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프레임은 내가 고른다

2화: 제자의 도전
조민석은 공개 연습 날 세라보다 먼저 클럽에 도착했다.
그는 테이블 네 개를 닦고, 색공을 점수 순서대로 정리해 놓았다. 세라가 들어오자 곧바로 큐를 들었다.
“한 프레임만 합시다.”
“수업이 끝난 뒤에.”
“오늘은 수업 아니잖아요. 저는 선수로 왔어요.”
미라가 사무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경기 시작 전에 관중석을 열어 둘게. 다만 심판이 있어야 해.”
민석은 한규에게 연락했다. 그는 공식 연습을 위해 클럽에 와 있던 참이었다. 한규는 경기 규칙과 제한 시간을 설명한 뒤, 점수판을 켰다.
“사제 관계를 경기 중에 언급하지 않을 것. 시간 제한은 샷당 30초.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민석이 말했다.
세라는 큐를 들었다. “동의해요.”
민석은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초구권을 얻었다. 그는 수구를 삼각형의 바깥에 얇게 대고 빨간 공 무리를 흩뜨렸다. 첫 공격으로는 점수를 크게 낼 수 없는 수비였다. 수구는 쿠션에 붙었다.
“세이프티.” 한규가 판정했다.
세라는 당장 빨간 공을 노리지 않고, 수구를 반대편 쿠션으로 보냈다. 민석은 쿠션 두 번을 이용해 수구를 빼냈다. 공은 빨간 공 하나에 닿을 듯하다가 빗나갔다. 심판이 파울을 선언했고, 세라에게 4점이 주어졌다.
“프리볼 선택권이 있습니다.” 한규가 말했다.
세라는 쉬운 빨간 공처럼 보이는 색공을 고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공을 넣고 검은 공으로 이어 갔다. 점수는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다음 포지션이 좁아지자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안전한 수비를 택했다.
민석은 그 선택을 기다렸다는 듯 수구를 중앙에 붙였다. “선생님은 여전히 여기서 멈추네요.”
세라는 큐를 세웠다. “여긴 수비가 맞아.”
“맞을 수도 있죠. 그런데 공격할 수 있는 자리인데도 계속 안전하게만 갑니다.”
“당신은 내가 왜 그렇게 치는지 모르잖아.”
“저는 그걸 배우려고 했어요.”
민석은 다음 공격에서 빨간 공을 넣고 갈색 공으로 이어 갔다. 그는 점수를 크게 벌리지 않고, 수구를 다시 수비 위치에 놓았다. 세라가 장거리 공을 치게 만들려는 배치였다.
세라는 테이블 끝에서 수구와 빨간 공 사이의 각도를 계산했다. 난도가 높았다. 큐를 평행하게 놓고, 포켓 입구를 겨냥했다. 그녀의 손목이 굳었다. 다시 수비를 택하려는 순간, 민석이 말했다.
“제가 선생님 제자라서 일부러 쉬운 공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럼 쳐요.”
세라는 큐를 당겼다. 공은 빨간 공을 맞혔지만 포켓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구는 테이블 중앙에 남았다. 민석은 쉬운 공격을 얻어 점수를 쌓았다. 프레임은 민석의 승리로 끝났다.
관중석에서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민석은 악수를 청했지만, 세라의 손은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결국 그녀는 손을 잡았다.
“공격을 하라고 몰아붙이면 내가 친다고 생각했어?”
“아뇨. 선생님이 왜 안 치는지 알고 싶었어요.”
“경기에서 이유를 묻지 마. 점수를 만들어.”
“그럼 우리 관계도 경기에서만 남기죠.”
민석은 큐를 챙겨 문 쪽으로 향했다. 세라는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나간 뒤 미라에게 물었다. “민석이가 왜 공개 연습을 요청했어요?”
“당신과의 사제관계를 경기장에서 끊고 싶대. 선발전에서 지면 제자라서 졌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한 적 있어요?”
“아니. 하지만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했죠. 민석이가 이기면 당신이 가르쳤기 때문, 지면 당신이 아직 잘해서.”
세라는 큐팁을 손질했다. 초크 가루가 새로 묻었다. “그럼 그가 내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두는 게 맞겠네요.”
“하지만 경기 중엔 서로의 전략을 읽어야 해요.”
“그건 라이벌도 하는 일이죠.”
그날 저녁 세라는 창고에서 마지막 투어 영상을 다시 틀었다. 과거의 자신은 점수가 42 대 38로 앞서 있었다. 빨간 공 하나와 색공들이 테이블에 남았다. 장거리 샷을 성공하면 프레임을 끝낼 수 있었지만, 실패하면 상대에게 역전 기회를 내줬다.
영상 속 세라는 큐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안전한 수비를 고르고, 다음 공격에서 파울을 냈다. 상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라는 화면을 정지했다. “나는 장거리 샷을 놓친 게 아니었네.”
미라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럼 뭘 놓쳤어요?”
“내가 그 샷을 고르지 않았어. 실패할까 봐.”
“그때는 왜 말하지 않았어요?”
“말하면 다음에도 그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았어.”
미라는 기록 노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민석이 그 경기 영상을 보고 자랐어요. 당신이 수비로 버티는 모습을 보고 배웠고, 마지막 샷을 피한 모습도 봤겠죠.”
세라는 노트를 펼쳤다. 민석의 훈련 기록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그는 세이프티 성공률이 높았지만, 긴 공격에서 큐 속도를 줄이는 습관이 있었다. 세라는 그걸 고치라고 여러 번 말했다. 자신과 똑같은 두려움을 읽어내지 못한 채.
“내가 가르칠 때 그 아이가 장거리 샷을 피했어요.”
“그렇다고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건 아니에요.”
“아니.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지 돌아봐야 해.”
다음 날 민석은 훈련실에 혼자 남아 긴 샷을 연습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열 번. 공이 포켓을 빗나갈 때마다 그는 위치를 다시 잡았다. 세라는 문밖에서 그의 손목을 관찰했다. 큐가 공에 닿는 순간 손이 조금 늦게 멈췄다.
그녀는 들어가려다 발을 멈췄다. 경기 전 조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민석이 원한 건 자신만의 선택이었다. 세라는 문틀을 두드리지 않았다.
민석의 큐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빨간 공이 포켓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는 공을 꺼내 다시 놓지 않았다. 세라가 떠난 뒤에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클럽 게시판에는 선발전 대진표가 붙었다. 세라와 민석의 이름은 서로 다른 조였지만, 결승에 오르면 맞붙게 되어 있었다. 세라는 대진표를 바라보다가, 큐를 챙겨 자기 연습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 끝에 장거리 빨간 공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수구를 그 반대편에 두었다. 큐를 들고 선 자세에서 한참 숨을 골랐다. 이번에는 수비를 고르지 않기로 했다.
세라는 큐를 수구 옆으로 가져갔다. 포켓까지의 직선은 보였지만, 공 사이의 각도는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녀는 큐를 들어 포켓 입구를 다시 봤다. 공이 맞을 지점을 얇게 잡으면 수구가 테이블 중앙으로 빠져나가 다음 공격을 남길 수 있었다. 중심을 두껍게 맞히면 빨간 공은 들어갈 확률이 높아도 수구가 포켓 반대편에 붙을 수 있었다.
그녀는 초크를 발랐다. 손이 떨리자 큐팁을 두 번 눌렀다. 첫 샷은 빨간 공을 포켓 옆면에 맞히고 튕겨 나왔다. 세라는 큐를 내려놓지 않았다. 공을 다시 놓고, 이번엔 브리지 손의 간격을 손가락 한 마디 좁혔다.
두 번째 샷은 공을 넣었지만 수구가 쿠션에 붙었다. 점수는 얻었지만 다음 색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포지션 플레이를 실패로 기록하고, 같은 장거리에서 수구를 반 쿠션 더 안쪽에 놓았다.
세 번째 샷, 빨간 공은 포켓에 들어갔다. 수구는 중앙에 멈췄다. 세라는 검은 공을 겨냥할 수 있었지만, 아직 포지션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공 대신 쉬운 파란 공을 넣고 점수를 낮게 쌓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무조건 어려운 공을 치는 게 아니라, 자기 선택의 다음 결과까지 책임지는 일이었다.
민석은 문밖에서 연습을 멈췄다. 그는 세라의 세 번째 샷을 보았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세라가 시선을 들자 그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첫 번째보다 나아졌네요.”
“두 번째는 수구를 잃었어.”
“그래도 세 번째는 직접 고른 샷이었죠.”
“네가 그걸 확인하러 온 거야?”
“아뇨. 제 연습이 끝나서요.” 민석은 자기 큐를 어깨에 올렸다. “다음엔 안전한 선택을 해도 이유가 있는지 물어볼게요.”
“경기에서 물어봐.”
“그럴게요.”
민석은 돌아섰다. 세라는 그에게 조언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의 빨간 공을 다시 세팅했다. 다음 샷은 더 어렵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공을 바라보며 큐를 한 번 천천히 움직였다.
수구는 천천히 굴러 쿠션을 맞고 정지했다. 세라는 테이블을 돌아 반대편에서 같은 배치를 살폈다. 각도는 아직 불안했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손목에 힘이 덜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미라가 문을 열었다. “클럽 문 잠글 시간이야.”
세라는 큐를 내려놓고 공을 주머니에 담았다. “한 번만 더 하고 싶었어요.”
“그럼 내일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오늘 멈춰.”
세라는 반박하려다 큐 케이스를 닫았다. 장거리 샷을 연습하는 일도, 오래 버티는 일도 자기 선택이어야 했다. 무리해서 쳐야만 용기를 증명하는 건 아니었다.
미라는 전등을 끄기 전 게시판의 대진표를 확인했다. “민석은 결승 전까지 만날 가능성이 낮아. 그 전에 네가 복귀 선수로서 경기 감각을 찾아야 해.”
“그가 내 제자였다는 걸 잊지 않을 거예요.”
“그것과 그를 이기는 건 다른 일이야.”
세라는 큐 케이스를 들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서 고를 겁니다.”
내일은 수구의 위치부터 다시 맞춰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경기에서도 지킬 것이다. 필요하면 실패한 뒤에도 이유를 말할 것이다.
다음 공개 연습에서 민석에게도 그 점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대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