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정원 관리인의 오후

3화: 화단을 다시 나누는 날
예린은 배수관 변경 요청서의 원본을 확인했다. 서명은 만식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지만 필체가 달랐다. 문서에는 정원 관리자가 현장 변경에 동의했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관리 책임자는 만식이 아니었다. 그는 1년 뒤 옥상정원 관리를 맡았다.
“이름이 같다고 제가 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만식이 말했다.
“네. 서명 진위와 문서 작성 경위를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예린은 관리회사의 문서 보존 담당자에게 원본 제출과 필적 확인을 요청했다. 만식은 그 서명을 자신의 서명과 비교할 자료로 오래된 근무 기록을 내놓았다. 그는 서류를 공개하는 데 동의했지만, 개인 기록을 건물 입주자 전체에게 배포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김 사장은 합의서 사본의 사용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그는 침수 피해 자체는 공공 점검 보고서에 익명으로 넣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가게가 공개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예린은 보고서 초안에 개인과 점포가 식별될 수 있는 날짜와 세부 위치를 줄였다. 김 사장은 수정본을 읽고 동의했다.
“이런 식으로 기록하면 책임이 흐려지지 않나요?” 만식이 물었다.
“개인 이름을 공개하지 않아도 공사 책임과 절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서명했는지 확인하는 건 공식 조사에서 할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바뀌는 것도 있지.”
“그렇지만 동의한 범위를 넘어 공개하면 김 사장님이 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어요.”
만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을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사연을 이용할 권리를 주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공식 조사에 제출하고,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공개 발언을 하지 않기로 했다.
건물 관리회사는 조사 기간 동안 정원을 부분 개방하는 안을 냈다. 위험 구역은 접근을 막고, 화분은 구조 하중이 낮은 구역으로 옮긴다. 배수 공사는 관리회사 비용으로 진행하고, 정원은 입주자들이 공동 관리한다. 만식은 조건을 읽고 동의했다. 다온의 토마토는 햇빛이 드는 안전 구역으로 옮겼다.
“이제 물을 줘도 돼요?”
“흙이 어느 정도 말랐는지 먼저 확인해.”
다온은 나무 막대를 꽂아 흙을 확인했다. 아래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물을 주지 않고 기록만 했다. 아이는 잎이 노랗게 변한 원인을 하나로 정하지 않았다. 배수 문제, 햇빛, 물 주기, 추운 밤. 여러 가능성을 정리하고 하나씩 확인했다.
수리 뒤 옥상 배수는 정상적으로 흘렀지만, 과거 침수 피해의 원인이 확정된 건 아니었다. 공사 요청서의 필체 분석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 사이 관리회사는 입주자 회의를 열었다. 만식은 정원에 남길 화분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자고 제안했다. 먼저 각 식물 주인에게 의사를 묻고, 관리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자고 했다.
“사람이 바뀌면 화분도 버려지나요?” 다온이 물었다.
“그 사람에게 먼저 물어봐야지. 맡을 사람이 없으면 다른 곳을 찾고.”
입주자들은 화분을 집으로 가져가거나, 공동 정원에 맡기거나, 폐기를 요청했다. 만식은 남은 화분을 관리 기록에 따라 나눴다. 정원에는 예전보다 적은 식물만 남았다. 대신 통로가 넓어지고 배수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예린은 빌딩 시설 점검표에 옥상 배수 확인을 추가했다. 비가 많이 온 뒤에는 물 고임을 사진으로 남기고, 점검한 사람이 이름을 기록한다. 만식은 정원 관리자로서 화분 위치와 무게를 기록했다. 다온은 학교 과제에 옥상 정원의 배수 변화와 식물 상태를 정리했다. 아이는 잎이 다시 푸르게 변했다고 보고했지만, 열매가 열릴지는 아직 몰랐다.
점검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시공 업체는 만식의 이름을 담당자 칸에 복사해 넣은 사실을 인정했다. 과거 배수 변경을 승인한 건물 관리 책임자가 실제 서명을 하지 않고, 관리자의 이름을 대신 썼다. 그 사람은 이미 퇴사했고, 회사는 잘못된 문서가 사용된 점을 인정했다. 다만 침수 피해와 배수 변경 사이의 인과관계는 자료가 부족해 확정할 수 없었다.
관리회사는 만식에게 공식 정정문을 전달했다. 문서의 책임자로 기재된 것이 잘못이었다는 점과 기록을 정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식은 그 문서를 받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누명을 벗었지만, 김 사장의 피해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정정문을 공개해도 될까요?” 예린이 물었다.
“내 이름에 관한 부분은 공개해도 됩니다. 김 사장 얘기는 동의한 범위까지만 넣어 주세요.”
정정문은 입주자 게시판에 게시됐다. 김 사장은 익명으로 침수 사례가 점검 절차 개선에 반영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보상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더는 이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린은 그 결정을 존중했다.
옥상정원은 오후 네 시부터 다시 열렸다. 만식은 벤치와 화분 사이 통로를 비워 두었다. 직원들이 올라와 쉬고, 다온은 토마토 관찰표를 펼쳤다. 예린은 배수구 주변에 안전 표시를 새로 붙였다. 세 사람은 정원이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아졌지만 관리가 가능했고, 각자 지킬 책임을 나눴다.
해가 질 무렵 만식은 옥상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차를 나눠 주었다. 그는 정원을 지키는 일에 대해 짧게 말했다.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다 내놓을 필요는 없고, 화분을 맡기면 관리할 사람을 정해야 한다고 했다. 몇몇 직원은 주말 물 주기를 자원했다. 예린은 그들의 이름과 가능 시간을 기록했다. 다온은 학교 숙제 발표 날짜를 알려 줬다.
“발표에 만식 아저씨 이름을 넣어도 돼요?”
“네가 원하면 넣어도 되지만, 정원에서 한 일을 사실대로 적어.”
“그럼 아저씨가 물 주지 말라고 한 것도 쓸게요.”
만식은 웃었다. 다온은 그날의 기록을 노트에 적었다. 토마토는 살았고, 화단은 줄었고, 배수관의 과거 문제는 일부 확인됐다. 모든 궁금증이 풀리진 않았지만, 다음에 무엇을 점검할지는 알게 됐다.
예린은 퇴근 전에 시설 점검표를 서버에 올렸다. 만식은 내일 옥상에 올라올 사람들의 근무 시간을 확인했다. 그들은 일을 마치고 건물 계단을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예린이 말했다.
“정원이 없어지지 않아 다행이에요.”
“없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가 다시 쓸 수 있게 됐지.”
“그 차이가 큰가요?”
“다음에 누가 책임질지 정했다는 뜻이니까.”
다온은 토마토 사진을 가족 단체방에 올렸다. 어른들은 열매가 맺히면 알려 달라고 답했다. 만식은 가능성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내일 아침 흙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물을 주겠다고만 말했다.
그날 밤 관리실에 새 도면이 도착했다. 수정된 배수관 선은 지하 상가가 아니라 빗물 저장조로 이어졌다. 저장조의 점검 기록에는 최근 2년간 비어 있던 기간이 표시돼 있었다. 정원 아래 배수 문제는 해결됐지만, 저장조 관리가 왜 중단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예린은 다음 점검 일정을 잡았다. 옥상정원은 작게 다시 살아났고, 그 아래에는 여전히 확인할 물길이 남아 있었다.
정정문을 받은 만식은 게시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문장 하나하나를 읽었다. 자신이 당시 공사 책임자가 아니었다는 점, 문서의 서명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 관리회사가 잘못된 이름 표기를 정정한다는 점이 적혀 있었다. 침수 피해의 원인이 확정됐다는 표현은 없었다. 그는 문구가 사실에 맞다고 판단해 입주자 게시판에 공개하는 데 동의했다.
김 사장은 침수 자료가 보고서에 요약되는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점포명과 피해자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가 합의서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록에서 제외됐다. 예린은 피해 사례를 공공 자료로 활용할 때 개인을 식별할 단서를 줄이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다온은 학교 과제를 제출하기 전에 만식과 예린에게 자료를 보여 줬다. 아이는 “옥상정원은 모두가 같이 고친다”고 썼지만, 예린은 시설 점검은 자격을 가진 사람이 맡았다고 수정하자고 했다. 만식은 아이가 도운 화분 이동과 기록을 정확히 적으면 된다고 했다. 다온은 과제를 고쳐 제출했다.
옥상은 제한 구역과 공동 이용 구역으로 나뉘었다. 이용 시간과 화분 관리 책임이 게시됐고, 주말 당번도 자원자를 받아 정했다. 만식은 자신이 모든 식물을 돌보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느꼈다. 예린은 다음 비가 온 뒤 배수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재개를 앞두고 만식은 예린에게 관리실 열쇠를 돌려주었다. 그녀가 열쇠를 받지 않자 그는 자신의 담당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냐고 물었다. 예린은 안전 관리 책임은 계속 자신에게 있지만, 식물 돌봄을 혼자 맡는 구조는 다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제가 손을 놓으면 정원이 금방 엉망이 될 것 같아서요.”
“그 걱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지금 정원을 여는 조건이에요.”
만식은 주말 당번표에 자기 이름을 한 번만 적었다. 예전 같으면 매일 칸을 채웠을 것이다. 빈칸을 남기는 선택이 게으름처럼 느껴졌지만, 예린은 그 표를 고치지 않았다. 대신 비상 연락 담당 칸을 따로 만들어 두 사람이 번갈아 맡도록 했다.
공동 정원 재개 첫날, 만식은 각 화분 주인에게 자기 식물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화분을 더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관리 담당이 정해지기 전에는 받지 않았다. 예린은 안전 점검 연락처와 비상 폐쇄 기준을 게시했다. 다온은 새로운 위치의 토마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예전처럼 큰 정원은 아니네요.” 아이가 말했다.
“예전처럼 관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만식이 답했다.
“그래도 여기 있잖아요.”
만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공간은 작았지만, 책임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차이가 다음 계절을 준비하게 했다.
그는 물을 주기 전에 흙을 확인했다.
예린은 점검표를 저장하고, 만식은 정원을 닫았다.
화분은 새로운 자리에 놓였다.
그들은 다음 점검을 기다렸다. 예린은 알람을 맞추고, 만식은 수첩을 책상에 두었다.
다음 날 비가 오면 배수 상태부터 확인할 예정이었다.
예린은 그 점검을 맡았다.
만식은 식물들을 확인했다.
천천히.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