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6화 [약속의 칸]
오후 네 시 반, 현관 도어록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엄마! 나 수첩에 나뭇잎 다섯 개나 붙였어!”
하린의 뺨은 가을 햇볕에 붉게 익어 있었다. 가방에는 아침에 도현이 건네준 식물 관찰 수첩이 꽂혀 있었다.
윤서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정말? 예쁜 잎 많이 찾았어?”
“응! 빨간 단풍잎이랑 노란 은행잎! 선생님이 칭찬도 해주셨어.”
신발을 벗은 하린은 거실 카펫에 엎드려 수첩을 펼쳤다. 마른 잎사귀들이 정성스레 붙어 있었다. 하린이 연필로 그 아래 작은 네모 칸을 그렸다.
“이건 뭐야, 하린아?”
“아빠 보여줄 칸이야. 아침에 아빠가 모자 갖다줬잖아. 그래서 아빠 칸도 하나 더 만들었어.”
아이의 해맑은 말에 윤서는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문턱 앞에서 수첩을 건네던 도현의 얼굴이 스쳤다. 벽 하나를 두고 살게 된 후 아이는 두 집의 경계를 자기 방식으로 이어 붙이려 애쓰고 있었다.
“저녁 먹고 아빠한테 사진 찍어 보내자. 지금은 배고프지? 엄마가 된장국 끓여줄게.”
“응! 두부 많이!”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친 하린은 피로 탓인지 일찍 눈을 깜빡였다. 여덟 시 반이 되기 전에 아이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윤서는 하린의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거실 식탁 위에는 주황색 스탠드 불빛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파란색 세 칸 노트를 올려놓은 윤서는 업무 다이어리를 펼쳤다. 다음 주 월요일 라운지 리모델링 주민 투표가 통과되면 계약 체결과 현장 실측이 시작된다.
하린을 돌보며 독립 스튜디오를 꾸리는 일상은 살얼음판 같았다.
오늘처럼 준비물이 바뀌거나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모든 일정이 흔들린다. 옆집 도현의 존재는 비상시 안전장치였지만 규칙 없는 도움은 언제든 과거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징징.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 하린이 잠들었어? 아침에 얘기했던 비상 시간표 말이야. 통화로 할까 아니면 메모를 먼저 보낼까?
군더더기 없는 도현의 문자였다. 윤서는 자판을 두드렸다.
- 통화로는 항목 맞추기 번거로워. 20분만 식탁에서 마주 보고 적자. 하린이 자니까 조용히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조용한 기척이 들렸다.
현관문을 열자 감청색 셔츠 차림의 도현이 서 있었다. 손에는 검은색 바인더와 볼펜이 들려 있었다.
“들어와.”
도현은 구두코를 문 쪽으로 돌려놓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섰다. 겉옷을 벗거나 집 안을 둘러보는 일 없이 곧장 윤서가 가리킨 식탁 의자에 앉았다.
등을 세우고 앉은 도현이 바인더를 내려놓았다.
“하린이는 잘 자?”
“응. 눕자마자 잠들었어.”
윤서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작은 식탁 위로 세 칸 노트와 바인더가 나란히 놓였다.
“아침에 네가 말한 비상 돌봄 기준, 나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윤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옆집 산다고 급할 때 무작정 부르는 건 곤란해. 비상의 기준이 모호하면 결국 한쪽이 선의로 희생하고 감정 싸움이 돼. 어디까지가 비상이고 누가 어떻게 대처할지 확실히 정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인더를 펼쳤다. 격자 노트 위에 적힌 근무표가 보였다.
“동의해. 성수 현장은 내가 총괄이라 돌발 상황이 생기면 이동이 자유로운 편이야. 하린이가 아침에 열이 나거나 유치원에서 연락이 오면 1차 연락처를 나로 지정하는 게 어떨까 해. 네가 미팅 중일 때보다는 내가 바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도현의 제안은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럼 네 일은 어떻게 해? 하린이 아플 때마다 네가 1순위로 빠지겠다고 하면 처음 몇 번은 가능해도 결국 회사 눈치 보게 돼. 예전에도 그랬잖아.”
‘예전에도 그랬잖아.’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결혼 생활 당시 도현은 야근과 출장을 홀로 감당하며 짐을 나누지 않았다. 결국 지쳐 쓰러졌고 윤서는 그 일방적 헌신 뒤에 남겨졌던 외로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랑은 달라, 윤서야.”
도현이 목소리를 낮추어 차분하게 말했다.
“그때는 내가 말을 안 하고 혼자 결정했어. 하지만 지금은 네 동의를 구하는 중이야. 내가 현장을 비울 수 없는 날이면 일정표를 미리 공유할게. 감당할 수 있는 날에만 1순위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야.”
윤서는 도현의 눈을 응시했다. 변명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하려는 눈빛이었다.
“좋아. 그럼 조건을 달자.”
윤서는 세 칸 노트 빈 페이지 상단에 글자를 적었다.
[비상 돌봄 임시 합의안]
“첫째, 돌발 발열이나 부상 시 연락처는 오전과 오후로 나눠.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현장이 가까운 네가 1순위. 오후 1시 이후 하원 시간대에는 내가 1순위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호출을 전담하지 않아.”
도현이 볼펜을 쥐고 자신의 노트에 받아 적었다.
“동의해. 오전 연락을 받으면 지체 없이 문자로 공유할게.”
“둘째, 긴급 야근으로 인한 대리 하원.”
윤서가 펜촉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최소 하원 두 시간 전, 그러니까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일정 변경을 알려야 해. 갑자기 퇴근길에 전화해서 맡아달라고 하면 안 돼. 그리고 대리 하원을 하더라도 하린이를 데리고 있는 시간은 저녁 9시를 넘기지 않아.”
“9시 이후는?”
“그때까지 보호자가 오지 못하면 비상 돌봄 도우미를 부르거나 사전에 합의된 연장 돌봄을 진행해. 상대방 저녁을 무제한으로 빼앗을 수는 없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9시 상한선에 동의해.”
“셋째, 주거 공간의 분리.”
윤서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비상 돌봄으로 하린이가 202호에서 밥을 먹더라도 잠은 무조건 201호 자기 방 침대에서 자야 해. 하린이가 두 집의 차이를 헷갈리지 않게 하려면 취침 공간은 흔들리면 안 돼.”
도현은 잠시 펜을 멈추었다가 이내 순순히 적어 내려갔다.
“알았어. 아이가 잠들기 전에 반드시 201호로 보낼게.”
“마지막으로 비용 문제야. 비상 진료비, 응급실 비용, 돌발 약값은 영수증을 공유하고 매월 말일에 5대 5로 정산해. 양육비와는 완전히 별개로 처리해.”
도현이 고개를 들어 윤서를 보았다.
“비상 치료비 정도는 내가 다 낼 수 있어.”
“도현아.”
윤서가 낮게 말을 잘랐다.
“우린 다시 부부가 된 게 아니야. 공동 양육자로서 대등하게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는 관계야. 네가 돈을 다 내면 나중에 네가 우선권을 주장하거나 내가 미안해서 끌려다니게 돼. 정확하게 반씩 나눠.”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운해하기보다 명확한 기준이 주는 단단함을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5대 5로 정산하자.”
두 사람은 세 칸 노트에 합의한 네 가지 조항을 정리했다.
- 돌발 발열 연락: 오전 도현, 오후 윤서 1순위 지정.
- 대리 하원 요청: 당일 오후 2시 이전 통보 원칙, 돌봄 상한 저녁 9시 준수.
- 취침 공간 원칙: 비상 상황이라도 하린의 취침은 201호에서 진행.
- 비상 의료비: 매월 말일 영수증 기준 5:5 균등 정산.
윤서가 먼저 노트 하단에 서명하고 도현 쪽으로 밀었다.
도현이 서명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달칵.
조용한 거실에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작은방 문으로 향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잠옷 차림의 하린이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품에는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하린아?”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린은 식탁에 마주 앉은 윤서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 아빠……?”
도현은 펜을 내려놓고 즉시 몸을 낮추어 다가갔다.
“하린아, 깼어? 목말라?”
하린은 도현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며 물었다.
“아빠, 우리 집에 있었어?”
“응. 엄마랑 유치원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잠깐 왔어.”
하린이 도현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빠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순간 거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아이의 순수한 질문은 옛날의 한집 생활을 떠올리고 있었다.
도현이 부드러우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하린아. 아빠는 오늘 아빠 집에서 잘 거야.”
하린이 눈을 깜빡였다. 도현은 아이의 작은 손을 감싸 쥐며 설명했다.
“아빠 집은 바로 옆집 202호잖아. 아빠 방에 침대랑 하린이 책상 있는 거 봤지? 아빠는 하린이가 유치원에서 재미있게 놀았는지 엄마랑 이야기하고 이제 아빠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거짓말도 회피도 없었다. 헛된 기대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아이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윤서도 곁으로 다가가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하린아, 엄마랑 아빠는 하린이가 안전하게 유치원 다닐 수 있게 시간표 정하고 있었어. 아빠는 아빠 집에서 자고 엄마는 하린이랑 여기서 잘 거야. 목마르지? 물 줄게.”
윤서가 건넨 물을 하린은 꿀꺽꿀꺽 마셨다. 아빠가 자고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깐 아쉬움이 스쳤지만 부모가 차분하게 설명해 주자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럼 아빠 내일 아침에도 옆집에 있어?”
“그럼. 내일 아침에도 아빠는 202호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하린이는 엄마랑 편안하게 푹 자.”
“응. 잘 자, 아빠.”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는 하린을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손을 잡아주자 아이는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온 윤서는 멈춰 섰다.
도현은 의자를 넣어 두고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식탁 위에는 서명이 끝난 세 칸 노트가 놓여 있었다.
“서명 다 했어.”
도현이 현관 조명 아래에서 말했다.
“하린이 앞에서 당황하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바로잡아줘서 고마웠어.”
“아니야. 네가 먼저 명확하게 말해줘서 다행이었어.”
윤서가 진심으로 대답했다.
아이에게 막연한 기대를 주지 않고 단호하게 경계를 지켜준 도현의 태도가 고마웠다.
“이거, 네 복사본이야.”
도현이 바인더에서 뜯어낸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네 가지 조항이 빠짐없이 적힌 자필 사본이었다.
“내 건 내가 챙겼어. 벽에 붙여둘게.”
“그래. 나도 냉장고에 붙여둘게.”
윤서가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가볼게.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 계약 잘 끝내.”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도현이 복도로 발을 내딛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현관문 너머로 202호 도어록을 누르는 짧은 신호음과 문 닫히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불과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거리 안에는 분명한 벽과 각자의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
윤서는 거실로 돌아와 세 칸 노트를 집어 들었다.
하린이 그린 수첩의 네모 칸처럼 두 사람의 생활에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새로운 칸이 생겨났다. 그 칸은 다시 가족이 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아이를 온전히 지탱하기 위한 약속의 칸이었다.
윤서는 메모지를 냉장고 문에 단단히 고정했다.
시원한 가을밤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새로운 계절과 치열한 현장이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