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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실의 장부3화

붉은 실의 장부

붉은 실의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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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잔금을 누가 치를까

검은 장갑의 남자는 자신을 채권자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그는 이름 대신 낡은 계약 번호를 말했다. 복례는 그 번호를 듣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깨진 조각이 바닥에 튀었다. 가영은 남자의 손목에 감긴 실을 보았다. 실은 장부의 빈 페이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진은 계약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가영이 말했다.

“동의는 아버지가 대신 받았습니다.”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거래예요.” 준이 끼어들었다.

남자는 장부의 문구를 펼쳐 보였다. ‘상속인은 미결 잔금을 대신 이행한다.’ 가영은 그 문구가 아버지의 서명 아래 적힌 것을 확인했다. 계약은 돈을 빌린 당사자와 상속인의 관계를 묶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기억을 담보로 제공할 권리가 없었다. 가영은 그 거래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남자는 수진의 손목에서 실을 당겼다. 수진은 숨을 들이쉬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가영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가영은 남자에게 달려들었지만, 실이 그녀의 손목도 조였다. 준이 남자의 팔을 잡았고, 복례는 장부를 펼쳐 계약서를 찢으려 했다.

“찢어도 거래는 없어지지 않아!” 남자가 소리쳤다.

복례는 손을 멈췄다. 가영은 수진에게 물었다. “기억을 내줄래, 아니면 지금 거부할래?”

수진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 기억은 내가 정해. 아버지나 네가 대신 치르지 마.”

그 말에 붉은 실이 잠시 느슨해졌다. 거래의 동의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장부의 문구가 흔들렸다. 남자는 가영에게 잔금을 내면 수진을 놓아주겠다고 했다. 대가에는 가영이 수진과 쌓아 온 우정의 첫 장면이 적혀 있었다. 그 기억을 내주면 수진을 당장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대신 갚지 말라고 했다.

가영은 장부를 밀어 남자에게 돌려줬다. “거래 당사자에게 직접 동의를 받으세요. 수진은 거부했습니다.”

남자는 붉은 실을 당겼다. 복례가 깨진 찻잔 조각으로 자기 손바닥을 그었다. 피가 장부에 떨어지자 그녀의 이름이 첫 장에 드러났다. 복례는 과거에 아버지 임정호의 채권자로 거래를 승인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돈을 빌려준 것은 맞지만, 수진의 기억을 담보로 받는 데 동의한 적이 없었다. 채권자는 복례의 이름을 도용해 장부를 이어 왔다.

준은 계약번호를 확인하고 상담소의 오래된 피해 자료와 대조했다. 같은 번호가 여러 채무자에게 반복되어 있었다. 남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장부의 거래를 수행하는 대리인이었다. 그는 채권자의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가영은 그 대답을 기록하고, 장부의 모든 거래를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가영의 아버지 거래를 집행하려 했지만, 수진의 명시적 거부와 복례의 증언이 겹치면서 실이 끊어졌다. 끊긴 실은 사라지지 않고 장부의 여백에 매듭으로 남았다. 수진은 무릎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가영을 보며 자기 첫 기억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최근에 함께 병원 옥상에서 먹은 편의점 삼각김밥 이야기를 했다. 그 기억은 장부에 없었다.

가영은 장부를 빼앗지 않았다. 복례와 준에게 함께 보관하자고 제안했다. 피해자가 원하면 거래 기록을 열람하고, 동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했다.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설명을 듣고, 대가가 돈이 아니라면 별도 증인을 두기로 했다. 이는 저주를 없애지 않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몰래 담보로 잡는 일을 어렵게 할 수 있었다.

검은 장갑 남자는 물러나기 전에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아직 계약이 없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정준, 다음 대가: 동생의 목소리.’ 준은 그 이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그는 가족의 생명 담보 계약을 중단시킨 뒤에도, 동생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진은 장부를 덮고 복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복례의 손바닥에서 피가 멈췄지만, 첫 페이지의 매듭은 그대로 남았다. 가영은 아버지가 남긴 빚을 전부 갚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그녀는 그 빚을 돈으로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부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새 줄이 나타났다.

‘가영이 다음에 잃을 것은, 자신이 왜 친구를 지키려 했는지에 대한 이유.’

남자는 가영에게 거래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계약번호만 말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준은 그 번호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오래된 사채 조직의 공동 장부 계정이라고 알아냈다. 거래를 실행하는 대리인이 여럿일 수 있었다. 가영은 그 사실을 듣고도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장부에서 확인된 페이지를 여러 곳에 복사해 보내기로 했다.

복례는 원본을 공개하면 장부를 찾는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수진은 자기 이름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영은 당사자의 이름과 거래 내용은 가리고, 변조된 서명 방식과 이월 조항만 공개하자고 했다. 준은 피해 상담소와 법률 지원 단체에 자료를 전달했다.

남자는 복사본을 빼앗으려 했지만, 수진이 앞을 막았다. 그녀는 손목의 실을 보여 주며 “나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는 그녀를 직접 설득할 수 없었고, 가영에게 아버지의 잔금을 요구했다. 가영은 대신 갚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수진의 선택과 자기 기억을 서로의 빚으로 묶지 않기로 했다.

장부에 새 문구가 번졌다. ‘채무자 의사 확인 보류.’ 붉은 실의 색이 잠시 흐려졌다. 남자는 물러났지만, 거래번호를 남겨 두었다. 이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장부를 향해 손을 뻗자, 붉은 실들이 가게 안의 모든 선반을 휘감았다. 유리병이 떨어지고, 오래된 액자가 깨졌다. 복례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며 장부를 품에 안았다. 가영은 남자를 밀어내지 않고 거래 페이지를 펼쳤다. “이 서명은 원본이 아닙니다. 여기와 날짜가 다르고, 당사자 설명이 없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계약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거래를 전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준은 변조된 최초 문구를 꺼내 들었다. 채권자 이름이 지워져 있어도 거래의 범위와 동의 조건은 증거로 남아 있었다. 남자는 장부를 닫으려 했지만, 수진이 손을 올려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 옆에 ‘동의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다.

그 문장이 완성되자 손목의 실은 느슨해졌다. 가영은 수진의 기억을 대신 내놓지 않았고, 수진은 자신이 잃을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선택은 보류됐고, 장부는 대가를 강제로 청구하지 못했다. 남자는 가게를 떠나면서 장부의 원본을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복례는 문을 잠갔다.

그날 밤 수진은 가영에게 병원비를 빌려준 날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가영도 그날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수진이 병원 복도에서 손에 쥐여 준 따뜻한 캔커피는 떠올랐다. 두 사람은 그 기억이 장부에 적혀 있지 않다는 사실에 웃었다.

가게 안의 물건이 흔들리자 가영은 장부를 닫지 않고 책상에 눌러 두었다. 페이지가 바람에 넘겨질 때마다 사람 이름과 대가가 드러났다. 복례는 선반을 붙잡고, 준은 깨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수진은 붉은 실을 손목에서 잡아당기지 않고, 장부에 자기 의사를 적었다.

남자는 거래를 집행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원본 동의서와 증인을 제시하지 못했다. 가영은 그의 이름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거래 번호와 변조된 문구를 공개 기록에 남기겠다고 했다. 그가 누구든, 증거가 남으면 더는 이름 없는 권력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말에 처음으로 물러섰다. 실들이 느슨해지고, 선반의 떨림이 멈췄다. 그는 문 앞에서 “장부를 태우면 모두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하지 마”라고 말했다. 복례는 태우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기록을 보존하되, 거래 당사자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바꿀 것이라고 했다.

남자가 떠난 뒤 가게는 어지럽혀졌지만, 장부는 그대로였다. 수진은 손목의 자국을 소독했고, 가영은 깨진 액자를 치웠다. 유리 조각 아래에서 오래된 사진이 나왔다. 아버지 임정호와 복례가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계약번호가 적혀 있었다.

가영은 사진을 봉투에 넣고 날짜를 적었다. 장부의 거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확인하려면 그 남자의 정체뿐 아니라 아버지가 남긴 기록도 다시 읽어야 했다. 수진은 가영과 함께 다음 날 아버지의 서류 상자를 열기로 했다.

가영은 수진에게 먼저 가고 싶은지 물었다. 수진은 함께 가겠다고 했고, 둘은 서류 봉투를 나눠 들었다.

복례는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을 삼켰다. 낯선 남자는 장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아버지와 거래했다. 그의 얼굴은 오래된 고물상 거울에 비쳐 현재의 남자와 똑같았다. 가영은 사진을 뒤집어 촬영 날짜를 읽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빚을 갚았다고 가족에게 말한 날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돈을 갚은 게 아니었어요.” 복례가 말했다. “장부의 첫 권을 넘겼어.”

가영은 사진을 조사 기록에 포함하기로 했다. 수진은 사진을 공개할지 결정하기 전에, 자기 이름이 없는 사본을 먼저 만들자고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사진을 스캔했다. 원본은 봉투에 넣고, 사본은 준의 상담소에 보냈다.

장부의 첫 페이지에서 붉은 실 하나가 사진 속 남자의 손목으로 이어졌다. 실 끝에는 이름 대신 ‘다음 회계사’라는 문구가 적혔다.

아버지의 문서 상자는 아직 열려 있었다.

가영은 서랍을 천천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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