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 번역가의 숨은 엔딩

3화: 숨은 엔딩에 적힌 번역가 이름
숨은 엔딩의 첫 줄에는 장민재라고 적혀 있었다. 크레디트가 아니었다. 게임 속 돌문 위의 이름이었다. 민재는 자기 이름이 왜 거기에 있느냐고 묻기 전에 화면을 저장했다. QA 이현수가 옆에서 새 사본을 만들었다. 백가은은 엔딩 목록의 원자료를 열었다.
원자료에는 이름이 없었다. ‘번역가 이름이 들어갈 자리’라는 메모만 있었다. 임서율이 남긴 개발 문서였다. 해당 자리를 출시 크레디트와 연결하지 않고 검수 도구의 사용자 이름과 연결했던 흔적이 남았다. 민재가 검수 계정에 입력한 이름이었다.
“미래를 안 것은 아니네요.”
현수가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생긴 기술적인 경로는 찾았다. 그러나 원래 비활성화한 엔딩에서 이름을 불러 현재의 번역가에게 말을 보내는 현상은 설명되지 않았다. 한 가지를 알아냈다고 다른 질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화면 속 레아는 돌문 안에서 열쇠를 들고 있었다. 도진은 문 바깥에 서 있었다. 둘이 함께 이동하면 한 엔딩으로 처리되는 분기였지만 지금은 자리가 나뉘었다. 민재는 메모에 각자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적었다. 한 번에 두 질문을 넣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나눴다. 레아에게 먼저 물었다. 그녀는 정원의 바깥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도진에게 묻자 그는 문 옆의 작은 작업대를 가리켰다. 옛 분기 자료에서 그 작업대는 정원을 닫는 장치였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 닫으려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가은은 기존 분기대로라면 한 사람이 선택하면 다른 사람도 따라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개발 범위를 줄이면서 결과를 묶었다. 민재는 이상 대사를 듣기 전이라면 동행 엔딩을 더 자연스럽게 번역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같은 말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현수가 조건을 따로 실행했다. 레아의 떠남과 도진의 남음을 나누자 테스트 화면이 오류를 띄웠다. 결과 조합이 없었다. 도진의 행동이 멎었고 레아의 열쇠가 손에서 떨어졌다. 민재는 즉시 이전 저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확인되지 않은 수정으로 실험판을 덮으면 안 됐다.
기존 상태가 복구되자 두 인물이 다시 움직였다. 민재는 오류를 내고 되돌린 시각까지 적었다. 게임 속 인물에게는 어떤 경험이었는지 몰랐다. 사과를 메모에 적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 무반응도 자신이 듣고 싶은 답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새 결과를 만들려면 작업을 더 해야 합니다.”
현수가 말했다. 민재는 자신이 두 사람의 뜻을 살리겠다고 약속하면 그 일을 QA와 기획자가 떠맡는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는 출시판과 별도 실험판을 유지하는 최소 범위를 계산하자고 요청했다. 오늘 당장 새로운 엔딩을 완성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가은은 저장된 현재 상태와 옛 조건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 연출과 검수는 출시 뒤 별도 일정으로 잡아야 했다. 민재가 남을지 다른 번역가가 맡을지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의 정규 계약은 첫 작품의 결과를 보고 논의할 예정이었다.
민재는 그 말에 실망했다. 이상한 인물을 발견하고 새 분기를 지켰으니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팀의 돈과 일정이 신비한 현상의 보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계약을 보장하는 대신 게임 인물을 덮어쓰는 제안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서율에게서 회사의 문의에 답이 왔다. 가은이 문장을 읽어 줬다. 원 개발자는 과거 같은 무키 대사를 봤고, 재현 불가라는 말로 닫아 버린 뒤 별도 분기를 남겼다고 했다. 그 기록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옮겼으며 현재는 연락할 수 있었다. 사라진 계정 뒤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냈다.
서율은 신비한 대사가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번역 검수 메모에 인물의 선택을 묻는 질문을 적을 때 반응했다. 내용을 고치거나 행복한 엔딩을 만들어 주려 하면 멈췄다. 민재가 같은 조건을 보았다. 왜 그런지는 서율도 몰랐다.
답에는 별도 자료 보관 경로가 있었다. 회사가 접근할 수 있는 인계 자료였고 개인 계정의 비공개 파일을 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수가 옛 분기의 마지막 검수 이력을 가져왔다. 레아와 도진을 별도 결과로 처리하려다 멈춘 작업이 있었다.
소스는 완성되지 않았으나 결과를 합치지 않고 현재 상태를 보존하는 경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엔딩이 아니라 쉼터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인물이 선택을 기다리는 상태를 지우지 않고 남기는 방법이었다. 가은은 이 부분까지 복구하는 것은 하루의 실험 작업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민재는 그 장면의 원문을 받았다. 짧은 문장 두 개였다.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아직 닫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번역하려다가 말끝을 바꿨다. ‘아직’이 실패나 지연처럼 들릴 수 있었다. 둘은 끝을 못 고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을 고른 상태였다.
“레아는 떠날 길을 남겨 둔다. 도진은 닫을 때를 자신이 고른다.”
그가 번역안을 읽었다. 가은은 원문보다 의미가 늘었다고 지적했다. 민재는 그 점을 숨기지 않았다. 새로운 상황에 맞춘 실험 번역이며 출시 원문과 별도로 승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단순 번역이라고 적어 지나갈 수 없었다.
가은은 두 인물의 행동과 연결해 확인하자고 했다. 민재는 문장을 직접 게임에 넣기 전에 메모로 적었다. 레아는 열쇠를 손바닥에 올리고 도진은 작업대의 덮개를 닫았다.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남았다. 민재는 그것을 동의라고 확정하지 않고, 해당 문장과 행동의 반응을 함께 기록했다.
현수는 새 경로를 독립 검수판에만 넣었다. 공식 후보의 문자열과 저장은 그대로였다. 셋은 다시 처음 장면부터 시험했다. 기다림을 선택해도 레아가 무조건 따르지 않았고, 동행을 골라도 도진의 남음을 덮지 않았다. 결과 조합이 없어 멎던 화면 대신 작은 쉼터가 나왔다.
그곳에는 민재의 이름이 문 위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이름을 지우고 싶어졌다. 인물의 선택에 번역가가 개입했다는 책임이 화면에 적혔다. 그러나 지우면 누가 새 문장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민재는 자기 이름을 둔 채 수정 일자와 독립 검수라는 표시를 현실의 기록에도 남겼다.
그날의 무키 대사는 오후 늦게 나타났다.
‘네 이름이 있으면 문을 누가 열었는지 기억할 수 있어.’
레아가 말했는지 도진이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화자 표시는 여전히 물음표였다. 민재는 이름이 칭찬으로 적힌 것이 아니라 기억의 위치일 수 있음을 알았다. 크레디트를 얻기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 화면의 이름은 잘못된 선택도 되짚을 수 있도록 남았다.
레아는 숲길의 첫 돌까지 걸었다가 돌아왔다. 도진은 작업대 옆에 작은 의자를 놓았다. 둘의 다음 선택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민재는 대사를 더 만들어 붙이지 않았다. 하루 한 줄이라는 제약을 인물에게 대신 긴 답을 써 주는 이유로 삼지 않기로 했다.
출시 회의가 열렸다. 정상 후보는 계획대로 배포 준비를 계속하고, 독립 검수판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보존했다. 추가 작업의 일정은 출시 후 팀이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그 결정이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지우는 것보다는 돌아올 자리와 기록이 남았다.
가은은 정규 계약 논의가 늦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분기의 일정과 비용이 확정되지 않았고 정상 번역의 검수도 아직 남았다. 민재는 자신의 범위를 계약서에 따로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 인물을 지키려는 마음과 자신의 일을 공짜로 하는 일은 연결하지 않아야 오래 이어갈 수 있었다.
현수도 실험의 QA 시간을 별도로 적었다. 처음에는 이상 대사를 재현 불가로 닫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같은 현상이 남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르겠다는 결론에도 근거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작업의 성과라고 말했다.
민재는 그날 마지막 정상 대사를 번역했다. 정원을 떠나는 주인공이 동행인에게 고마웠다고 말하는 줄이었다. 그는 레아의 무키 대사를 떠올렸지만 정상 원문의 화자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했다. 다른 인물에게 레아의 말을 빌려주지 않았다. 각자의 말이 있어야 선택도 나뉘었다.
퇴근 전 서율의 두 번째 답이 도착했다. 숨은 엔딩의 문에 자신의 이름도 적힌 적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이름을 지우면 인물이 자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운 다음에는 메시지가 한동안 멈췄다. 서율은 다시 이름을 남기는 실험을 끝내지 못했다고 적었다.
민재는 문 위의 장민재를 봤다. 사라진 개발자 계정과 남은 인물의 기록이 연결됐다. 사람의 이름이 있어야 누가 말을 들었는지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주인이라는 뜻이면 인물은 다시 묶였다. 번역가의 자리는 둘 사이의 경계였다.
서율은 자료 목록 끝에 다른 게임의 검수 이미지 하나를 첨부했다. 새로운 무키 대사의 화자는 도진으로 표시돼 있었다. 그 게임의 원문에는 도진이 없었다. 메시지가 다른 검수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생겼다. 민재는 지금 당장 그 판을 열지 않았다. 먼저 오늘 보존한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실험 창에 내일의 질문을 적고 저장했다. 레아에게는 떠날 준비가 무엇인지, 도진에게는 닫기 전에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고르는 데 번역문 한 줄보다 오래 걸렸다. 대답이 하나뿐이라면 먼저 누구에게 물을지도 선택해야 했다.
모니터의 빛이 낮아졌다. 레아는 열쇠를 의자 밑에 두지 않고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도진은 문 옆에 서 있었다. 민재는 인물들을 끝내지 않고 컴퓨터를 닫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다음 선택을 지울 필요는 없었다. 이름이 적힌 문은, 돌아올 사람이 누구인지 남긴 채 그대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