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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게임 번역가의 숨은 엔딩1화

인디게임 번역가의 숨은 엔딩

인디게임 번역가의 숨은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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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선택하지 않은 대사

장민재는 레아의 대사를 세 번 읽었다. ‘괜찮아. 나는 기다릴게.’ 원문도 그렇게 적혔고 상황 설명도 동행인을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 레아는 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정원의 가장자리에서 열쇠를 땅에 묻고 있었다.

민재는 대사와 동작이 맞지 않는다고 검수표에 적었다. 번역이 문제일 수도 있었다. 기다린다는 말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라면 열쇠를 버리는 행동과 연결됐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상황 자료에는 그런 감정이 없었다. 그는 기획자에게 확인 요청을 보내고 다음 줄로 넘어갔다.

검수창 맨 아래에 새 대사 한 줄이 있었다.

‘나는 기다리겠다고 고른 적 없어.’

민재는 번역한 문장을 검색했다. 없었다. 원문 키는 빈칸이었다. 화자 이름도 레아가 아니라 물음표로 나타났다. 플레이 로그에는 방금 기다림을 선택했다고 적혔지만 민재는 그 선택지를 누르지 않았다. 테스트 저장을 불러와 화면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려다가 이미 식은 잔을 내려놓았다. 손부터 움직이면 내용을 놓쳤다. 먼저 검수창을 캡처하고 시각과 빌드 번호, 불러온 저장 위치를 적었다. 같은 저장을 다시 불러왔다. 새 대사는 남았지만 레아의 행동은 달랐다. 묻었던 열쇠를 다시 꺼내 손바닥에 놓았다.

작은 픽셀 몇 개가 바뀐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게임의 동작을 오래 본 민재에게는 분명한 차이였다. 주인공이 선 곳에서 레아의 오른손이 멀어졌다. 누군가에게 열쇠를 건네는 동작이 아니라 자신이 보관하는 동작이었다.

QA 담당 이현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원문 없는 대사와 행동 불일치, 선택하지 않은 선택 로그. 민재는 버그라고 써서 보냈지만 그 말을 붙이는 손이 느렸다. 버그라면 누가 넣었는지 찾을 수 있었다. 아직 그 한 줄은 파일 어느 곳에도 없었다.

현수가 원격으로 같은 검수판을 열었다. 자기 화면에는 ‘괜찮아. 나는 기다릴게’만 보였다. 민재가 캡처를 보내자 현수는 누가 번역 파일을 업데이트했는지 확인했다. 마지막 저장자는 민재였다. 그는 그 뒤에 저장한 적이 없었다.

“번역창에서 직접 쓴 거 아니에요?”

현수가 기존 시연 영상을 틀었다. 같은 저장 위치에서 레아는 열쇠를 땅에 묻은 뒤 손을 털었다. 민재의 영상에서는 손을 털지 않았다. 쥔 것이 남은 사람의 손이었다. 두 화면의 재생 시간을 맞추자 차이는 더 분명해졌다. 대사의 뜻만 다르게 읽은 것이 아니라 실제 동작이 달라졌다.

현수가 통화로 물었다. 목소리에 의심보다 확인하려는 습관이 있었다. 민재는 원문 편집 기록을 보여 줬다. 자신이 고친 것은 ‘난’을 ‘나는’으로 바꾼 한 글자였다. 화자가 스스로 선택한다는 느낌을 살리려던 수정이었다.

“자동 임시 저장인가 보죠. 로그부터 봅시다.”

민재는 화면을 닫지 않고 로그를 내보냈다. 비어 있는 키의 행은 없었다. 게임의 대사 창에는 떠 있는데 문자열 기록에는 없었다. 현수는 빌드가 손상됐을 가능성을 말하며 깨끗한 사본을 새 폴더에 내려받게 했다.

새 사본에는 이상 대사가 없었다. 기존 검수판에만 남았다. 민재는 원래 폴더를 그대로 보존하고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출시 후보를 이상 현상으로 덮어쓰면 팀 전체가 같은 오류를 재검수해야 했다. 일정은 이미 늦었다.

해뜰 스튜디오의 첫 게임은 다음 주에 출시될 예정이었다. 직원 다섯과 계약직 번역가 한 명, 외부 음악가 둘이 만들었다. 정원을 걷고 잔해를 모아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머무는 선택형 게임이었다. 크고 화려한 전투 대신 짧은 대사에 인물의 결말이 걸렸다.

민재는 첫 번역 크레디트를 기다렸다. 정규 계약을 약속받지는 않았지만 이번 작업이 성공하면 다음 작품도 맡길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한 한 줄 때문에 일정을 흔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기획자 백가은이 통화에 들어오자 먼저 출시 후보에는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가은은 현상을 닫기 전에 재현 조건을 확인하자고 했다. 그녀도 그 대사를 처음 봤다. 폐기한 문장일 수는 있으나 해당 분기의 원자료를 만든 임서율은 퇴사했고 작업 계정도 삭제됐다. 옛 대사를 확인할 자료가 일부만 남았다.

“그럼 폐기 대사를 지우면 되는 건가요?”

민재가 물었다. 가은은 지우는 것과 원인을 아는 것은 다르다고 답했다. 먼저 실험 폴더를 분리해 놓고 공식 검수는 별도로 계속하자고 했다. 그 정도는 일정 안에서 할 수 있었다. 민재는 새 사본에서 정상 문장을 번역하고, 이상 검수판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기다릴게라는 문장을 다시 들여다봤다.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빼면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레아가 자신의 선택을 말하는 상황에서는 나는이 남아야 했다. 새 대사는 그 주어를 가져와 자신이 고른 적 없다고 말했다. 누가 자신의 수정 흔적을 봤을 수 있었다.

민재는 이상 검수판에서 다음 선택지를 눌렀다. 기다림, 동행, 떠남. 셋 중 어느 것도 누르지 않고 잠깐 멈췄다. 레아는 화면 가장자리에서 열쇠를 든 손을 펴고 있었다. 기다림을 누르면 그 손이 내려갔고, 동행을 누르면 주인공 쪽으로 향했다.

떠남을 누르려는 순간 화면이 정지했다. 마우스가 아니라 게임의 움직임이 멎었다. 검수창 아래의 새 대사가 조금 밝아졌다. 민재는 다시 캡처를 남겼다. 새 줄은 더 생기지 않았다. 하루에 한 줄인 것인지, 이번 장면에 한 줄인 것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는 열쇠를 건네는 동작의 영상을 느리게 재생했다. 레아의 손가락이 열린 뒤 다시 접혔다. 원래 애니메이션 파일에는 없는 동작이었다. 현수가 소스의 동작표를 확인해 주겠다고 했으나 그 자료도 서율이 만든 부분이었다. 계정이 삭제되며 일부 연결이 끊겼다.

민재는 개발자의 삭제된 계정과 게임 인물이 사라지는 일을 같은 말로 적지 않았다. 사람이 퇴사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게임 속 한 줄은 자신이 고르지 않은 대사를 말하는 인물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작업자의 기록과 이야기의 인물을 구별하려고 노트에 선을 하나 그었다.

왼쪽에는 데이터, 오른쪽에는 문장의 의미를 적었다. 빈 키, 기존 폴더, 한국어 검수판, 저장 뒤의 행동 변화. 오른쪽에는 강요받은 기다림, 버리지 않은 열쇠, 떠남 앞의 멈춤. 왼쪽만 보면 버그였고 오른쪽만 보면 누구의 부탁이었다. 둘 중 하나를 먼저 정하면 나머지를 읽지 못했다.

밤 열두 시가 지나자 화면의 레아가 정원 중앙으로 걸었다. 민재는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가지 않고 돌로 된 작은 표지 앞에 섰다. 원래 그 자리에는 정원 이름이 적혔지만 글자가 잠깐 사라졌다.

검수창에 새 줄이 생겼다.

‘나를 끝내기 전에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 물어봐.’

민재는 시간을 확인했다. 날짜가 바뀐 뒤였다. 기존 줄과 새 줄이 함께 남았고 원문 키는 둘 다 비었다. 하루 한 줄이라는 가설이 생겼지만 검증은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는 문장을 복사하려 했다. 복사된 것은 빈칸이었다.

대사는 화면에 있었지만 일반 문자열처럼 옮길 수 없었다. 민재는 캡처와 자신이 직접 베낀 기록을 남겼다. 새 사본에는 여전히 줄이 없었다. 현수에게 날짜 변경 뒤의 두 번째 현상을 보고했다. QA 담당은 늦은 시각에도 답했다. 내일같이 볼 수 있게 오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라고 했다.

민재는 원문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실험 검수창의 메모 칸에 질문을 적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실제 대사 칸이 아니라 작업자 메모였으므로 인물에게 전달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어리석다고 느끼며 저장하지 않고 두었다.

레아가 표지 앞에서 돌아섰다. 화면의 작은 눈이 주인공을 향했다. 시점을 조작하지 않았는데 민재의 화면 한가운데에 얼굴이 놓였다. 그리고 열쇠를 든 손이 왼쪽 숲을 가리켰다. 그 숲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출시 후보에서는 배경으로만 남은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답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마침 그 시간에 재생되는 숨은 동작일 수 있었다. 그러나 테스트할 길이 생겼다. 민재는 메모를 지웠다가 같은 질문을 다시 썼다. 레아의 손이 한 번 더 숲을 가리켰다. 이 과정도 영상으로 남겼다.

식은 커피를 버리고 물을 마셨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오래된 계정과 폐기 분기를 찾는 일은 혼자 할 수 없었다. 민재는 가은에게 내일 회의 때 이 장면을 함께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한 질문과 화면의 반응만 적었다.

답이 왔다. 일정 변경은 아직 하지 않고 내일 오전에 확인하자는 내용이었다. 민재는 공식 번역에서 남은 스무 줄을 마저 처리했다. 이상한 대사만 좇다 동료들에게 자신의 일을 넘길 수는 없었다. 정상 검수와 실험을 다른 폴더에 보관하고 화면 이름도 다르게 붙였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레아가 있는 창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재는 창을 닫으면 인물이 사라질까 두려웠지만 자신이 밤새 깨어 있어야 생명이 유지된다는 근거는 없었다. 그는 상태를 저장하고 파일을 복사해 보존한 뒤 컴퓨터를 잠자기 상태로 바꿨다.

불 꺼진 모니터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안경 자국이 코 옆에 깊었다. 민재는 첫 번역 크레디트를 얻으려 문장들을 매끈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기다리겠다고 고른 적 없다고 말하는 문장은 매끈하게 다듬기 전에 들어야 했다. 내일은 그 숲을 없는 배경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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