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5화 [아침의 노크]
금요일 아침 8시 15분, 201호 거실은 분주한 발소리로 가득 찼다.
윤서는 싱크대 앞에서 하린의 보온 물병에 미온수를 채우며 벽걸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노란 초침이 빠르게 돌고 있었다. 8시 40분이면 유치원 셔틀버스가 모과하우스 앞 골목 어귀에 도착한다.
오늘은 하린의 유치원에서 가을맞이 숲체험 활동을 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가정통신문으로 당부된 준비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숲 모자, 식물 관찰 수첩, 색연필, 여벌 양말, 비상 알레르기 약.’
“하린아, 양말 신었어? 가방에 관찰 수첩 넣어야 해.”
“응! 양말 신었어!”
작은방에서 쪼르르 달려 나온 하린은 노란색 숲체험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발에는 앙증맞은 꽃무늬 양말이 신겨 있었지만 손에는 수첩 대신 장난감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인형은 가방에 안 들어가. 유치원 다녀와서 놀자.”
윤서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현관 신발장 옆에 놓인 하린의 노란 토끼 가방 지퍼를 열었다.
보온 물병을 가방 옆주머니에 꽂은 뒤 안쪽 포켓을 확인하던 윤서의 손끝이 문득 멈췄다.
안주머니에서 잡힌 것은 얇은 종이 수첩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검은색 네오프렌 파우치였다.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에 윤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파우치를 꺼냈다.
지퍼를 열자 작은 디지털 액정이 달린 소형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회로 기판용 센서 칩들이 가지런히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윤서는 멍하니 파우치 안의 공구들을 내려다보았다. 기기 겉면에 은색으로 작게 각인된 영문 이니셜이 눈에 들어왔다.
K.D.H.
강도현의 작업용 정밀 계측 파우치였다.
순간 수요일 저녁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린이 202호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올 때 도현은 하린의 가방 안에 양말과 물티슈를 챙겨 넣었다고 말했다. 그때 도현이 자신의 작업용 파우치와 하린의 검은색 관찰 수첩 지퍼백을 착각해 바꿔 넣은 것이 분명했다. 둘 다 크기와 재질이 거의 똑같은 방수 파우치였다.
“하린아, 수요일에 아빠 집에서 관찰 수첩 꺼냈었어?”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한테 다람쥐 스티커 자랑하려고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윤서는 시계를 보았다. 8시 22분.
셔틀버스 도착까지 18분 남았다. 오늘 숲체험은 관찰 수첩에 도장을 찍으며 이동하는 수업이라 수첩이 없으면 아이 혼자 활동에서 겉돌게 된다.
‘전화를 해야 하나?’
윤서는 휴대폰을 쥐었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 밤 통화에서 세웠던 규칙이 떠올랐다.
‘사전 합의 없는 무단 연락이나 방문 금지. 아이 관련 필수 사항은 텍스트로 간결하게.’
지금 문자를 보내고 도현이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직접 202호 문을 두드리러 가야 할지 망설이며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 똑.
현관문 너머에서 맑고 일정한 두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 벨소리가 아닌 조심스럽고 단정한 손마디의 울림이었다.
윤서와 하린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문으로 쏠렸다.
“엄마, 누구야?”
하린이 눈을 깜빡였다. 윤서는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 옆 인터폰 모니터 화면을 터치하자 푸른 화면 속에 도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출근용 감청색 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도현은 손에 하린의 다람쥐 스티커가 붙은 검은색 지퍼백과 노란 챙모자를 들고 서 있었다.
윤서는 인터폰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도어록 손잡이를 내리고 문을 열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현은 현관 문지방에서 정확히 반 걸음 물러선 채 서 있었다. 201호 집 안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고 오직 문턱 아래의 바닥만 응시하던 그가 윤서가 문을 열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약속 어기고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숨결에는 미세한 서두름이 묻어 있었다.
“출근 가방 챙기다가 내 파우치가 없는 걸 봤어. 책상 위에 하린이 관찰 수첩이랑 모자가 남아 있더라. 전화하고 기다리기엔 셔틀버스 시간이 15분밖에 안 남아서.”
도현은 손에 든 지퍼백과 챙모자를 윤서에게 건넸다.
“아빠!”
현관 안쪽에서 하린이 활짝 웃으며 뛰어나왔다.
“하린아, 현관에서는 뛰지 마.”
도현은 다정하게 말하면서도 발을 문 안쪽으로 들이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굽혀 하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하린아, 아빠가 수요일에 가방 잘못 챙겨서 미안해. 수첩이랑 모자 여기 있어.”
“우와, 내 다람쥐 수첩이다! 고마워, 아빠!”
하린이 모자를 받아 머리에 얹자 윤서는 거실에서 챙겨 온 도현의 측정기 파우치를 내밀었다.
“이거, 네 거 맞지?”
도현이 파우치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스칠 뻔했지만 닿지 않았다.
“고마워. 바로 현장 가야 해서 꼭 필요했거든.”
윤서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8시 28분이었다.
“하린아, 신발 신자. 버스 늦겠다.”
“응!”
하린이 노란 운동화에 발을 꿰어 넣는 동안 도현은 묵묵히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 두었다. 세 사람은 복도로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좁은 공간 안에는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린은 양손으로 엄마와 아빠의 손을 각각 잡으려다 윤서가 한 손에 유치원 가방을 고쳐 메자 아빠의 손만 살며시 쥐었다. 도현은 아이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면서도 윤서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벽 쪽에 붙어 섰다.
1층 현관을 나서자 초가을 아침의 맑고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모과하우스 앞 골목길을 따라 세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하린이 가운데 서고 양옆에 윤서와 도현이 섰다. 하린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발걸음을 가볍게 굴렸다.
“엄마, 오늘 숲에서 도토리 찾으면 아빠한테도 하나 줘도 돼?”
“도토리는 다람쥐 밥이라 숲에 두고 와야 해. 대신 예쁜 나뭇잎 찾아와.”
“응! 나뭇잎 찾아서 수첩에 붙일 거야.”
하린의 재잘거림 뒤로 골목 저편에서 노란색 유치원 셔틀버스가 비상등을 켜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는 골목 어귀 안전 펜스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유치원 인솔 교사가 문을 열고 내렸다.
“하린이 안녕! 오늘도 일찍 나왔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린이 씩씩하게 인사하며 버스 계단으로 발을 올렸다. 도현이 뒤에서 하린의 가방 밑부분을 살짝 받쳐 주며 안전하게 올려보냈다.
“하린아, 조심해서 다녀와. 친구들이랑 손 잘 잡고.”
도현이 손을 흔들자 버스 창가 자리에 앉은 하린이 활짝 웃으며 창문을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윤서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셔틀버스 문이 닫히고 노란 버스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사라졌다.
버스의 후미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골목길에는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침 출근길을 서두르는 이웃들의 발걸음 소리와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은행나무 잎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았다.
윤서와 도현은 모과하우스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하린이라는 완충 지대가 사라지자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자연스럽게 두 걸음 정도로 벌어졌다.
“아까는 고마웠어.”
윤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안 가져왔으면 오늘 아침에 꽤 난감했을 거야. 규칙 생각하느라 문자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거든.”
도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을 보며 걸었다.
“나도 망설였어. 네가 불쾌해할까 봐.”
“불쾌하진 않았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윤서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혼 후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완벽하게 꾸려가려 했던 일상이었다. 하지만 여섯 살 아이를 키우는 생활은 아무리 정교한 계획을 세워도 오늘 아침처럼 사소한 변수로 순식간에 흔들린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이런 돌발 상황이 생길 때마다 매번 경직된 규칙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도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 키우다 보면 아침에 갑자기 열이 나거나 준비물이 바뀌는 일이 계속 생길 텐데 그때마다 문자로 묻고 답을 기다리는 건 비효율적이야. 비상 상황에서 연락하는 방법이나 예외적인 돌봄 규칙을 따로 정해 두는 게 좋겠어.”
윤서는 도현의 옆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문제를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시스템과 해결책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서운하고 차갑게 느껴졌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필요한 합리성이었다.
“맞아. 비상시 연락이랑 대처 기준은 시간표에 따로 명시해 두는 게 낫겠네.”
윤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모과하우스 1층 로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윤서는 자동문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전날 오후 오세라 대표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빌라 202호 입주자가 그쪽 대기업 엔지니어링 전문가더라고요. 무보수로 설비 설계를 도와주겠다고 해서…….’
윤서는 돌아서서 도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현아.”
도현이 걸음을 멈추고 윤서를 마주 보았다.
“어제 오세라 대표님 만났어. 1층 라운지 리모델링 기획 면접이었거든.”
도현의 눈동자에 엷은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윤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202호 입주자가 라운지 스마트 조명이랑 원격 제어 설비 자문을 무보수로 맡아주기로 했다고.”
윤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명확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걸 알고 일부러 끼어든 거야?’
도현은 윤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표님이 빌라 단체 대화방에서 스마트 도어록이랑 조명 제어기 교체 조언을 구하길래 의견 몇 개 적어준 적이 있어. 그러다 1층 라운지 공사 얘기가 나왔고 관리비를 아끼려면 기존 배선을 살려 자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돕겠다고 한 거야.”
도현은 한숨을 얇게 내쉬며 덧붙였다.
“공간 설계를 네가 맡을 거라는 건 나중에 들었어. 하지만 네가 신경 쓰인다면 세라 대표님한테 다른 외부 업체를 연결해 주겠다고 말할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윤서는 망설임 없이 말을 잘랐다.
“주민 투표 거쳐서 정당하게 통과되면 이건 내 정식 수주 프로젝트야. 네가 입주민 자격으로 자문하는 거라면 굳이 빠질 이유는 없어. 다만 일은 일로만 대했으면 좋겠어. 내 설계에 사적인 배려나 불필요한 도움을 얹으려 하지 마.”
도현은 윤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도면을 존중할 거고 설비 안전이랑 규격 검토 외에는 어떤 간섭도 안 해. 네 일이야, 윤서야.”
‘네 일이야.’
그 말 한마디가 윤서의 가슴 한구석을 묘하게 건드렸다.
도현은 더 이상 윤서의 영역을 대신 짊어지려 하지 않았고 윤서 역시 그의 도움을 전제하지 않았다. 이혼 전에는 서로에게 요구하거나 침묵으로 밀어내기만 했던 두 사람이 이제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자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올라가자. 나도 오늘 도면 정리할 게 많아.”
윤서가 1층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며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201호로 돌아온 윤서는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 식탁에 앉았다.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는 식탁 위에는 파란색 표지의 ‘세 칸 노트’가 놓여 있었다.
첫 장에는 지난 일요일 밤에 적었던 세 가지 기본 약속이 적혀 있었다.
- 사전 상의 없는 방문 금지.
- 아이를 통한 의사 전달 금지.
- 수요일 저녁 6시~8시 방문 교섭.
윤서는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항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비상 상황(발열, 준비물 분실, 긴급 야근 등) 대처 규칙.
- 통화 및 전달 가능 시간 기준.
- 라운지 프로젝트 공무상 협의 방식.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 것. 하지만 기댈 때와 선을 그을 때를 명확히 구분할 것.’
윤서는 적어 내려간 글자들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아침의 작은 소동은 지나갔지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집의 거리는 조금씩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고 있었다. 완벽하게 닫힌 문도 아니고 무방비하게 열린 문도 아닌, 필요할 때 예의를 갖춰 두드릴 수 있는 문의 형태였다.
윤서는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노트북 전원을 켰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라운지 프로젝트와 새로운 시간표를 준비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