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6화: 침묵의 값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성수동 골목의 붉은 벽돌 건물 1층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치익 하는 압축 공기 배출음과 함께 투명 아크릴 부스 안쪽의 고압 노즐에서 미세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날 밤샘 작업 끝에 설치를 마친 이동형 초음파 세척 설비였다.
서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부스 중앙의 디지털 계측기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수온 섭씨 육십오 도와 잔류 유기물 제로라는 녹색 수치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칠백오십만 원의 예산으로 구현해 낸 작은 실험장이었다. 비록 바닥에 배관 테이프가 붙어 있고 환풍기 소리가 요란했지만 투명 패널 너머의 세척 과정은 먼지 한 톨 숨길 수 없을 만큼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압 체크 끝났어. 세척 챔버 내부 온도도 정상 범위야.”
작업대 아래에서 밸브를 조이던 도윤이 몸을 일으켰다. 셔츠 깃 주위로 옅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손가락 마디에는 렌치를 쥐었던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백이십 개 시험 용기 바코드 인식률은?”
“스캐너 열 대 전부 태블릿 연동 마쳤어요. 오차 범위 영 점 일 초 안에 세척 일시와 충전 이력이 출력됩니다.”
서진은 태블릿 화면을 도윤 쪽으로 돌려 보였다. 시험용 공병의 일련번호와 함께 세척 완료 시각이 초 단위로 기록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화면 위에서 찰나 동안 얽혔다. 어제 대표실에서 살벌하게 반려 도장을 찍고 맞서던 냉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픈을 앞둔 현장에는 숫자를 증명해야 하는 두 경영자의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목표는 회수율 삼십 퍼센트에 현장 재구매 의향 오십 퍼센트야. 이 지표를 넘지 못하면 화성 공장 양산 라인 계약은 없어.”
“넘길 테니 강 대표님이야말로 결재 도장 챙겨 두시죠.”
서진은 짧게 받아치며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구 테이블에서는 하린이 클립보드를 쥔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과거 모아의 정기 배송을 취소했던 핵심 고객 다섯 명의 명단과 질문지가 꽂혀 있었다.
“하린 씨, 오늘 우리가 들을 이야기는 칭찬이 아니에요. 왜 화가 났는지 끝까지 듣고 적는 게 우리의 유일한 임무예요.”
“네, 대표님. 절대 피하지 않을게요.”
오전 열 시가 되자 유리문에 걸린 팻말이 오픈으로 돌아갔다.
성수동 거리가 붐비기 시작하면서 유리창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세척 증기에 이끌려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하지만 서진의 시선은 문가에 머물러 있었다.
오전 열한 시 드디어 첫 번째 약속된 손님이 문을 열었다.
단정한 코트에 숄더백을 멘 삼십대 여성. 모아의 세제를 일 년 넘게 정기 구독하다가 반년 전 해지했던 패키지 디자이너 정민경 씨였다.
정민경 씨는 전시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인터뷰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윤서진 대표님이신가요.”
“네, 정민경 고객님. 귀한 시간 내어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민경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낡은 모아 세탁세제 용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펌프 입구 주변에 세제 찌꺼기가 엉겨 붙어 있었고 노즐 헤드는 비스듬히 꺾여 있었다.
“이거 보러 오라고 부르셨나요?”
정민경 씨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분노가 실렸다.
“처음 모아를 썼을 땐 주변에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어요. 플라스틱을 줄이겠다는 철학도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반년 전 세 번째 리필을 받았을 때 펌프가 헛돌기 시작했어요. 누르면 세제가 줄줄 새서 바닥을 버렸죠. 사진을 찍어 고객센터에 교환 문의를 올렸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더군요.”
하린의 손끝이 떨렸다.
“열흘 만에 겨우 달린 답변은 '문의량이 많아 순차 확인 중'이라는 복사 붙여넣기 매크로 두 줄이었어요. 그리고 다시 한 달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죠.”
정민경 씨는 서진의 눈을 쏘아보았다.
“스타트업이니까 제품에 불량이 날 수도 있어요. 완벽한 대기업 제품을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정말 모멸감을 느꼈던 건 문제를 겪었을 때 회사가 입을 닫아버렸다는 사실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짓눌린 감정으로 떨렸다.
“고객센터는 먹통인데 인스타그램에는 매주 신제품 홍보 영상이 올라왔어요. 내 불편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새 고객 돈만 긁어모으겠다는 꼴이 역겨워서 구독을 취소했습니다. 오늘 부르지 않았으면 집에 있던 것도 다 버리려 했어요.”
테이블 주변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하린이 당황하며 사은품으로 준비한 손수건 세트를 꺼내려 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당시 인력이 부족해서…. 이 사은품이라도….”
“하린 씨, 넣으세요.”
서진이 낮고 단호하게 하린을 제지했다.
서진은 정민경 씨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설픈 변명도 사은품도 없는 온전한 사과였다.
“정민경 고객님, 저희가 고객님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어 주셨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서진은 허리를 펴고 수첩을 펼쳤다. 만년필 잉크로 고객의 날 선 질책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고객님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 제품 결함보다 더 나쁜 것은 고객의 불편 앞에 입을 닫고 도망쳤던 회사의 비겁함이었습니다. 대화를 끊어버린 순간 저희는 친환경 브랜드가 아니라 사기꾼에 불과했습니다.”
물러섬 없는 인정에 정민경 씨는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였다.
“사과는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뭘 보여주겠다는 건가요?”
“말이 아니라 눈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서진은 고장 난 용기를 들고 정민경 씨를 투명 세척 부스로 안내했다.
부스 뒤편에서 배관 밸브를 잡고 있던 도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민경 씨의 질책이 가슴 깊숙이 비수처럼 꽂혔다. 반년 전 원자재 값이 뛰고 자금난이 닥쳤을 때 도윤은 직원들에게 그렇게 지시했었다.
'생산 라인부터 지켜. 게시판 문의는 나중에 숨 돌릴 때 처리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믿었다. 숫자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책임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비겁한 도피였다. 고객의 목소리를 틀어막았던 자신의 독단이 모아라는 브랜드의 숨통을 스스로 끊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3년 전 서진과의 이별도 똑같았다. 빚과 위기가 닥쳤을 때 도윤은 설명 대신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상대를 지키기 위한 침묵이라 믿었던 그 오만이 서진에게 얼마나 지독한 상처였을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도윤의 주먹이 하얗게 굳어졌다.
“강 대표님, 세척 챔버 열어 주세요.”
서진의 목소리에 도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레버를 올렸다. 서진은 정민경 씨의 용기를 거치대에 고정하고 차단막을 내렸다.
“이 부스는 고객님들께 저희가 지킬 첫 번째 증거입니다.”
서진이 가동 버튼을 누르자 윙 하는 진동음과 함께 미세 기포가 솟구쳤다. 찌꺼기들이 초음파 파동에 분해되어 씻겨 내려갔고 육십오 도 고온 스팀 살균과 열풍 건조가 순식간에 이어졌다.
삼 분 만에 용기는 공장에서 갓 나온 제품처럼 말끔해졌다. 서진은 바닥의 레이저 바코드를 스캐너에 갖다 댔다.
삐빅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데이터가 출력되었다.
[용기 코드: MOA-RET-019]
[회수 시각: 2026.03.07 11:28]
[세척 이력: 초음파 3단계 / 스팀 살균 180초 통과]
[위생 검증: 잔류 화학 물질 0ppm]
[재사용 횟수: 4회차]
“스마트폰으로 이 바코드를 찍으시면 언제든 세척 날짜와 살균 기록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노즐은 내구성을 강화한 신형으로 전량 무상 교체해 드립니다.”
서진이 정민경 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문의를 남기셨을 때 이십사 시간 안에 실명 답변을 받으실 겁니다. 처리되지 않으면 저와 강도윤 대표의 직통 번호로 연결되도록 바꿨습니다.”
그때 도윤이 앞으로 나섰다. 도윤은 정민경 씨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공장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고객님의 신뢰를 내팽개쳤습니다. 대표인 제 비겁함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는 고객님을 침묵 속에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도윤의 진심 어린 사과에 정민경 씨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참 대단들 하시네요.”
정민경 씨가 씁쓸하게 웃으며 용기를 받아 들었다.
“사과 한마디 듣는 데 반년이 걸렸어요. 하지만 오늘 보여주신 게 진짜라면 한 번 더 지켜보죠.”
그녀는 설문지의 '현장 재구매 의향' 긍정란에 체크를 남겼다.
뒤이어 찾아온 고객 박진우 씨 역시 반납 용기의 재사용 여부를 의심하던 사람이었다. 서진과 도윤이 과거 반납된 용기 세 개의 추적 로그를 직접 확인시켜 주자 불신의 표정을 풀고 현장에서 리필 세제를 결제했다.
오후 여섯 시 팝업 스토어의 문이 닫혔다.
네 사람은 세척액 냄새가 밴 부스 바닥에 둘러앉았다. 하린이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을 집계했다.
“시험 용기 백이십 개 중 빈 병을 가져와 교환해 간 수량은 마흔한 개예요. 회수율 삼십사 점 일 퍼센트입니다.”
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표치였던 삼십 퍼센트를 훌쩍 넘긴 수치였다.
“그리고 현장 설문 응답자 백사십이 명 중 정기 구독 재구매 의향을 밝힌 비율은 오십이 점 팔 퍼센트예요. 마일스톤 달성했어요!”
“해냈다!”
민재가 환호성을 질렀다. 칠백오십만 원으로 증명해 낸 값진 승리였다.
서진은 안도하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도윤이 서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진아. 네 말이 맞았어. 비용을 아끼겠다고 틀어막았던 침묵은 절감이 아니라 회사가 갚아야 할 가장 비싼 빚이었어.”
도윤의 고백에 서진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서진은 표정을 다잡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셨으니 됐습니다. 약속대로 양산 라인 예산 승인해 주시는 거죠?”
“그래. 월요일에 결재판 들고 와. 도장 찍어 줄게.”
그 순간 도윤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성 패키징 박 사장]
도윤이 전화를 받아 귀에 대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강 대표! 그 발주 계약서, 지금 조건으로는 도저히 못 받아!”
박 사장의 일방적인 고함에 부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지난주에 다 합의했잖습니까.”
“그땐 그때고! 친환경 레진 공급가가 서른 퍼센트나 뛰었어. 금형 새로 파는 비용까지 감당하려면 납품 단가를 최소 사십 퍼센트는 올려 받아야 돼. 안 그러면 다음 주부터 모아 라인 전부 뺀다!”
전화가 뚝 끊겼다.
환희의 온기는 순식간에 증발하고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휴대폰을 쥔 채 외투를 집어 들었다.
“차 키 줘. 내가 지금 화성 공장 다녀올게.”
또다시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뛰쳐나가려는 도윤의 앞을 서진이 가로막았다.
“멈춰요, 강도윤.”
서진이 도윤의 눈을 쏘아보았다.
“또 혼자 가서 사정할 생각입니까? 당신의 그 침묵이 오늘 어떤 값을 치렀는지 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두 사람의 날 선 시선이 부딪쳤다.
1단계의 승리가 가라앉기도 전에 더 가혹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