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알았지?"

"렌즈 교체에 필요한 추가 크레딧은 없습니다."

"누가 너한테 돈 내래? 너 고장 나서 멈추면 내 공구 가방은 누가 들어주는데? 바보 로봇."

민아는 툴툴거리며 이온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가볍게 통 쳤다.
이온은 그 충격을 '친밀도 표현 프로토콜'로 분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보존에 감사드립니다."

"됐어. 배터리 5퍼센트도 안 남았잖아. 얼른 3번 충전소로 가서 토큰 넣고 자. 내일 아침에 일찍 깨울 거야."

민아가 손을 흔들며 정비소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이온은 민아의 뒷모습이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가 공용 충전 베이로 향했다.


밤의 정착지는 조용했다.
발전기 엔진이 덜덜거리는 저주파 진동만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충전 베이의 케이블을 목 뒤의 접속구에 꽂자 미약한 전력이 회로를 타고 흘러들었다.
충전 효율은 40퍼센트 남짓에 불과한 저급 교류 전력이었지만 방전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이온은 배터리 충전 모드를 켜고 기본 센서를 절전 상태로 전환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시스템이 대기 모드로 가라앉으려는 찰나였다.

지이잉.
등 뒤의 하부 수납함 깊숙한 곳에서 기묘한 공진음이 울렸다.
이온의 시스템 경보기가 깜빡였다.

[경고: 보조 수납함 내부 온도 3도 상승]
[미지의 유도 전류가 메인 전력선에 바이패스 연결됨]

이온은 수납함 덮개를 열었다.
어두운 함내에서 낮에 주워 온 검은 육면체가 은은한 청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모래알보다 작은 극미세 입자들이 상자 표면을 타고 흐르며 내는 빛이었다.

상자의 표면이 액체처럼 일렁이더니 얇은 검은색 돌기 하나가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돌기는 공기를 가르고 다가와 이온의 오른쪽 가슴 장갑 틈새, 메인 데이터 케이블이 지나는 통로에 정확히 달라붙었다.

치직!
이온의 시야 전체에 붉은색 오류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외부 장치 강제 페어링 감지]
[기종 식별 중: 산업용 자원 회수 유닛 '이온-402']
[하드웨어 상태: 동력계 노후화, 프레임 손상률 34%, 광학 렌즈 파손]
[진단: 수확 작업 지속 불가. 극심한 부품 부족 상태.]

이온의 연산 장치는 이 낯선 신호를 거부하려 명령어를 보냈다.
하지만 검은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데이터는 이온의 방화벽을 종이처럼 뚫고 들어왔다.

[단말 적합도 판정: 유효]
[임시 관리자 권한 부여]
[키메라 코어 시스템: 대기 모드 해제]

상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미립자들이 이온의 가슴 장갑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온의 깨진 광학 렌즈 너머로 차가운 시스템 문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변 가용 재료 스캔 준비.]
[첫 번째 수리 및 재구성 시퀀스를 요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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