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프레임은 내가 고른다

1화: 복귀전의 초구
정세라는 초구를 치기 전에 큐 팁을 손톱으로 두 번 눌렀다.
초크 가루가 손끝에 묻었다. 공은 테이블 끝에 삼각형으로 모여 있었고, 빨간 공이 수구를 둘러쌌다. 관중석에는 지역 클럽 회원 몇 명과 대회 운영진만 앉아 있었다. 그래도 세라는 이곳을 국제무대처럼 느꼈다. 밝은 조명이 눈에 박히고, 큐를 잡은 손목이 필요 이상으로 굳었다.
“시간 시작합니다.” 심판 한규가 말했다.
세라는 첫 샷으로 수구를 빨간 공 무리의 바깥에 붙였다. 공격을 열지 않고 상대에게 긴 수비를 남기는 세이프티였다. 수구가 쿠션을 맞고 멈췄다. 상대 선수가 조심스레 계산하는 동안 세라는 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첫 프레임부터 안전하게 가네요.” 해설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듣지 않은 척했다. 그녀는 한 번에 점수를 몰아 넣는 선수가 아니었다. 수비와 위치 선정으로 상대를 흔들고, 실수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투어에서 버텼다. 하지만 마지막 투어에서 장거리 샷을 놓친 뒤, 공격 기회가 와도 세이프티부터 떠올렸다.
상대의 수비는 나쁘지 않았다. 수구가 빨간 공 하나 뒤에 숨어 포팅 라인이 가렸다. 세라는 앉은 자리에서 테이블을 바라봤다. 라인을 찾으려 눈을 가늘게 뜨자 왼쪽 아래 포켓으로 향하는 좁은 길이 보였다. 어려운 장거리 샷이었다. 성공하면 빨간 공을 포팅하고 검은 공으로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녀는 큐를 다시 들었다.
세 걸음. 큐 끝을 놓을 높이. 숨을 반쯤 내쉬고 팔꿈치를 고정한다. 세라는 준비 자세를 잡았지만, 큐가 움직이기 직전에 멈췄다. 실수하면 상대에게 점수뿐 아니라 쉬운 배치까지 내준다.
“시간 20초.” 심판이 말했다.
세라는 결국 수구를 쿠션 쪽으로 밀었다. 안전한 세이프티였다. 공은 빨간 무리 가까이 멈췄다. 점수는 그대로였다.
상대는 몇 차례 수비를 주고받은 뒤 빨간 공을 하나 포팅했다. 프레임은 천천히 기울었다. 세라는 기회를 기다렸지만 점수 차가 벌어졌다. 마지막 색공 순서가 시작됐을 때 상대가 앞서 있었다. 세라가 초록 공을 넣으면 남은 점수는 줄어들고, 갈색 공부터 이어서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녀의 수구는 초록 공과 쿠션 사이에 놓였다.
세라는 큐를 내려놓고 걸음을 늦췄다. 장거리 샷은 아니었다. 중거리의 단순한 포팅이었다. 그런데도 지난번 마지막 샷의 기억이 겹쳐졌다. 공이 포켓 입구를 맞고 돌아 나오던 장면. 점수판이 멈추고, 관중이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선택해.”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세라는 공을 겨누었다. 큐 끝이 초록 공의 중심을 향했다. 손목이 떨렸다. 그녀는 스트로크를 짧게 끊었다. 수구가 초록 공을 쳤지만, 공은 포켓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상대는 손쉽게 포팅했다.
세라는 첫 복귀전을 패했다.
심판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났다. 세라는 상대와 악수하고 큐를 챙겼다. 손이 계속 떨렸다. 큐팁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쳐 초크 가루가 떨어졌다.
“복귀전 첫 경기는 나쁘지 않았어요.” 클럽 운영자 박미라가 다가왔다. “감각은 아직 있네요.”
“감각이 남았는데 공격을 못 했어요.”
“다시 시작하면 달라질 수 있어요.”
“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미라는 대답하기 전에 세라의 큐를 보았다. 큐 손잡이에는 오래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녀가 처음 클럽을 맡았을 때, 그 이름표를 세라가 직접 달았었다.
“이번 국제대회에 와일드카드 자리가 하나 있어요. 추천서를 이미 냈습니다.”
세라는 고개를 들었다. “내 허락 없이요?”
“선발전 신청 마감이 오늘이라서요.”
“그건 제 선택이 아니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지금 물으러 왔어요. 출전할지 말지.”
미라는 클럽의 작은 사무실로 세라를 데려갔다. 탁자 위에 국제대회 안내서와 선수 등록 서류가 놓여 있었다. 참가하려면 선발전에서 결승에 올라야 했고, 일정은 3주 뒤였다. 대회는 세라가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경기장과 같은 곳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 경기장에 다시 가라고요?”
“그곳이 싫다면 다른 대회를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세라는 서류를 밀어냈다. “난 청소년 클럽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면 그걸로 됐어요.”
“아이들은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 법도 가르쳐 주길 바라요.”
“포기하는 것도 선택이에요.”
사무실 문이 열리고 조민석이 들어왔다. 그는 경기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자기 큐가 들려 있었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가르친 제자였다. 민석은 그녀의 패배 기록을 이미 본 듯했다.
“선발전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세라는 미라를 바라봤다. “누가 얘기했어요?”
“대회 공고에 이름이 올라왔어요. 코치님이 신청하셨더군요.”
“아직 결정 안 했어.”
민석은 큐를 세워 들었다. “결정한다면 사제관계를 정리하고 경기합시다. 경기장에서는 제 코치가 아니에요.”
미라가 끼어들었다. “민석아, 그건 너무—”
“제 출전권도 걸려 있어요. 누가 사제인지 제자인지 따지지 않고 이기고 싶습니다.”
세라는 민석의 얼굴을 봤다. 그는 오래전 자신이 가르친 수비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큐를 놓지 않는 손가락 모양, 공을 보기 전에 테이블 네 모서리를 확인하는 습관. 하지만 눈빛은 더 이상 레슨을 기다리는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좋아.” 세라가 말했다. “경기 중에는 조언하지 않을게.”
“경기 전에도요.”
“알겠어.”
민석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선발전에서 봅시다.”
그가 나간 뒤, 미라는 서류를 다시 세라 앞에 놓았다. “정말 나올 거예요?”
세라는 큐팁을 손톱으로 눌렀다. “아직 몰라요. 하지만 민석이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역할로 나를 기억하게 두고 싶진 않아요.”
“그럼 등록할까요?”
“대회 신청은 오늘까지라면서요.”
미라는 펜을 건넸다. 세라는 선수 등록란을 채웠다. 복귀의 이유를 쓰는 칸은 비워 뒀다.
클럽의 훈련실로 돌아오자 청소년 선수들이 공을 닦고 있었다. 한 아이가 세라의 패배를 알고 조심스레 물었다. “코치님, 그럼 다음엔 안 떨려요?”
“떨릴 거야.”
“그래도 나가요?”
세라는 테이블 위에 큐를 놓았다. “다음엔 내가 어떤 샷을 칠지 내가 먼저 정하고 싶어.”
아이들은 오늘 훈련 주제가 세이프티라고 생각했는지, 큐를 들고 긴 수비 배치를 만들었다. 세라는 그들에게 안전한 샷만 연습시키려던 계획을 바꿨다. 테이블 끝에서 빨간 공 하나를 포켓 앞에 놓고, 수구를 반대쪽 쿠션에 붙였다.
“이건 너무 멀어요.” 한 아이가 말했다.
“맞아. 성공 확률도 낮아. 그래도 공격할지 수비할지 직접 골라 봐.”
아이들은 서로 차례를 양보했다. 세라는 일부러 정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첫 아이는 얇게 맞히려다 수구를 포켓에 빠뜨렸다. 두 번째는 세이프티로 돌려 상대에게 긴 공을 남겼다. 세 번째는 큐를 내려놓고 다시 각도를 확인했다.
“저는 넣어 볼게요.”
“왜?”
“맞히지 못해도 다음에 어디로 갈지 계산할 수 있어서요. 안전하게만 두면 공이 계속 멀어져요.”
세라는 그 말을 듣고 어제의 자기 자세를 떠올렸다. 세이프티는 훌륭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반복하면 전략이 아니라 회피가 된다.
“좋아. 큐를 천천히 움직이고, 미스가 나도 수구가 어디로 갈지 생각해.”
아이는 샷을 쳤다. 빨간 공은 포켓 가장자리를 맞고 옆으로 굴러갔다. 넣지는 못했지만 수구는 쿠션을 돌아 테이블 중앙에 멈췄다. 다음 선수는 공을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실패했는데 상대가 불리해졌어요.” 아이가 말했다.
“네가 선택한 결과야. 다음엔 같은 선택을 할지 다시 생각하면 돼.”
세라는 아이에게 큐를 돌려줬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했다. 어떤 이는 긴 공격을 시도했고, 어떤 이는 수비를 택했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치지 않아도 훈련은 성립했다.
수업이 끝난 뒤, 미라가 기록표를 들고 왔다. “민석이가 내일 공개 연습을 하겠대요. 본인이 먼저 요청했어요.”
“나한테 도전하려는 거겠죠.”
“그럴 수도 있지만, 동료 선수들 앞에서 경기 규칙을 확인하고 싶대요. 사제관계는 지키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신이 가르친 수비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코치가 아니라 상대 선수로 갈게요.”
“출전 여부는 결정했나요?”
세라는 선수 등록서의 빈 이유 칸을 바라봤다. “나가겠다는 건 정했지만, 무엇을 증명할지는 정하지 않았어요.”
미라는 서류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 답은 경기하면서 찾아도 되겠네요.”
그날 밤, 그녀는 창고에서 오래된 경기 영상을 꺼냈다. 마지막 투어의 결승 프레임. 공의 배치는 여전히 눈에 익었다. 수구와 빨간 공 사이의 거리, 왼쪽 포켓까지의 각도. 세라는 영상을 멈추고 초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거리 샷을 치기 직전의 자기 얼굴은 화면에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큐를 든 손이 멈춘 순간은 분명했다. 그녀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내일 다시 보기로 했다. 먼저 그 장면을 끝까지 볼 생각이었다. 큐팁을 손질하고 다시 돌아올 참이었다. 그 샷을 외면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손끝의 초크를 털어내지 않고 큐를 쥐었다. 화면 속 과거의 자신과 눈을 맞췄다. 리모컨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영상은 그대로 재생했다. 그녀는 화면을 끝까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