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빌린 재판관과 위장 약혼

2화: 재판정의 동생
이노는 심리에 나오지 않았다. 마엘은 법원 현관에서 동생을 기다렸지만, 그가 남긴 건 인쇄소의 납품표 한 장이었다. 뒷면에 ‘내가 모르는 일을 네가 정하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글씨 끝마다 검은 잉크가 번졌다.
마엘은 그 종이를 접지 않고 사건철에 끼웠다. “심리를 연기해 주세요.”
라우렌은 맞은편에서 신청서를 쥐었다. “법원은 하루 안에 결정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이노가 오지 않았어요.”
“대리 증언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가 원한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럼 일정 연기 사유를 제출하죠.”
그는 재판관으로서 심리를 늦추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름 봉인은 만료에 가까웠고, 서류의 공백이 커질수록 이노의 등록은 불안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라우렌은 그의 자리를 대신 채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베르카 감찰관에게 직접 연기 요청서를 제출했다.
“동생이 출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절차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베르카가 말했다. “본인이 신원을 확인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기록을 유지할 근거가 부족해요.”
“본인에게 통지가 갔습니까?” 마엘이 물었다.
베르카는 서류를 넘겼다. 통지 발송란은 비어 있었다.
“발송 기록이 없어요.”
“이름이 보조 등록 상태라 우편 주소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먼저 주소를 확인해야죠.”
“법원이 주소를 조회하려면 친족 관계를 입증해야 합니다.”
“제가 누나입니다.”
“공식 등록에는 마엘 씨 이름만 있습니다.”
마엘은 손바닥을 책상에 댔다. 손등의 봉인 잉크가 희미하게 빛났다. “제 이름을 빌려서 그렇게 만든 거잖아요.”
“그 사실을 증명할 자료가 있습니까?”
라우렌이 입을 열었지만 마엘이 먼저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 명령서에 재판관님 인장이 있고, 제 이름의 봉인이 작동했어요.”
베르카는 문서를 확인했다. “긴급 명령은 맞지만, 동생의 주소를 확인하는 권한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그럼 가족 열람 청구를 하겠습니다.”
“친족 관계를 먼저 증명하세요.”
법원은 같은 증거를 서로 다른 문턱 뒤에 숨겨 두었다. 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우렌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재판관의 신분으로 문을 열 수 있었지만, 그 선택은 다시 자기 권한으로 이노를 대신하는 일이었다.
복도에서 라우렌이 제안했다. “임시 약혼을 공개하고 가족 열람을 함께 신청하면 예외 심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약혼이 아니라 사실혼 확인 서류가 필요한 건가요?”
“법원은 약혼자와 직계 가족을 보호 대상자로 열람 심사에 올립니다.”
“그러면 당신은 제 이름을 빌린 일로 이해충돌을 일으킨 재판관이고, 저는 그 이름을 되찾으려는 사람입니다. 둘이 약혼했다고 선언하면 이해충돌이 사라져요?”
“아니요. 재판관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제안하는 이유는요?”
“서고에 들어갈 임시 접근 사유가 생깁니다. 원본 등록 장부를 확인할 수 있어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약혼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엘은 곧장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노에게 편지를 써서 제안과 조사 목적, 철회 가능성을 모두 알렸다. 라우렌은 그 자리에서 위장 약혼 서류 초안을 만들었다. 기간은 조사 종료까지, 재산 결합 없음, 사적 동거 없음, 양측 서면 통지로 즉시 해지 가능. 무엇보다 마엘의 원본 이름 사용 권한은 다시 라우렌에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약혼을 가장해도 이름은 빌려주지 않습니다.” 마엘이 말했다.
“그 조항을 넣겠습니다.”
“제 개인 기록은 별도 동의 없이는 보지 마세요.”
“넣겠습니다.”
“당신의 권한으로 조사 자료를 비공개하지 마세요.”
“그것도 넣죠.”
마엘은 서류를 읽고 나서야 서명했다. 라우렌은 그녀를 따라 서명했지만, 손가락이 종이 위에 오래 머물렀다. “불편하시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습니다.”
“불편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해서 동의해요.”
“그 차이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열람 신청을 함께 냈다. 베르카는 법원 규정상 관계 확인이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겠다며 승인했다. 시민명부 보관고는 낮은 천장의 돌방이었다. 이름이 적힌 금속판들이 벽마다 걸려 있었고, 각 판 아래에 가족·재산·증언 기록으로 이어지는 가는 실이 연결돼 있었다.
“이노의 이름은 어디 있죠?” 마엘이 물었다.
“보조 이름으로 등록된 항목은 마엘 씨의 명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베르카가 답했다. “독립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 제 이름이 회수되면 그의 기록도 끊기겠네요.”
“법률상 그럴 수 있습니다.”
라우렌은 판 앞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 사실을 마엘 씨에게 언제 통지했습니까?”
“이름 대여 계약서에 조항이 있습니다.”
“동생이 읽을 수 있는 계약서도 있습니까?”
베르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이노가 보관고 입구에 나타났다. 옷소매에 인쇄 잉크가 묻어 있었고, 숨이 가빴다. 그는 마엘을 향해 걸어오다 금속 이름판 앞에서 멈췄다.
“이게 내 이름이에요?”
마엘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등록됐어.”
“내가 몰랐던 기록이요?”
“응.”
“누나가 서명했어요?”
“보호 등록에 서명했어. 그런데 연결 조항은 제대로 설명받지 못했어.”
“그럼 지금 약혼 서류에는 왜 누나가 서명했어요?”
“서고에 들어와 이 기록을 확인하려고.”
이노는 라우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누나 이름을 빌렸죠.”
“그렇습니다.”
“왜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 잘못입니다.”
“보호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이노는 이름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금속판에는 그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지만, 등록 번호는 마엘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 이노는 손을 뻗었다가 닿기 전에 거뒀다.
“저걸 떼면 제 이름이 없어져요?”
“아니요. 이름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마엘이 설명했다. “시민 등록의 연결 기록이 무효가 될 수 있어. 그럼 일자리와 증언권을 증명하는 데 문제가 생길 거야.”
“그걸 왜 누나가 결정해요?”
“결정하지 않을 거야. 네가 직접 말할 수 있게 심리를 열어 달라고 할게.”
“그럼 제 이름을 되찾아 주세요.”
그 말에 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은 네가 정해야지. 되찾는 방법도 같이 찾자.”
이노가 라우렌을 보았다. “재판관님은 여기서 빠지세요.”
“이해충돌 신고를 하고, 심리는 다른 재판관에게 넘기겠습니다.”
“그 말이 아니라, 제 일을 누나와 둘이 결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알겠습니다.”
베르카는 그 대화를 중단시키려 했다. “보관고에서는 등록인만 발언할 수 있습니다.”
“이노의 이름이 등록인으로 보이지 않아서 발언을 못 한다는 거죠?” 마엘이 물었다.
“현 규정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규정 자체를 심리해 주세요.”
베르카는 눈썹을 찌푸렸다. “원본 이름을 회수하는 신청이 들어온 뒤에만 가능합니다.”
“회수 신청을 하면 이노의 기록이 끊기고, 기록이 끊기면 심리할 자격도 사라진다고 방금 말했어요.”
“보조 이름 보호 조항에 따라 임시 정지는 가능합니다.”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이노가 마엘을 바라봤다. “지금요?”
“네가 요청했으니까.”
그녀는 임시 정지 청구서를 작성했다. 라우렌은 재판관 인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가 마엘의 이름을 사용해 명령을 냈다는 사실을 증인으로 적고, 서명했다. 베르카는 청구를 접수하며 이름판의 불빛을 임시로 유지했다. 이노의 시민 기록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틀 안에 심리를 받아야 했다.
보관고를 나서자 이노는 라우렌과 거리를 두었다. “누나, 약혼을 유지할 건가요?”
마엘은 서류를 확인했다. “오늘 필요한 열람을 마칠 때까지는 유지할 거야. 네가 원하지 않으면 지금 철회할 수 있어.”
“그럼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네 선택을 물은 거야.”
“저는 누나가 내 이름을 지키려고 하는지, 자기 이름을 되찾으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요.”
마엘은 즉시 답하지 못했다. “둘 다야. 그래서 네가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어.”
이노는 아무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마엘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라우렌도 따라가지 않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약혼 서류를 법원 기록에 올렸지만 공개 발표는 하지 않았다. 공적인 열람 권한은 확보했으나, 개인 관계로 보이게 해 이노를 압박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서고에서 원본 등록 장부를 다시 살폈다. 이름판의 금속 뒷면에는 인쇄소 활자와 같은 미세한 홈이 있었다. 기록은 법원에서 새긴 게 아니었다. 마엘은 이노가 일하는 인쇄소의 납품표를 떠올렸다.
“이 이름판을 만든 곳을 알아요.”
“동생의 인쇄소입니까?”
“아마도요.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서고 문을 나서자 베르카가 문을 잠갔다. “내일 심리에서 이노가 직접 증언하지 않으면 등록은 자동 갱신될 겁니다.”
“그러면 증언을 강요하는 거군요.” 마엘이 말했다.
“아니요. 선택하지 않으면 기존 규칙이 적용됩니다.”
라우렌은 그녀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 규칙 자체에 긴급 심리를 청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노의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마엘은 명함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건철에 넣었다. “동생을 다시 설득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오지 않으면, 그 이유를 듣겠습니다.”
왕립 법원의 종이 울렸다. 보조 등록이 만료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마엘의 이름은 아직 라우렌의 명령서에 묶여 있었고, 이노는 자신이 원한 적 없는 보호를 거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