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정원 관리인의 오후

2화: 도면 밖의 물길
예린은 옛 도면의 출처를 확인했다. 파일은 건물 관리사무소의 오래된 서버에서 복구되었고, 수정일은 6년 전이었다. 작성자 이름은 없었다. 도면만으로 배수관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예린은 시설 책임자에게 현장 점검을 요청하고, 만식과 김 사장에게도 확인된 사실만 공유했다.
“배수관이 지하로 이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도면은 과거 계획일 수 있어요.”
김 사장은 자기 합의서 사본을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문서에는 가게 이름과 개인 정보가 남아 있었다. 그는 공개를 원치 않았다.
“합의서 전체를 주실 필요는 없어요. 침수 시각과 수리 내역만 가리고 복사해도 됩니다. 아니면 점검팀에 보여 주고, 필요한 내용을 구두로 알려 줄 수 있어요.”
“그 기록이 공개되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겠죠?”
“그럴 수 있습니다. 공개 범위와 사용 목적을 먼저 정해야 해요.”
김 사장은 사본을 집으로 가져갔다. 만식은 그가 편한 방식으로 결정하도록 기다리자고 했다. 예린은 고인 물의 수위와 펌프 작동 시간을 기록했다. 배수 점검이 끝날 때까지 다온의 토마토는 안전 구역에 두었다. 아이는 매일 물을 주려고 했지만, 흙이 아직 젖어 있어 만식은 기다리라고 했다.
“물을 안 주면 시들지 않을까요?”
“뿌리가 아직 젖어 있어. 오늘은 물을 더 주면 안 돼.”
“그럼 저는 뭘 해야 해요?”
“잎 색과 흙 상태를 기록해. 돌봄은 물을 주는 것만이 아니야.”
다온은 관찰 노트에 날짜와 잎의 개수를 적었다. 예린은 기록에 온도와 빛의 시간도 추가하자고 했다. 아이는 과학 과제에 쓸 자료가 늘어난다며 좋아했다. 만식은 정원이 닫혀 있어도 돌봄은 계속될 수 있다고 느꼈다.
점검팀은 옥상 덮개를 열기 전에 안전 장비를 설치했다. 배수관은 예상보다 깊었고, 일부가 흙과 뿌리로 막혀 있었다. 물은 오래된 우회관 쪽으로 빠졌고, 그 관은 지하 상가의 천장 배관과 가까이 지나갔다. 직접 연결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대로 화단을 유지하면 위험합니까?” 만식이 물었다.
“배수관을 수리하고 방수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화분을 원래 위치에 둘 수 없습니다.” 시설 책임자가 말했다. “하지만 모두 철거할 필요가 있는지는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관리회사는 전면 철거가 가장 빠르다고 주장했다. 예린은 임시 폐쇄와 부분 이동을 제안했다. 위험 구역의 화분을 옮기고, 배수와 방수 공사 뒤에 안전 기준을 충족한 위치만 다시 열자는 안이었다. 만식은 정원의 크기가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식물이 다 남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가 다온에게 말했다.
“그럼 뭘 옮겨요?”
“먼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과, 새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것부터 확인하자.”
다온은 자기 토마토를 꼭 지키고 싶다고 했다. 만식은 아이의 화분을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식물도 각각 주인에게 의사를 물어야 했다. 정원의 입주자 명단에는 관리가 중단된 화분도 여럿 있었다. 만식은 소유자를 찾아 연락했다. 몇 명은 식물을 가져가고, 몇 명은 다른 화단에 옮겨 달라고 했으며, 한 사람은 폐기를 요청했다.
그날 저녁 김 사장은 합의서 사본을 가져왔다. 개인 정보와 가게 이름은 모두 가려 놓았다. 합의서에는 지하 상가의 침수 피해가 기록돼 있었지만, 원인에 관한 책임 인정은 없었다. 김 사장은 보상금을 받고 문제 제기를 끝낸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이걸 점검팀에 보여 주는 건 괜찮습니다. 다른 곳에 공개하지 마세요.”
예린은 사용 범위 확인서를 작성했다. 사본은 시설 점검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보고서에는 개인과 점포가 식별되지 않도록 요약한다. 김 사장은 내용을 읽고 서명했다. 예린은 문서를 봉투에 넣어 점검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만식은 자신의 수첩을 들고 오래된 공사 사진을 찾았다. 그는 당시 화단의 배수 방향을 찍은 사진을 갖고 있었다. 사진에는 공사 인부의 얼굴과 차량 번호가 보였다. 공개하면 안 되는 정보였다. 그는 사진을 보여 주기 전 얼굴을 가리고, 날짜와 구조만 보이도록 복사했다.
“그때 관리회사는 저에게 정원 물길이 바뀌었다고만 했어요.”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하세요?” 예린이 물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문서를 찾아야 해.”
“그럼 기억은 진술로만 남기고, 확인 자료와 구분할게요.”
예린은 만식의 말을 회의 기록에 추정으로 표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서운해했지만, 자신의 기억이 사실처럼 쓰이면 다른 사람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확인되지 않은 말을 사실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점검팀은 배수관의 일부를 교체하고 방수층을 검사했다. 침수 피해가 옥상 배수관과 직접 연결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우회관 설계가 도면과 다르게 시공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관리회사는 옛 시공 업체에 자료를 요청하고, 정원 철거 결정을 보류했다.
그날 밤 옥상에서 다온은 자기 토마토의 잎 하나가 노랗게 변했다고 말했다. 만식은 물을 주지 말고 잎의 상태를 관찰하자고 했다. 아이는 “좋아질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약속은 못 해.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확인할게.”
다온은 그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잎의 색과 흙의 습도를 기록했다. 작은 정원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세 사람은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며칠 뒤 시공 업체의 기록이 도착했다. 배수관 변경 요청서에는 만식의 서명이 있었다. 그는 그런 서명을 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예린은 서류의 날짜와 만식의 옛 근무 기록을 비교했다. 서명 당시 그는 해당 공사 현장에 없었다.
그때 관리회사의 담당자가 만식에게 말했다. “이 서명 때문에 당시 침수 문제는 사용자 책임으로 처리됐습니다.”
만식은 수첩을 내려놓았다. 정원을 지키려고 시작한 확인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오래된 책임으로 이어졌다.
관리회사의 담당자는 화단을 먼저 철거하면 배수 점검이 쉬워진다고 제안했다. 그는 정원을 빨리 비우면 입주자 불만도 줄어들 거라고 했다. 예린은 배수관을 확인할 최소 구역만 옮기고 나머지는 안전 검사 뒤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도면 위에서 작업 범위를 나누었다. 화단 전체를 밀어내면 식물 손실이 크고, 일부만 옮기면 점검 시간이 늘어났다.
만식은 주민들에게 화분 이동에 동의하는지 하나씩 물었다. 몇 사람은 점검을 위해 옮겨 달라고 했고, 한 사람은 자신이 직접 가져가겠다고 했다. 만식은 소유자 동의를 받아 이동 목록을 만들었다. 주민들은 자신이 원하는 화분을 남길 수 있었지만, 안전 구역 안에 자리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제한된 공간을 모두에게 약속할 수는 없었다.
다온은 자기 토마토를 가장 먼저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만식은 아이의 화분을 우선 처리하기보다, 위험 구역의 모든 화분을 같은 순서로 이동하자고 했다. 다온은 서운해했지만, 다른 사람의 화분도 위험하다는 설명을 듣고 도왔다. 그는 작은 식물 표식을 만들며 각 주인의 이름과 이동 날짜를 적었다.
점검팀이 오래된 배수관을 열었을 때, 내부에는 흙과 뿌리가 엉켜 있었다. 물은 좁은 우회관으로 흘렀지만 그 끝이 어디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예린은 배수관 내부 카메라를 넣고 영상을 저장했다. 영상에는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바꾸는 연결부가 찍혔다. 현재 도면과 달랐다.
“그럼 지하 상가 쪽으로 연결된 걸 수도 있겠네요.” 만식이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연결부 뒤를 더 확인해야 해요.”
관리회사는 즉시 수리비를 쓰기 어렵다고 했다. 예린은 긴급 안전 조치와 원인 조사 비용을 분리해 요청했다. 침수와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배수관 막힘은 옥상 구조에 위험을 줄 수 있었다. 그녀는 문제를 과장하지 않고 점검 결과에 필요한 조치만 적었다.
김 사장은 합의서 사본을 내놓기 전 변호사에게 문의했다. 개인 정보가 지워진 자료라도 공개하면 불리할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 그는 전체 공개를 거절하고, 점검팀에게 현장에서 보여 주는 방식만 허락했다. 예린은 그 범위를 존중해 문서를 복사하지 않았다. 필요한 날짜와 수리 내용을 본 뒤, 김 사장에게 기록 요약을 확인받았다.
만식은 그가 협조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 요구하지 않았다. 정원을 지키는 목적과 김 사장의 사생활은 함께 고려되어야 했다. 그는 옛 공사 사진도 다시 확인해, 얼굴과 차량 번호가 보이지 않는 구도만 남겼다. 관리실은 안전 점검과 무관한 사진을 보고서에서 제외했다.
정원이 폐쇄된 상태가 길어지자 입주자들은 관리비 감면을 요구했다. 관리회사는 공용 공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른 휴게 공간을 마련했다. 예린은 임시 공간이 옥상보다 좁아도 출입이 편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몇몇 직원은 식물 없는 공간이 삭막하다고 했지만, 만식은 안전 점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배수업체가 시험용 물을 흘려보내자 관리실 바닥의 투명 호스가 천천히 부풀었다. 예린은 휴대전화 초시계를 켜고 물이 빠지는 시간을 쟀다. 만식은 물길이 꺾이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려다 장갑을 낀 채 멈췄다. 조사 중인 설비에 손을 대면 흔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한 것이다.
“예전에는 제가 막힌 흙을 바로 걷어냈어요.”
“그래서 원인을 찾기 어려웠을 수도 있어요.” 예린은 탓하는 어조를 피했다. “이번엔 우리가 기다린 기록도 남길게요.”
만식은 초시계 화면을 함께 보았다. 숫자가 멈추자 그는 결과를 먼저 적지 않고, 물이 흐르는 소리와 호스가 흔들린 방향부터 말로 남겼다. 예린은 그 관찰을 점검 기록의 별도 칸에 옮겼다.
점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만식은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화분 주인들에게 이동한 위치와 상태를 알리고, 물 주기 여부를 각각 확인했다. 같은 처방을 모든 식물에 적용하지 않았다.
우석이 아니라 예린은 관리실에 점검 진행 상황을 알렸다.
다온은 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는 입주자에게 안내문을 전달했다.
그 뒤에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