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 번역가의 숨은 엔딩

2화: 개발자의 사라진 계정
백가은은 장민재의 영상을 끝까지 보고도 게임 인물이 말을 걸었다고 하지 않았다. QA 이현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실제로 보이는 동작과 빈 문자열 키부터 확인했다. 민재는 그 태도가 답답하기보다 고마웠다. 혼자 밤새 본 화면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화면이 됐다.
회의실의 큰 모니터에서는 이상 대사가 안 보였다. 민재가 기존 검수판을 자신의 컴퓨터에서 열고 화면을 연결하자 두 줄이 나타났다. 새 사본을 회의실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정상 대사만 있었다. 계정과 폴더, 언어 설정 중 어느 차이인지 하나씩 확인해야 했다.
현수는 한국어 설정을 유지한 채 민재의 사용자 메모를 지웠다. 레아는 숲을 가리키지 않았다. 메모 칸에 같은 질문을 적자 다시 손을 들었다. 실제 대사 파일을 편집하지 않아도 반응이 있었다. 가은은 원자료 담당 임서율의 검수 도구를 확인하자고 했다.
서율의 계정은 회사 작업 목록에 없었다. 퇴사 후 자료를 다른 계정으로 넘기고 삭제한 상태였다. 계정 이름을 검색하면 오래된 문서의 작성자만 남았다. 프로필 사진도 연락처도 없었다. 가은은 그것이 퇴사 처리라며 사람의 행방과 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민재는 서율이 갑자기 실종됐다고 생각하던 가설을 지웠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남겼다. 대신 실제로 사라진 작업 폴더를 찾았다. 대사 검수 기록을 옮길 때 원문 일부가 제외됐고, 어떤 분기를 제외했는지는 기획자가 승인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그 승인자는 가은이었다.
“정원 뒤의 숲은 출시판에서 빼기로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작업량이 너무 컸고 결말이 두 개 더 필요했거든요.”
민재는 삭제가 나쁜 선택이었다고 바로 말하지 않았다. 팀 다섯이 모든 분기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폐기된 인물의 메시지를 받는 지금은 그 선택의 결과를 새로 봐야 했다. 그는 서율이 제외한 부분을 어떤 형식으로 남겼는지 물었다.
가은은 검수 이력에 링크가 있을 수 있다고 답했다. 현수가 남은 기록을 읽었다. 번역 예정 언어와 테스트 계정, 오류 제목들이 날짜순으로 늘어섰다. 오래된 항목 하나의 제목이 이상했다.
‘원문 없이 대답하는 인물.’
보고자는 임서율. 상태는 재현 불가로 종료. 첨부된 이미지는 손상됐지만 작은 미리보기에 정원 표지가 보였다. 민재가 밤에 본 자리였다. 서율도 같은 현상을 봤다. 누군가 번역 검수창에 새 대사를 넣은 단순 장난이라는 설명이 약해졌다.
민재는 그 항목을 다시 열 수 있는지 물었다. 현수는 오래된 검수 이력이 삭제되지 않아 내용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작성자 계정이 없으니 그 사람의 새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기록과 연락은 다른 일이었다.
서율은 당시 대사를 직접 베껴 넣었다. ‘네가 끝을 정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한국어였다. 게임 원문은 다른 언어로 작성했는데 신비한 문장은 처음부터 한국어로 나타났다는 메모가 붙었다. 민재는 자기가 번역한 문장이 새 대사의 재료가 됐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서율도 한국어 검수판을 시험했다.
현수는 기록에서 하루 간격으로 추가된 두 항목을 찾았다. 각기 한 줄씩이었다. 날짜가 바뀌어도 한 컴퓨터에서 두 번째 새 대사가 생긴 적은 없었다. 민재의 하루 한 줄 가설과 맞았다. 그러나 전원이나 저장을 종료하면 메시지가 멈추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원인이 안 보이니까 공식 후보에서만 빼면 출시에는 문제없어요.”
가은이 말했다. 민재는 그 사실에 동의했다. 기존 후보는 이미 별도 사본이었고 이상 현상을 옮기지 않았다. 다만 원인을 못 찾은 실험판까지 지우지는 말자고 요청했다. 가은은 보관하는 것은 허락할 수 있지만 새 분기의 개발 비용은 아직 승인할 수 없다고 했다.
민재는 이번에는 자신의 계약도 물었다. 번역 범위를 늘리면 같은 돈과 일정으로 할 수 없었다. 인물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노동 시간을 무한히 늘리는 이유가 되면 자신뿐 아니라 QA에게도 비용이 갔다. 가은은 실험 시간을 하루 두 시간까지 따로 잡고 나머지 검수는 계속하자고 했다.
현수는 그 두 시간 안에 재현표를 만들기로 했다. 민재는 무키 대사를 캡처하고 행동을 적기로 했다. 가은은 옛 분기 자료의 보관 경로를 찾았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현상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나눴다.
레아에게 숲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메모 칸에 적은 질문을 읽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확정하지 못했지만 반복 반응이 있었다. 그녀는 정원의 작은 돌 셋을 차례로 밟았다. 원래 이동할 수 없는 배경의 돌들이었다. 민재는 그 순서를 화면 좌표가 아닌 돌의 모양으로 적었다.
초승달 돌, 가운데 금 간 돌, 잎사귀 돌. 정상 후보에서 같은 순서로 움직여도 아무 일 없었다. 이상 검수판에서만 잎사귀 돌 뒤로 가는 작은 길이 열렸다. 현수는 이것이 새로운 선택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폐기된 이동 경로를 다시 켠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길은 반쯤 그려진 숲이었다. 바닥의 일부는 투명했고 나무 둘은 임시 사각형으로 남았다. 레아는 그곳에서도 움직였다. 완성되지 않은 배경을 불평하지 않았다. 민재는 바로 멋진 문장을 써 주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이 인물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자기 경로를 찾고 있었다.
숲 끝에 도진이 있었다. 게임에서 레아의 동행인으로 설정됐지만 출시판에는 짧은 회상으로만 나온 인물이었다. 그는 민재가 아는 동작표에 없는 표정을 지었다. 레아가 열쇠를 내밀자 도진은 받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메모를 적어도 새 줄이 생기지 않았다. 오늘의 한 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두 인물이 직접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재는 움직임을 보고 도진이 같이 가고 싶지 않은 것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추정만으로 그에게 떠남 엔딩을 줄 수는 없었다.
현수는 옛 분기 자료에서 도진의 선택 조건을 찾았다. 숲에 남음, 레아와 동행, 정원을 닫음. 출시판의 세 선택과 다르다. 그 조건을 실행할 데이터는 옛 폴더에 있었으나 연결이 끊겼다. 서율의 계정 삭제가 원인이 아니라, 가은이 출시 범위를 줄이며 경로를 비활성화한 결과였다.
가은은 자신이 승인했다고 다시 말했다. 민재는 그 결정을 숨긴 책임을 묻기보다 어떤 부분까지 복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기획자가 결정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았으니 작업 범위를 새로 정할 수 있었다. 현수는 연결을 복구한 실험판을 따로 만들겠다고 했다.
오후의 정상 번역 검수는 끝나지 않았다. 민재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 남은 대사를 소리 내 읽었다. 인물마다 말끝이 달랐다. 레아는 대답을 기다릴 때 질문을 짧게 끊었고 도진은 상대를 설득하려 문장을 길게 이었다. 폐기된 분기의 동작에서도 그 차이가 보였다.
그는 기다릴게라는 첫 문장을 다시 보았다.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과 인물을 같게 만드는 것은 달랐다. 도진의 말끝을 레아에게 주면 매끈해도 틀린 문장이었다. 새 대사는 그 차이를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퇴근 전 가은이 옛 메일 보관함을 보여 줬다. 서율이 보내 놓은 작업 인계 문서였다. 본문에는 개인 연락처가 없고 다른 연구 프로젝트의 공개 소개 페이지가 있었다. 게임을 떠난 뒤 대사 검수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는 짧은 설명이었다. 사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러 간 것일 수 있었다.
민재는 실제 연락을 맡을 사람과 필요한 내용을 가은과 정했다. 회사 자료에 관한 확인은 기획자가 공식적으로 문의하고, 자신은 확인할 장면과 질문을 목록으로 만들기로 했다. 사라진 계정 뒤에 살아 있는 사람을 무리하게 추적하는 일로 바뀌지 않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그날의 실험 시간이 끝날 무렵 무키 대사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문을 닫지 않았어. 이름만 안 남겼을 뿐이야.’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율인지 도진인지, 화면 밖의 다른 사람인지. 민재는 의미를 먼저 확정하지 않았다. 대사가 나타난 장면은 숲 끝의 돌문 앞이었다. 레아가 문 안쪽을 가리켰다.
현수가 복구한 실험판에서 도진은 문을 열었다. 민재는 자신이 선택지를 누르지 않았다고 바로 기록했다. 도진의 이동 조건이 자동으로 실행됐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새로운 화면 제목이 생겼다.
‘번역가가 도착한 곳.’
출시판의 엔딩 목록에는 없는 제목이었다. 민재는 버튼 위에 마우스를 놓았다. 오늘 두 시간이 끝났다. 지금 누르면 어디까지 기록해야 할지 몰랐다. 혼자 밤새 작업하면 내일 정상 검수가 무너졌다. 그는 화면을 저장하고 팀에게 다음날 함께 확인하자고 했다.
레아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첫날의 기다림은 주인공을 위한 것이었고 오늘은 자기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민재는 메모에 내일 돌아오겠다고 썼다. 그녀가 열쇠를 손에 쥐고 뒤돌아섰다. 그 반응을 약속을 알아들은 것으로 믿고 싶었지만, 기록에는 단지 돌아섰다고 적었다.
퇴근하며 민재는 복도에 붙은 게임 포스터를 봤다. 레아는 주인공 뒤에서 웃고 있었다. 출시될 인물과 실험판에서 만난 인물은 같은 얼굴이지만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번역가의 일은 얼굴을 예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문장으로 지키는 일일 수 있었다.
그는 노트의 마지막에 내일 질문을 적었다. 도진은 문을 연 뒤 어디에 남고 싶은가. 그리고 레아는 그와 다른 선택을 해도 되는가. 새로운 엔딩을 대신 완성하기 전에, 아직 이름 없는 두 대답을 들을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