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실의 장부

1화: 가장 가까운 채무자
임가영은 장부에서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다.
붉은 실로 묶인 낡은 장부는 고물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고, 펼친 페이지에는 숫자 대신 사람의 이름과 대가가 적혀 있었다. 박수진, 잔금 미납, 기억 한 조각. 그 밑에 가영의 이름이 붉은 실로 이어져 있었다.
“이거 얼마예요?” 가영이 물었다.
강복례 할머니는 장부를 덮었다. “그건 팔 물건이 아니야.”
“그런데 가격표가 붙어 있어요.”
“그 가격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지.”
가영은 세무사였다. 숫자와 거래 내역의 모순을 찾아내는 일이 익숙했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페이지마다 날짜가 달랐고, 각 이름 옆에는 돈이 아닌 수명, 잠, 기억, 약속이 적혀 있었다. 거래에 서명한 사람은 둘 이상이었다. 한 사람만 대가를 치르면 거래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여백에 반복됐다.
그날 밤, 가영은 수진의 손목에서 붉은 실을 발견했다. 실은 피부 아래로 들어갔다가 맥박에 맞춰 나타났다. 수진은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실을 보지 못했다. 가영이 손목을 잡자 수진이 움찔했다.
“왜 그래?”
“아니야. 실밥이 묻었나 봐.”
수진은 의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최근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대출을 받았지만, 가영에게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가영은 자기가 대신 갚겠다고 했지만 수진은 거절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빚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영은 고물상으로 돌아가 복례에게 장부의 계약을 물었다. 복례는 사람의 생명을 돈처럼 거래한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고 했다. 붉은 실은 거래가 체결됐을 때만 보이고, 당사자가 둘 다 대가를 알고 동의해야 한다. 동의가 없으면 실은 끊기지 않고 채무자를 따라다닌다. 대가를 갚지 않으면 기억이나 수명이 사라질 수 있지만, 장부가 그 손실을 대신 정하지는 않는다.
“수진은 동의한 적 없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가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진은 자신의 대출 계약을 숨겼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거래가 있을 수 있었다. 복례는 장부를 보여 주지 않으려 했다. 가영은 숫자와 이름을 적은 페이지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복례는 손으로 장부를 덮었다. 둘이 당기는 동안 붉은 실이 가영의 손목에 감겼다.
손목에 열이 오르고, 가영의 기억 하나가 흐려졌다. 그녀는 수진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지 못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산을 같이 썼다는 사실은 알지만, 수진의 얼굴이 흐릿했다. 가영은 장부를 놓았다. 복례는 그녀의 손목에서 실을 풀어냈다.
“장부를 오래 읽으면 네가 가진 것도 담보로 잡힐 수 있어.”
복례는 가영에게 아버지의 빚을 묻지 말라고 했다. 가영은 그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남은 빚은 모두 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부의 마지막 줄에는 아버지 임정호의 이름과 함께 ‘관계의 잔금, 딸에게 이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영은 복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복례는 당시 아버지가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생명 담보 거래를 했고, 마지막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했다. 거래 상대는 복례 자신이 아니었다. 장부를 처음 만든 채권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복례는 아버지가 무엇을 담보로 했는지 알지만, 지금 말하면 거래가 다시 움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진이 위험한데 그걸 숨겨요?”
“네가 먼저 장부를 열었어. 네 선택도 이제 거래의 일부야.”
가영은 고물상을 나와 수진의 집으로 갔다. 수진은 팔목에 난 붉은 자국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위해 빌린 돈은 이미 갚았다고 했다. 계약서에는 서명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대가가 기억이라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가영은 그 계약을 함께 확인하자고 했다. 수진은 화를 내며 장부와 아버지 이야기를 더는 꺼내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가영이 늘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고 말했다. 가영은 사과하려 했지만, 수진은 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온 가영은 장부의 사진을 다시 열었다. 수진의 이름 옆에는 아직 치르지 않은 대가가 적혀 있었다. ‘가장 오래된 우정의 첫 장면.’ 그 아래에는 새 문장이 추가됐다.
‘채무자 동의 확인 전, 채권자 임가영이 잔금 대신 기억을 제출함.’
가영은 장부를 닫았지만, 실은 손목에 남아 있었다.
수진은 손목의 실을 가리며 의원 야간근무에 들어갔다. 가영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가 대신 판단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수진의 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대신 손목에 묶인 붉은 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실은 가영의 팔을 지나 고물상으로 향했고, 문 안쪽에서 사라졌다.
복례는 장부를 잠그고 가게 문을 닫았다. “실은 사람을 찾는 줄이 아니야. 미뤄 둔 대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여 주는 거야.”
“그럼 수진의 잔금은 어디로 가요?”
“아직은 아무 데도. 동의가 없으면 거래가 완성되지 않아.”
가영은 장부의 페이지를 다시 보았다. 수진의 이름 옆에는 대가가 적혀 있지만, 계약일이 없었다. 서명은 복사된 것이고, 거래 시작 시각은 공란이었다. 대출을 갚은 뒤에도 수진의 손목에 실이 보이는 건, 누군가 계약을 완료하려고 하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가영은 고물상 밖으로 나가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진은 받지 않았다. 잠시 뒤 메시지가 왔다. “내가 처리할 거야. 네가 먼저 전화하지 마.” 가영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그녀가 도울 수 있는 방식은 수진이 원하는 도움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일 수 있었다.
그때 고물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낡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들어와 장부를 찾았다. 그는 아내의 이름이 장부에 적혀 있다고 말했지만, 페이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이 기억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복례는 대가를 설명했다. 남자는 아내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려는 게 아니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가 동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영은 장부의 이름을 대신 확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자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아내에게 먼저 물어보겠다고 했다.
가영은 그가 나간 뒤 장부의 여백에 ‘확인 전 보류’라고 적었다. 붉은 실은 끊기지 않았지만 팽팽해지지도 않았다. 거래를 멈출 수 있는 건 장부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가 선택할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가영은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서류 상자를 꺼냈다. 세금 신고서와 병원 영수증 사이에 작은 봉투가 있었다. 안에는 붉은 실이 두 가닥 들어 있었다. 한 가닥은 끊겨 있었고, 다른 한 가닥은 오래된 계약서의 서명란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영의 이름을 담보로 적지 않았지만, ‘관계의 잔금’이라는 문구 옆에 그녀의 서명을 남겼다. 서명은 가영이 대학에 다니던 때의 필체와 비슷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수진이 병원비를 빌려줬다. 가영은 갚겠다고 말했지만, 수진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그 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돈은 갚았지만, 우정에 남은 빚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부는 그 감정을 잔금으로 분류했을 수 있었다.
가영은 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대신 갚으려 해서 미안해. 네가 직접 고를 수 있게 기다릴게.”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를 사진으로 저장하는 대신 봉투에 다시 넣었다. 아버지의 서명을 단정할 증거가 아직 없었다.
복례는 다음 날 고물상 문을 열지 않았다. 가영은 셔터 앞에 앉아 수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지나가는 손님이 고장 난 시계를 맡겼고, 가영은 그 시계를 받아 들었다. 수진이 의원 근무를 마치고 왔을 때, 둘은 오래된 시계의 멈춘 초침을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어릴 때 함께 수리점을 다니던 일을 기억했다. 가영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지 못해도, 오늘 함께 시간을 맞추는 경험은 남아 있었다.
수진은 장부를 처음 봤을 때 자신의 이름이 왜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가영에게 아버지의 빚을 몰래 갚아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돈을 준 것은 대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영이 빚을 숨긴 채 친구를 잃을까 봐 도운 것이었다. 하지만 가영은 그 도움을 오래된 채무처럼 여기며 혼자 갚으려 했다.
“내가 빚을 졌다면 내가 말할게.” 수진은 손목을 가리켰다. “이 실이 내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어.”
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대신 빚을 갚겠다는 말을 거두었다. 수진은 그제야 장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함께 확인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고물상으로 돌아가 복례에게 동의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는지 물었다.
복례는 장부의 문장뿐 아니라 당사자의 말과 증인의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했다. 수진은 자기 조건을 직접 적었다. ‘기억을 담보로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대가를 설명받은 뒤 다시 판단한다.’ 그 문장을 쓰는 동안 붉은 실은 조금씩 팽팽함을 잃었다.
복례는 그 문장을 장부에 옮겨 적고, 수진에게 원본을 보여 줬다. 수진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더는 혼자 읽지 않았다.
가영은 수진에게 장부의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다음에 직접 읽어 보자고 말했다.
수진은 그 약속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장부를 다시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