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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5화

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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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두 개의 도장

금요일 아침 아홉 시 성수동 모아 사무실의 결재판 위에 붉은색 잉크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반려: 강도윤]

서진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올린 '성수 팝업 리필 데이 인프라 구축 및 긴급 예산 증액 품의서'였다. 기존에 책정되어 있던 사백오십만 원을 일천이백만 원으로 상향 조정해 달라는 요청에 돌아온 답은 한 글자도 적히지 않은 차가운 반려 도장뿐이었다.

서진은 결재판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하게 다려 입은 회색 슬랙스 자락이 걸음마다 서늘하게 스쳤다.

“윤 대표님, 지금 들어가시게요?”

맞은편 자리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탕비실에서 원두를 갈던 민재도 그라인더를 멈추고 불안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보았다.

“네. 도장 잘못 찍으신 것 같아서 확인하러 갑니다.”

서진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답한 뒤 안쪽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대표실 안에는 도윤이 창가 책상에 앉아 엑셀 재무 제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한 단 접어 올린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도윤이 서진을 올려다보았다.

“노크하고 일 초는 기다리는 게 예의 아니었나.”

“사백오십만 원으로 구십 일 안에 사십 퍼센트를 만들라는 요구보다는 내 노크가 훨씬 상식적인 것 같은데요.”

서진은 결재판을 도윤의 키보드 바로 옆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종이 윗부분에 찍힌 붉은 반려 도장이 도윤의 시선에 걸렸다.

“이유는 적어 주셨어야죠, 강 대표님. 브랜드 전권을 넘기겠다고 하신 지 일주일도 안 됐습니다.”

도윤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브랜드 전권과 회사 자금 집행권은 별개야. 그건 서명할 때도 분명히 명시했어.”

“자금 없는 브랜드 전략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번 팝업은 단순한 샘플 나눔 행사가 아니에요. 고객이 빈 병을 가져왔을 때 현장에서 초음파 세척을 거쳐 무균 충전되는 과정을 투명 부스로 보여 줘야 합니다. 바코드 추적 시스템을 도입해서 이 병이 몇 번 재활용되었는지 고객 스마트폰으로 즉시 확인시켜 줘야 하고요.”

서진이 태블릿 화면을 켜서 부스 조감도와 시스템 설계도를 띄웠다.

“지난 삼 년간 모아의 재구매율이 십오 퍼센트까지 곤두박질친 진짜 이유를 몰라서 이럽니까? 친환경을 외치면서 뒤로는 플라스틱 펌프를 쓰고 용기 세척이 찜찜하다는 고객 리뷰를 방치했기 때문이에요. 고객은 바보가 아닙니다. 겉모습만 그럴싸한 친환경 현수막 따위에는 더 이상 돈을 쓰지 않아요.”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도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도윤은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 화면을 서진 쪽으로 돌렸다.

“이 시트 봐. 투자사에서 들어온 시드 자금 십팔억 중에 일차로 집행된 금액은 육억이야. 그중에서 지난달 미지급된 원자재 대금과 공장 생산 예약금, 사무실 보증금과 석 달 치 고정비를 제하면 가용 현금은 이억 원도 남지 않아.”

도윤의 손가락이 붉게 표시된 월간 현금 유출액을 짚었다.

“구십 일이야, 서진아. 한태우가 준 시간은 딱 석 달이라고. 팝업 한 번에 일천이백만 원을 털어 넣었다가 다음 달 원료 수급이 막히면 팝업 결과가 좋아도 양산을 못 해. 회사가 문을 닫으면 네가 세운 멋진 브랜드 철학도 그냥 종이 쪼가리가 되는 거야.”

서진아, 하고 불쑥 튀어나온 호칭에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굳었다.

서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도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호칭 주의하시죠, 강 대표님. 여긴 회의실입니다.”

도윤의 턱 근육이 굳어졌다. 도윤은 헛기침을 삼키며 시선을 모니터로 내렸다.

“미안합니다, 윤 대표님. 어쨌든 결론은 같아. 일천이백만 원 일시 집행은 불가합니다. 사백오십만 원 안에서 해결하세요.”

“사백오십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건 구색 맞추기용 플리마켓 부스 하나 빌리는 것뿐입니다.”

서진의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섰다.

“십오 퍼센트의 고객조차 모아가 진심인지 의심하고 있어요. 이번 팝업에서 확실한 신뢰의 인프라를 증명하지 못하면 구십 일 뒤에 리프랩에 회사 넘겨주고 끝나는 겁니다. 강 대표님은 늘 그런 식이었죠. 눈앞의 숫자를 지키겠다고 가장 중요한 본질을 희생시키는 것.”

서진의 말 끝에 뼈아픈 가시가 돋쳐 있었다. 3년 전 서로의 방식이 달라 부딪히고 결국 도윤이 등을 돌렸던 그날의 기억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윤은 책상 모서리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난 회사를 지키려는 거야. 그때도, 지금도.”

“회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냥 숨는 거겠죠. 책임을 혼자 지는 척하면서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들이지 않는 거.”

서진이 차갑게 맞받아쳤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았다. 팽팽하게 맞선 시선 사이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민재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손에는 두툼한 파일철과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저기… 대표님들? 밖에서 목소리가 성수역까지 들리겠어요.”

민재가 넉살 좋게 웃으며 들어와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 뒤를 이어 하린도 파일 하나를 가슴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민재 씨, 공장 쪽 견적 나왔습니까?”

도윤이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민재는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어. 방금 화성 공장장님이랑 통화 끝냈거든. 윤 대표님이 요청하신 긴급 초음파 세척 라인하고 시험 용기 백이십 개 바코드 각인 비용 말이야.”

민재는 형광펜으로 칠해진 항목을 가리켰다.

“공장 측에서 기존 라인을 일부 조정해 주는 조건으로 세척 공정 단가를 삼백만 원 낮춰 주기로 했어. 대신 조건이 있어. 이번 팝업 끝나고 일주일 안에 본 발주 이천 개를 확정해 줘야 한다는 거야.”

서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인프라 구축비가 일천이백만 원에서 구백만 원대로 내려간다는 뜻이네요.”

“맞아요. 그리고 제가 조사한 사전 설문 데이터도 있어요.”

하린이 서진과 도윤 앞으로 태블릿을 내밀었다. 어젯밤 모아 공식 계정에 올렸던 '당신이 용기 리필을 망설이는 이유'에 대한 백오십 명의 사전 응답 결과였다.

“놀랍게도 가격이나 번거로움보다 '이전 사람이 쓰던 용기가 제대로 소독되었는지 불투명하다'는 응답이 육십칠 퍼센트였어요. 고객들은 돈을 더 내더라도 완벽하게 검증된 세척 과정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해요. 윤 대표님이 말씀하신 투명 세척 부스가 없으면 리필 참여율 자체가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하린의 차분하고 논리적인 보고에 도윤의 시선이 화면 속 통계 그래프에 머물렀다.

현실적인 숫자를 누구보다 신뢰하는 도윤이었다. 하린이 가져온 데이터는 서진의 기안이 단순한 감상적 브랜딩이 아니라 고객의 핵심 구매 저항을 없애는 필수 장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도윤은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진은 도윤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서진은 한 걸음 물러서며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마일스톤 방식으로 가죠.”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마일스톤?”

“예산을 한 번에 다 집행하지 않겠습니다. 팝업 현장 설비와 바코드 시스템 구축비로 우선 칠백오십만 원만 일차 집행해 주세요.”

서진은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팝업 당일 목표 지표를 설정합니다. 방문 고객의 용기 회수율 삼십 퍼센트 그리고 현장 인터뷰 응답자의 재구매 의향 오십 퍼센트. 이 두 가지를 달성하면 즉시 이천 개 양산 라인 확장 예산과 잔여 마케팅비를 결재하는 겁니다. 지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팝업 후속 예산은 전액 삭감하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도윤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위험을 분산하면서도 성과와 자금 집행을 철저히 연동하는 방식이었다. 투자사나 이사회를 설득할 때 도윤 자신이 가장 자주 쓰던 정석적인 재무 모델링이었다.

도윤은 서진이 내민 기안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꼼꼼하게 정리된 예상 지출 항목과 리스크 헤징 계획이 서진의 빈틈없는 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칠백오십만 원. 그리고 회수율 삼십 퍼센트에 재구매 의향 오십 퍼센트.”

도윤이 중얼거리며 서진을 바라보았다.

“달성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는 없어. 한태우에게 보고할 데이터도 이걸로 끝이야.”

“달성합니다. 제가 기획했으니까요.”

서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윤은 책상 서랍에서 검은색 만년필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품의서 하단에 숫자를 칠백오십만 원으로 수정한 뒤 자신의 이름을 적고 정갈하게 도장을 찍었다.

도윤이 서류를 서진 쪽으로 밀었다.

“공동대표 서명란 채워.”

서진은 가방에서 가죽 필통을 꺼내 자신의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은색 클립이 달린 짙은 녹색 바디의 만년필. 4년 전 서진이 첫 대행사 팀장으로 승진했을 때 도윤이 축하 선물로 건넸던 바로 그 펜이었다.

도윤의 시선이 서진의 손끝에 닿았다. 서진은 펜촉을 종이에 대고 거침없이 서명했다. 획의 마지막 끝을 살짝 위로 올려 맺는 특유의 필체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대표실 안을 채웠다. 서진이 서명을 마치고 도윤의 도장 바로 옆에 자신의 결재인을 단정하게 찍었다.

나란히 찍힌 두 개의 붉은 인주 자국. 그 아래로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이 비로소 하나의 공식 문서로 묶였다.

“됐습니다. 이걸로 팝업 인프라 발주 넣겠습니다.”

서진이 서류를 챙겨 들었다. 도윤은 펜 뚜껑을 닫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장장님한테는 내가 연락해 둘 테니까 세부 일정은 민재랑 조율해.”

“감사합니다.”

서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돌아서려 할 때 도윤이 덧붙였다.

“서진아.”

이번에는 업무적인 딱딱함이 아닌 아주 낯익은 온도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진이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샌드위치, 다 먹었더군.”

서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젯밤 도윤이 두고 간 호밀 바질 샌드위치 은박지가 탕비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것을 본 모양이었다.

서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버리기 아까워서 먹었을 뿐이에요. 앞으론 사 오지 마세요.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서진은 문을 열고 대표실을 나왔다. 등 뒤로 도윤의 묵직한 시선이 끝까지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사무실로 돌아온 서진은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하린이 다가와 인쇄된 A4 용지 몇 장을 건넸다.

“대표님, 아까 말씀하신 팝업 현장 인터뷰 대상자 리스트예요. 과거에 모아 제품을 정기 구독하다가 최근 육 개월 사이에 구독을 취소한 핵심 고객 스무 명에게 연락을 돌렸는데요.”

서진이 명단을 훑어내렸다. 이름 옆에 적힌 취소 사유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향이 변했다', '용기가 샐 때 본사의 대응이 없었다', '친환경이라더니 결국 마케팅 상술이었다'.

서진의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어졌다.

“이분들 중 이번 토요일 팝업에 오실 수 있는 분이 몇 명이나 되나요?”

“다섯 분이 오겠다고 하셨어요. 직접 따지러 오겠다는 분도 계시고요.”

하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진은 명단 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화려한 무대나 달콤한 홍보 문구 뒤에 숨는 것은 끝났다. 분노한 진짜 고객들과 마주 서서 모아의 진심을 증명해야 할 시간이었다.

90일이라는 초시계 위에서 첫 번째 거친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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