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실의 장부

2화: 동의 없는 계약
가영은 손목의 실을 가위로 자르려다 멈췄다. 복례는 실을 자르면 대가가 더 빨리 청구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영은 장부에 적힌 계약서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 수진의 서명이 있다면 거래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정준은 사채 피해 상담소에서 수진의 대출 계약을 검토했다. 그는 문서에 돈과 이자만 있고, 기억이나 수명에 대한 조항은 없다고 했다. 다만 계약 당일 수진은 고물상에서 현금 대신 ‘잠들지 않는 밤’을 담보로 내겠다는 별도 서명을 남겼다. 수진은 그 문서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서명은 본인 필체예요.” 준이 말했다.
“그날 밤 수진은 병원 야간 근무 중이었어요.” 가영이 답했다.
준은 계약서의 시간과 병원 출입 기록을 비교했다. 수진은 그 시각에 병원에 있었다. 서명은 본인 것이지만, 대면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 서명을 복사했거나, 수진이 모르는 방식으로 서류에 동의한 것으로 처리됐다. 거래의 동의는 성립하지 않았다.
수진은 가영에게 더 이상 조사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병원비로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잃었고, 자기 기억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가영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실이 수진을 따라다니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했다. 수진은 “네가 대신 결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복례는 장부를 펼쳐 계약의 흔적을 보여 줬다. 수진의 서명 위에 얇은 붉은 선이 두 번 덧그어져 있었다. 한 번은 채권자, 한 번은 채무자가 눌렀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채권자의 이름은 종이에서 뜯겨 있었다. 복례는 그 조각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했다. 그녀는 예전에 장부를 숨기려 이름을 뜯어냈지만, 거래는 사라지지 않았다.
“채권자 이름을 알려 주세요.” 가영이 말했다.
“이름을 읽으면 그 사람이 네게 올 거야.”
“그럼 내가 맞이할게요.”
복례는 고개를 저었다. 장부는 이름만으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거래 당사자들이 서로를 인정해야 잔금과 관계가 드러났다. 가영의 아버지 거래가 수진의 계약에 연결돼 있다면, 누군가 두 사람을 묶으려는 것이다.
그날 밤 수진은 의원에서 환자 한 명을 돌보다 잠깐 잠들었다. 꿈에서 아버지가 병실 문을 열어 달라고 말했다. 깨어난 그녀는 환자 호출벨을 끄지 못했다. 벨이 세 번 울렸고, 환자는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넘어질 뻔했다. 수진은 즉시 달려가 환자를 붙잡았다. 그 순간 손목의 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실은 환자의 팔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영은 준과 함께 의원에 도착했다. 환자는 수진의 아버지와 같은 성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수진에게 가족 사진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수진은 사진을 꺼냈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했다. 기억 한 조각이 이미 빠져나간 것이다.
“내가 이런 계약에 동의했을 리 없어.” 수진이 말했다.
“서명은 네 것이야.” 준이 답했다. “하지만 동의가 있었는지는 확인해야 해.”
그들은 고물상으로 가서 복례에게 채권자 이름을 물었다. 복례는 뜯어낸 조각을 내놓았다. 종이에 남은 이름은 ‘임정호’, 가영의 아버지였다. 수진의 계약은 가영의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수진이 채무자로 서명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가영은 아버지가 수진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 기억해 보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의 붉은 실이 목까지 올라왔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친구는 네가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말을 의무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수진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가영에게 책임을 넘겼을 수도 있었다.
장부의 잔금란에 문장이 새로 나타났다. ‘채권자 임정호의 상속인, 임가영. 대가의 선택권 이월.’ 거래는 가영에게 수진의 기억을 대신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응하면 수진은 기억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든 거래가 정당한지 판단하기 전에, 가영은 또 대신 선택하게 된다.
수진은 장부를 덮었다. “이번엔 내게 물어.”
가영은 손목을 내밀었다. 실이 수진의 손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싶어?”
수진은 답하려 했지만, 고물상 문밖에서 누군가 세 번 두드렸다. 문을 열자 검은 장갑을 낀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손목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남자는 가영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 빚을 받으러 왔습니다.”
준은 상담소에 보관된 피해자 계약서를 가져왔다. 수진의 대출 서류와 글씨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보였지만, 날짜가 하루 달랐다. 대출 계약은 병원비를 위한 실제 돈 거래였고, 별도 서명은 병원에서 출입할 수 없는 시간에 작성됐다. 가영은 숫자를 비교해 위조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류의 잉크와 종이 연도를 보며, 두 문서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작성됐다고 결론 내렸다.
수진은 직접 상담소로 와서 자기 계약을 확인했다. 그녀는 대가가 기억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바로 거부하지 않았다. 병원비 때문에 돈을 빌린 것은 사실이고, 당시에는 무엇이든 담보로 잡혔을 수 있다고 했다. 준은 실제로 어떤 대가에 동의했는지, 누가 설명했는지를 물었다. 수진은 대출을 받은 날 어머니의 목소리를 잊어버릴까 두려웠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억을 담보로 잡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영은 수진의 선택을 재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의원 뒤편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 수진은 야간 환자 중 한 명이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환자는 매일 딸에게 전화하겠다고 했지만, 딸이 받지 않아 상처를 받고 있었다. 수진은 그 환자에게 자기 목소리를 대신 전화로 들려주지 않았다. 환자가 직접 전화를 다시 걸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충전해 주었다.
그 행동을 본 가영은 수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했다. 대신 누군가를 대신해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선택이 사라질 수 있었다. 수진은 자기 계약을 취소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동의했는지 먼저 알아보고, 그다음 내가 정할게.”
준은 동의 장부를 새로 만들었다. 각 거래에 당사자 설명, 대가를 이해한 시각, 철회 가능 여부를 기록하도록 했다. 복례는 이 기록이 장부의 거래를 바로 무효화하지는 못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해 서명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가영은 아버지의 거래를 다시 조사했다. 당시 병원비 장부에는 복례에게 받은 현금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잔금이 무엇이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명 아래에 딸에게 이월한다는 문구가 덧씌워져 있었다. 잉크는 원본보다 새 것이었다. 누군가가 계약 뒤에 상속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아버지가 쓴 문장이 아니에요.” 가영이 말했다.
복례는 그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녀는 첫 계약의 증인으로 서명했지만, 이후 장부가 변조되는 동안 침묵했다. 가영은 복례가 모든 사실을 한 번에 말하지 않은 것을 원망했지만, 장부를 계속 추적하려면 그녀의 증언이 필요했다.
수진이 손목을 내밀었다. 붉은 실은 맥박에 맞춰 조금씩 조여 왔다. 그녀는 자기 선택을 기록해 달라고 했다. “오늘은 기억을 내주지 않겠다고 할게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그때 다시 말할 거예요.”
그 말이 장부에 적히자 실은 느슨해졌다. 하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 순간 고물상 문밖에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복례는 수진의 선택을 들은 뒤, 오래된 계약의 첫 증인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법무사였다. 그의 딸이 고물상에 물건을 맡기러 왔고, 복례는 그녀에게 당시의 복사 문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딸은 아버지가 거래 문서를 보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서랍 속에 남은 장부 조각을 기억해 냈다.
그 조각에는 계약서의 최초 문구가 있었다. 잔금은 ‘병원비 상환이 끝날 때까지의 불면’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기억이나 수명은 없었다. 상속인에게 채무를 넘기는 조항도 없었다. 수진의 서명과 가영에게 이월된 조항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었다.
가영은 서류를 읽고 복례를 바라봤다. 복례는 자신이 그 계약이 변조된 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당시 고물상은 장부를 잃으면 다른 채무자들의 기록도 함께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녀는 한 사람을 보호하려다 기록 전체를 숨겼다. 그 선택으로 더 많은 사람이 장부에 묶였다.
수진은 화를 냈지만, 복례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대신 새 동의 장부를 같이 만들자고 했다. 과거 계약을 무효로 할 수 없어도, 앞으로는 어떤 기억과 시간을 담보로 하는지 당사자가 직접 말하게 해야 했다. 복례는 동의했고, 준은 상담소의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가영은 아버지의 서명을 다시 확인했다. 계약서의 이월 문구는 서명 후에 덧씌워졌다. 그녀는 숫자와 잉크의 차이를 증거로 정리했다. 이 문서는 거래가 아니라 변조였다고 주장할 근거가 생겼다.
준은 증인 문서를 상담소에 보관하고, 복례는 사본을 장부 옆에 묶었다. 수진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약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 질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선택은 장부에 ‘미완료’로 기록됐다.
가영은 서류에 적힌 두 날짜를 비교해 위조 가능성을 표시했다. 숫자를 확인하는 일은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준은 문서 원본과 사본을 분리해 잠금 서랍에 넣었다.
수진은 언제든 서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기록에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