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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4화

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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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구십 일의 조건

목요일 오후 성수동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일주일 뒤로 다가온 성수 팝업 리필 데이의 일정표가 빼곡했다. 하린은 고객 인터뷰 항목을 수정하며 자판을 두드렸고 민재는 생산실에서 가져온 샘플 병들을 작업대에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유리문 너머로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사전 약속 없는 방문객이었다.

말끔하게 다려진 짙은 감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에는 아무런 메모도 적히지 않은 얇은 태블릿 하나만 들려 있었다. 시드 투자사 파트너 한태우였다.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네요.”

한태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사무실 안의 모든 소음을 단번에 멎게 만들었다. 하린이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재는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서진은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안쪽 대표실에 있던 도윤도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왔다.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 도윤의 셔츠 깃 위로 미세한 긴장이 스쳤다.

“한 파트너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도윤이 먼저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한태우는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놓으며 시선을 서진에게로 돌렸다.

“윤서진 대표님, 정식 취임 축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류진 에이전시에서 명성이 자자하셨던 분이라 기대가 큽니다.”

“감사합니다, 한 파트너님.”

서진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축하만 전하러 오신 건 아닌 것 같네요.”

“역시 빠르시군요.”

한태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 쪽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두 공동대표님과 차 한잔 마시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 같아서요.”


회의실 문이 닫히자 한태우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화면에 붉은색 꺾은선 그래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난 분기 모아의 재구매율입니다. 십팔 퍼센트. 지난달에는 십오 퍼센트까지 떨어졌더군요.”

한태우의 손가락이 화면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매달 빠져나가는 운영비와 고정비, 그리고 바닥을 향해 가는 현금 흐름도가 붉은 숫자로 번뜩였다.

“십팔억 원의 시드 자금이 집행되기 시작했지만 이 상태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대행사 출신 브랜딩 전문가가 오셨으니 기대를 걸어 봅니다만 시장은 감상적인 철학을 기다려 주지 않아요.”

서진이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어떤 말씀을 하려는지 본론부터 듣고 싶습니다.”

한태우는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밀어 놓았다.

“투자 계약서 제십사조에 명시된 성과 검토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통지서입니다. 오늘부터 정확히 구십 일입니다.”

도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계약상 성과 평가는 십이개월 기준이었습니다. 구십 일 만에 우선매수권 조항을 거론하는 건 계약 취지에 어긋납니다.”

“계약서를 다시 보시죠, 강 대표님.”

한태우의 어조는 낮고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십이개월은 최종 만기일 뿐이고 제십사조 삼항에는 '초기 분기 내 핵심 경영 지표가 현저히 악화될 경우 투자자는 우선매수권 및 경영권 처분 협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모아의 재구매율 추락은 그 요건에 충분히 부합합니다.”

한태우가 태블릿을 서진 쪽으로 돌렸다.

“구십 일 안에 재구매율을 사십 퍼센트까지 끌어올리세요. 그리고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고객이 실제로 모아의 리필 시스템을 신뢰하고 정기적으로 구매한다는 객관적 지표를 증명하십시오.”

“사십 퍼센트요?”

서진이 눈썹을 치켜떴다. 소비재 스타트업에서 단 석 달 만에 재구매율을 십오 퍼센트에서 사십 퍼센트로 올리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할인 쿠폰을 퍼붓고 일회성 이벤트를 벌이면 숫자야 일시적으로 띄울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브랜드의 신뢰를 갉아먹는 방식입니다. 제가 만들려는 건 숫자를 속이는 마케팅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 대표님께 전권을 드린 겁니다.”

한태우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서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방법은 대표님들이 고민하실 문제고 저희 투자사는 결과만 봅니다. 구십 일 뒤 사십 퍼센트를 넘기지 못한다면 이사회에 경영권 매각 안건을 즉시 상정하겠습니다. 이미 모아의 유통망과 고객 데이터를 매력적으로 보고 있는 대기업 원매자들이 줄을 서 있거든요.”

원매자라는 단어에 도윤의 턱 근육이 굳었다.

“리프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윤의 직설적인 질문에 한태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로운 눈으로 서진과 도윤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선택지는 두 분 손에 있습니다. 브랜드를 증명해서 독립 경영을 지키든가 아니면 더 큰 자본에 회사를 넘기고 안전하게 엑시트하든가. 구십 일 뒤에 뵙겠습니다.”

한태우는 태블릿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그는 서진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윤 대표님, 전 직장인 류진의 유건 이사님도 대표님의 이번 도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계시더군요.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유리문이 닫히고 사무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회의실 안에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서류 봉투만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서진은 서류를 집어 들고 첫 장을 넘겼다. '경영 지표 개선 요구 및 조건부 인수 협상 개시 통지서'. 명확한 법적 문구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유건 이사 이름은 왜 나오는 거지?”

서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도윤은 창가에 서서 도로를 내려다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업계가 좁으니까. 한태우 파트너는 처음부터 모아를 키울 생각이 없었던 거야. 리프랩 같은 대기업에 프리미엄을 붙여 넘기는 게 그 사람 목표지.”

도윤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분노가 섞여 있었다.

서진은 서류를 덮고 도윤의 등 뒤를 응시했다.

“알고 있었어?”

도윤이 천천히 돌아섰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위험이 있다는 건 알았어. 그래서 공동대표 조항에 서명할 때 경영 전권을 네게 넘기도록 조항을 밀어붙인 거고.”

“도윤 씨.”

서진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야. 한태우가 리프랩과 뒤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고도 이 투자를 받은 거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도윤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장 지난달 직원들 급여와 공장 결제 대금이 막혀 있었어. 십팔억이 들어오지 않으면 모아는 문을 닫아야 했어. 내가 막을 수 있는 건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어.”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등 뒤로 숨기는 도윤의 오랜 버릇이 보였다. 3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서운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90일이라는 초시계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했다.

“좋아. 이유는 나중에 듣겠어.”

서진은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가 마커를 들었다.

“한태우는 우리가 단기 이벤트로 발악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길 바라고 있어. 그래야 손쉽게 리프랩에 회사를 넘길 테니까.”

서진은 보드에 커다랗게 'D-90'이라고 적었다.

“우리가 보여 줄 건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야. 일주일 뒤 성수 팝업에서 시작해. 백이십 개 리필 용기에 회수 날짜와 세척 검증 이력을 붙여서 고객에게 직접 내밀 거야. 고객이 그 이력을 확인하고 '이 브랜드라면 믿고 계속 쓰겠다'고 답하는 비율을 첫 번째 데이터로 만들겠어.”

도윤의 시선이 화이트보드의 숫자에 닿았다.

“백이십 개로는 부족해. 팝업 반응이 좋으면 곧바로 이천 개 규모의 양산으로 넘어가야 해. 그러려면 금형 수정과 추가 세척 라인 확보 예산이 필요해.”

“사백오십만 원 한도로는 어림도 없겠네.”

“그래. 하지만 구십 일 안에 사십 퍼센트를 만들려면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해.”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표 대 대표의 시선이었다.

“예산 문제는 팝업 결과 보고 논의해. 일단은 일주일 뒤 토요일에 집중해.”

서진의 말에 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생산 쪽은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일정 맞춰 놓을 테니까.”


밤 열한 시가 넘은 모아 사무실. 창밖의 성수동 골목길은 인적이 끊겨 한산했다.

민재는 생산실 작업대에서 돋보기를 낀 채 향료 배합 일지를 대조하고 있었다. 한 묶음의 서류철에서 날짜와 서명이 비어 있는 페이지를 발견할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걸 지금 터뜨리면 안 되는데….”

민재는 마른세수를 하며 일지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90일이라는 시한폭탄이 떨어진 마당에 제품 안전성 기록에 빈칸이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모아는 당장 내일이라도 무너질 수 있었다.

한편 자리에서 짐을 싸던 하린은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리프랩 인사팀에서 보낸 메일 하단에는 붉은색 글씨로 회신 마감 시한이 적혀 있었다.

[채용 확정 통보를 위한 최종 회신 기한: 3월 둘째 주 월요일 18:00까지]

성수 팝업 리필 데이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하린은 가방 끈을 꽉 쥐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망할지 모르는 불안한 스타트업과 안정적인 대기업의 보장된 연봉 사이에서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하린 씨.”

등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하린은 화들짝 놀라며 화면을 닫았다.

서진이 따뜻한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 윤 대표님.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이것만 정리하고 가려고요. 아까 하린 씨가 넘겨준 인터뷰 질문지 봤어요.”

서진은 머그잔 하나를 하린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달콤한 유자차 향이 퍼져 나왔다.

“'용기를 반납할 때 가장 불편했던 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아주 좋았어요. 대개는 브랜드 칭찬을 유도하는 질문을 넣는데 하린 씨는 고객의 진짜 불편을 건드렸더군요. 본질을 찌르는 좋은 기획이에요.”

칭찬을 들은 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그냥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토요일에 현장에서 고객들 만날 때 하린 씨가 직접 물어봐 줘요. 하린 씨의 질문이 이번 실험의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 될 테니까요.”

서진의 맑고 곧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하린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믿고 맡겨 주는 리더를 뒤로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서진이 다시 대표실로 향하려 할 때 대표실 문이 열리며 도윤이 걸어 나왔다.

도윤은 외투를 챙겨 입은 채 서진의 책상 위에 작은 메모지 한 장과 테이크아웃 샌드위치를 올려놓았다.

“저녁 안 먹었잖아. 먹고 해.”

서진이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윤 씨는 퇴근해?”

“공장장님 만나러 가. 팝업 끝나고 바로 돌릴 수 있는 리필 라인 견적이라도 미리 뽑아 놔야 하니까.”

도윤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며 짤랑이는 도어벨 소리만 길게 여운을 남겼다.

책상 위에 놓인 샌드위치는 서진이 야근할 때 즐겨 먹던 호밀 바질 샌드위치였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사소한 기억들이 서진의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건드렸다.

서진은 샌드위치를 바라보다가 화이트보드의 'D-90'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90일이라는 가혹한 시험대 위에서 그들은 회사를 지켜내고 서로의 존재를 다시 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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