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빌린 재판관과 위장 약혼

1화: 빌린 이름
서기관 마엘은 자기 이름으로 작성된 재판관의 명령서를 발견했다.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의 종이는 사건철 맨 위에 놓여 있었다. ‘원고 마엘의 증언을 비공개로 보존한다.’ 아래에는 왕립 재판관 라우렌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마엘은 재판관도, 원고도 아니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서기관이었다.
“이 문서가 왜 내 이름으로 되어 있죠?”
그녀가 묻자 서고 관리인은 책장을 닫았다. “기록관 실수일 겁니다.”
“제가 증언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오류 신고를 하면 되죠.”
“정정란이 비어 있어요. 누가 제 이름을 썼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신고할 수 없습니다.”
관리인은 그녀에게 문서를 넘기지 않았다. 마엘은 명령서의 봉인 무늬를 눈으로 훑었다. 봉인 잉크는 왼쪽 아래에서 번졌다. 원본 이름이 사용될 때마다 생기는 흐림이었다. 이름을 도용한 흔적이 아니라, 실제 등록된 이름의 권한이 작동했다는 뜻이었다.
“재판관을 부르겠습니다.”
“기록관에게 먼저 보고하세요.”
“재판관이 본인을 확인해야 해요.”
관리인은 반대했지만, 마엘은 서고 문지기에게 재판관실의 호출표를 넘겼다. 그녀가 이 사건철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이미 세 명에게 알려졌다. 한 사람에게 더 알려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라우렌은 곧 도착했다. 진청 예복의 소매가 잉크에 살짝 얼룩져 있었다. 그는 명령서를 읽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 이름을 사용한 건 제 승인입니다.”
“제가 동의한 적은 없습니다.”
“이노의 보조 등록을 유지하려면 이름 대여가 필요했습니다. 긴급 증거 보전 명령을 내릴 때 권한이 없었어요.”
“동생의 이름으로 신청할 수도 있었죠.”
“그 이름은 아직 정식 등록 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름을 쓸 권리가 생기진 않아요.”
라우렌은 명령서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맞습니다. 봉인 만료가 내일입니다. 이름을 회수할 권리는 마엘 씨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 알리지 않았죠?”
“이노의 보조 등록이 당신의 이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수하면 기록이 무효가 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이노는 알고 있습니까?”
라우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엘은 그 침묵을 문서에 남겼다. “그러니까 재판관님은 제 이름을 빌려 동생의 등록을 지켰고, 그 결과를 동생에게는 말하지 않았군요.”
“위험한 심문을 피하게 하려 했습니다.”
“보호와 비밀은 다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알았다면 제게도 물었어야죠.”
라우렌은 인장 반지를 벗어 책상에 놓았다. “이 권한을 행사한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이름 회수 신청이 들어오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그녀가 지금 바로 회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엘은 신청서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노의 보조 등록을 별도로 바꾸는 절차가 있나요?”
“독립 증언과 시민명부 심리가 필요합니다. 절차는 최소 한 달입니다.”
“봉인 만료는 내일인데요.”
“긴급 정지 신청을 할 수 있지만, 제가 재판관으로 심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관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중립 재판관을 지정해 주세요.”
“감찰관에게 요청하겠습니다.”
“요청서에 당신이 제 이름을 썼다는 사실도 적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엘은 신청서를 들고 서고로 돌아가려 했다. 라우렌이 그녀를 불렀다. “임시 약혼을 발표하면 법원 서고의 가족 열람 규정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름 대여 관련 기록을 함께 조사할 수 있어요.”
“약혼이 조사 권한을 주지는 않습니다.”
“법원 예규상 배우자와 약혼자는 긴급 가족 등록 열람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승인 여부는 별도 심사입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죠?”
“이름 도용 사건에 귀족가문이 연루돼 있습니다. 제 단독 명의로 요청하면 감찰관이 기록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당신의 명성을 빌리는 건가요?”
“아니요. 동등한 공동 신청자로 이름을 올리는 겁니다. 기간, 공개 범위, 철회 조건을 문서로 정하겠습니다.”
“약혼은 안 해도 조사할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그럼 약혼부터 제안하지 말았어야 해요.”
라우렌은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편의를 먼저 말하고 동의를 나중에 물었습니다.”
마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사과를 해도 그녀가 허락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안서 대신 사건 문서의 복사본을 요청했다. 라우렌이 재판관 권한으로 승인했고, 관리인은 서고에서 복사 장치를 가져왔다. 잉크 복제 과정에서 봉인 문양은 옮겨지지 않았다. 마엘은 원본과 복사본이 다른 부분을 기록했다.
“이 봉인이 당신 이름의 권한을 표시한다면, 복사본에는 남지 않는 게 맞습니다.” 라우렌이 말했다.
“당신 이름의 봉인은 왜 원본에 남아 있죠?”
“제가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그럼 실제 권한을 사용한 사람은 당신이고, 이름은 제 것이네요.”
“네.”
“그 조합을 법원이 허용했나요?”
“긴급 명령에만 허용됩니다. 다만 원본 이름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동의를 받지 않았으니 불법이군요.”
“그렇게 판단될 수 있습니다.”
마엘은 그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않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고 믿음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사건철에 접근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관리인은 그 목록이 규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제가 담당 서기관이 아닙니다. 당신이 제 이름으로 기록한 사건에서 이해충돌을 확인하는 중이에요.”
“이름이 있다고 해서 사건을 맡을 권한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렇죠. 그래서 재판관에게 제 이름을 회수할 권리가 있다고 확인받았습니다.”
라우렌은 관리인을 꾸짖지 않았다. 그는 중립 심리 요청을 접수하고, 마엘에게 확인번호를 건넸다. 그 사이 법원 복도에서 이노를 만났다. 동생은 인쇄소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끝에 검은 잉크가 배어 있었다.
“누나가 왜 여기 있어?”
“네 이름 등록에 문제가 생겼어.”
이노가 라우렌을 보았다.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한 거죠?”
“내 이름을 빌렸어. 그리고 그 이름에 네 등록을 연결했어.”
“그럼 누나가 이름을 되찾으면 저는요?”
“아직 확인 중이야.”
“그게 무슨 대답이에요?”
라우렌이 설명하려 하자 마엘이 손을 들었다. “내가 먼저 말할게. 지금 아는 건 네 등록이 내 원본 이름에 묶였다는 것뿐이야. 이름을 회수하면 기록이 무효가 될 수 있지만, 네가 법적으로 사라지는 건 아니야. 독립 심리를 신청할 거야.”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나도 오늘 알았어.”
“누나는 그 사람을 믿어요?”
“아니.”
라우렌은 이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동생분은 심리에서 직접 질문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노는 짧게 웃었다. “저는 동생분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이노입니다.”
마엘은 그 말을 기록했다. 라우렌도 그 이름을 반복해 확인했다. “이노 씨.”
“저한테 설명하는 동안에도 재판관님이 제 권리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서고의 가족 등록 구역을 함께 열람하기로 했다. 라우렌은 출입 규정에 따라 신청서를 작성했고, 마엘은 공동 신청자로 서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름 대여 사실을 확인하는 조사관일 뿐, 약혼자가 아니었다. 일단 절차대로 접근을 요청하고, 거절되면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감찰관 베르카는 열람을 승인하지 않았다. “민감한 가족 기록은 이해 당사자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노 본인은 당사자가 아닌가요?” 마엘이 물었다.
“그의 등록은 보조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등록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말이군요.”
“법원 절차에 따른 것입니다.”
“어떤 조항인지 알려 주세요.”
베르카는 조항 번호를 말하지 않았다. 라우렌은 그 순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마엘이 자기 이름으로 질문을 이어 가게 두었다. 베르카는 결국 다음 날 정식 심리를 열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이름 대여의 효력을 정지하지 않으면, 봉인 만료와 함께 보조 등록이 자동으로 갱신될 수 있었다.
마엘은 심리 청구서에 서명했다. “제 이름은 회수하겠습니다. 다만 이노의 기록을 먼저 확인할 때까지 강제 만료를 멈춰 주세요.”
베르카는 그녀의 서명을 받아들였다. 이름 봉인이 잠시 흔들렸다. 서고 창문에 붙은 등록판 하나가 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
“이노 씨의 시민표식이 불안정해졌습니다.” 베르카가 말했다. “청구를 유지하면 이틀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복도에서 이노는 마엘을 기다렸다. “위장 약혼을 하면 기록을 볼 수 있다는 말, 진짜예요?”
“절차가 더 넓어질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을 거야.”
“누나 이름을 빌려 준 건 내가 아니잖아.”
“알아.”
“그럼 왜 나한테 묻죠?”
“이 사건이 네 삶을 바꾸니까.”
이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인쇄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마엘은 붙잡지 않았다. 라우렌은 복도 끝에서 그들이 말할 시간을 지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엘은 자신의 손등에 번진 봉인 잉크를 씻었다. 물이 검게 변했지만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일 심리에서 그녀는 자기 이름을 회수할 권리와 동생의 기록을 지킬 시간을 함께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법원 문서에는 이미 ‘약혼자’라는 칸이 열려 있었다. 그 칸에 누구의 이름을 적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