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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7화

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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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선이 닿는 자리]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삼십 분, 201호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오늘 유치원 다녀와서 나뭇잎 수첩에 스티커 더 붙여도 돼?”

노란 원복을 입은 하린이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하원하고 엄마랑 같이 예쁜 스티커 골라보자.”

윤서는 하린의 가방 지퍼를 채운 뒤 손을 잡았다. 신발장으로 나서며 스친 냉장고 문에는 지난 금요일 밤 도현과 작성한 비상 돌봄 합의안 메모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

주말 동안 불필요한 호출이나 마주침은 없었다. 서로의 문턱을 침범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하린은 평온하게 쉬었고 윤서는 오롯이 월요일의 업무를 준비할 수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하린을 유치원 셔틀버스에 태워 보낸 윤서는 빌라 1층 로비로 들어섰다. 우편함 옆 공용 게시판에 흰색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모과하우스 1층 공용 공간 리모델링 주민 투표 결과 공고]
총 12세대 중 11세대 참여. 찬성 11표(100%)로 201호 한윤서 기획자의 공간 개선안이 최종 가결되었습니다.

하단에는 입주민 대표 오세라의 큼직한 자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100퍼센트 찬성.

활자화된 숫자를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전율이 번졌다. 독립 후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이름 석 자로 따낸 결과였다.

“축하해요, 윤서 씨.”

뒤편에서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든 오세라 대표가 다가왔다. 안경 너머 세라의 눈매에 짙은 신뢰가 어려 있었다.

“기획안 반응이 뜨거웠어요. 3층 어르신도 장바구니 내려놓을 선반 이야기 듣고 제일 먼저 찬성하셨죠. 관리실 탁자로 가요. 오늘부터 한윤서 기획자가 모과 라운지의 총괄 디렉터예요.”


관리실 테이블 위로 두 장의 계약서가 펼쳐졌다.

[모과하우스 커뮤니티 라운지 환경개선 및 공간기획 용역 계약서]

발주자 오세라, 계약 상대자 한윤서.

윤서는 만년필을 쥐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서걱거리는 감촉과 함께 붉은 인장이 찍혔다.

“예산은 넉넉하지 않아요.”

세라가 계약서 한 부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윤서 씨가 직접 자재를 고르고 직영 시공팀을 지휘하는 조건이니까 품질은 챙길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주말에 202호 도현 씨가 미리 배전반이랑 단자함을 다 확인해 줬어요. 오늘 오전 실측에 맞춰 내려와 전력 규격과 조명 배선을 기획자 도면에 맞춰 점검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세라는 두 사람의 과거를 모른 채 성실한 이웃의 미덕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전문가 두 분이 알아서 잘 맞춰줄 테니 난 원고 마감하러 가볼게요.”

세라가 떠난 뒤 홀로 남은 윤서는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첫 수주라는 설렘과 함께 선 하나까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서늘한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오전 열 시, 텅 빈 1층 라운지의 문을 열었다.

회색 시멘트 바닥 위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윤서는 캔버스 앞치마를 두르고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줄자, 스케치패드를 꺼냈다.

빨간 레이저 포인트가 벽에 닿으며 수치를 띄웠다. 가로 6.2미터, 세로 8.4미터, 층고 2.7미터.

하지만 공간은 수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몸짓이었다.

유리 자동문 너머로 3층 박 할머니가 흙 묻은 무와 파가 든 무거운 천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짐 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며 주머니 속 카드키를 찾느라 무릎을 떨고 있었다.

윤서는 재빨리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어르신, 문 열어드릴게요.”

“아이고 고마워요. 무릎이 쑤시는데 짐 들고 문 열 때가 제일 맥이 빠져.”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연필을 빠르게 움직였다.

‘출입구 진입로 폭 1,200밀리미터 확보. 문턱 옆 허리 높이 완충 선반 필수. 벽면 매립형 목재 핸드레일 시공.’

잠시 후 배송 기사가 턱밑까지 쌓아 올린 택배 박스를 안고 들어왔다.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차가운 바닥에 상자를 쿵 떨어뜨렸다.

윤서는 다시 메모를 적었다.

‘택배 드롭 바 높이 900밀리미터. 허리를 굽히지 않는 수평 거치대 배치.’

이어 4층 청년이 두꺼운 헤드폰을 낀 채 걸어 나왔다. 라운지에 선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벽에 바짝 붙어 빠져나갔다.

‘공용 공간은 만남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날, 어색한 인사 없이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필요하다.’

윤서는 도면 귀퉁이에 간살 파티션의 각도를 45도로 틀어 그렸다. 복도의 통행인과 안쪽에 앉은 사람의 눈이 닿지 않게 꺾어주는 각도였다.

선 하나하나는 빌라 주민들의 피로를 흡수하는 완충 지대였다.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라운지 입구로 군더더기 없는 발소리가 울렸다.

짙은 감청색 작업복 차림의 강도현이 공구 가방과 배선 도면을 들고 들어섰다.

도현은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한윤서 기획자님.”

사적인 감정이나 과거의 흔적은 없었다. 공적인 현장에서 서로의 경계를 지키겠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오셨어요, 강도현 엔지니어님. 일정 맞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민 투표 통과 축하드립니다. 세라 대표님께 계약 소식 들었습니다.”

도현은 도면을 벽체에 붙이고 말을 이었다.

“모과하우스는 15년 된 건물이라 도면과 실제 배선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평면도를 보니 북서쪽 모퉁이에 1인용 벤치와 책장을 두셨더군요.”

“네. 라운지에서 유일하게 자연 채광이 닿으면서 출입구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는 자리예요. 주민들이 숨을 고를 가장 중요한 공간입니다.”

도현은 설명을 들은 뒤 벽체 하단 점검구를 열었다. 먼지 냄새와 함께 복잡한 전선 다발이 드러났다.

플래시를 비추던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문제가 있습니다.”

벽체 안쪽에 표기되지 않았던 구형 보조 분전반과 간선 케이블이 매립되어 있었다.

“15년 전 통신선을 증설하며 보조 차단기를 묻은 것 같습니다. 규정상 분전반 전면에는 최소 800밀리미터 이상의 상시 점검 통로를 확보해야 합니다. 고정식 목재 벤치를 시공하면 소방 점검에서 불합격 처리됩니다.”

“그럼 배전반을 옮겨야 하나요?”

“메인 간선을 새로 따야 해서 수백만 원이 추가됩니다. 예산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첫 독립 프로젝트에서 마주한 기술적 장벽이었다. 예전의 도현이었다면 안전 규정을 앞세워 설계를 바꾸라며 결론을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도현은 도면을 거두지 않고 윤서를 바라보았다.

“한 기획자님, 이 벤치가 반드시 이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윤서는 관찰했던 풍경을 차분히 전했다.

“지친 이웃에게는 로비 한가운데의 개방된 자리가 오히려 부담이 돼요. 벽에 등을 기대고 혼자 숨을 고를 수 있는 모퉁이가 사라지면 제 설계의 절반은 의미를 잃어요.”

도현은 윤서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의 시선이 스케치패드 위의 세밀한 선들에 머물렀다.

도현이 공구 가방에서 수평기를 꺼냈다.

“방법을 찾아보죠. 배전반을 옮기지 않고도 규정을 충족할 방법이 있습니다.”

도현이 무릎을 꿇고 줄자를 당겼다.

“보조 배선은 상부 슬림 레이스웨이로 정리해 벽에 밀착시킵니다. 책장 하부는 자작나무 루버 도어로 점검구를 위장하되 180도 개방되게 만듭니다.”

도현의 손가락이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1인용 벤치는 고정하지 않고 하부에 히든 캐스터를 매립한 모듈형으로 제작합니다. 평소에는 흔들림 없이 고정되지만 점검 시에는 레버 하나로 앞으로 부드럽게 끌어낼 수 있게 만듭니다. 800밀리미터 점검 공간이 즉시 확보됩니다.”

윤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전과 온기를 모두 지켜내는 명쾌한 해법이었다.

“루버 틈새에 숨은 경첩을 쓰면 마감 라인도 완벽해요. 강 엔지니어님 덕분에 설계를 지킬 수 있겠어요.”

“기획자님의 설계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과거에는 서로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해 벽을 쌓았지만 지금은 같은 벽을 마주 보고 서서 전문성으로 그 벽을 허물어 가고 있었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합동 점검이 끝났다.

장비를 정리한 도현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시 22분이었다.

“설비 내역과 용량 표는 퇴근 후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도현이 가방을 메고 출입구로 향하다 멈춰 섰다.

“1시가 넘었네요.”

도현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시간표대로 이제 하린이 긴급 연락망 1순위는 기획자님입니다. 오전 중 유치원에서 온 연락은 없었습니다.”

공적 협업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공동육아의 약속으로 전환되는 태도였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안전망을 챙겨주는 모습에 윤서는 깊은 안도를 느꼈다.

“고마워요. 오후는 제가 챙길게요.”

“도면 참 좋았습니다. 현장에 서보니 왜 100퍼센트 찬성했는지 알겠더군요.”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밀고 나갔다.

텅 빈 라운지에 윤서 혼자 남았다.

징징.

스마트폰 화면에 서민재의 이름이 떴다.

  • 윤서야! 계약 도장 잘 찍었어?

“응. 계약서 쓰고 실측이랑 설비 점검까지 끝냈어.”

  • 역시 한윤서. 아, 그런데 윤서야. 전해줄 얘기가 있어.

민재의 톤이 낮아졌다.

  • 아까 룸스텝 공간사업팀 후배한테 연락이 왔거든. 요즘 그쪽에서 성수동 일대 소규모 빌라 커뮤니티 리모델링 사례를 수집하고 있대. 네가 모과하우스 들어간 걸 알고 진행 상황을 슬쩍 묻더라고.

“우리 프로젝트를 왜?”

  • 성수동 공유 공간 투자를 검토 중인 모양이야. 일단 귀띔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고마워, 민재야. 하지만 우린 우리 페이스대로 가. 여긴 보여주기 위한 플랫폼이 아니라 매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집이니까.”

  • 명언이다. 그래, 시공 견적 나오면 바로 넘겨줘. 내일 보자!

통화가 끝났다.

작은 빌라의 1층 로비였지만 이곳은 이제 누군가의 일상이 머물 진짜 공간으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자 든든한 파트너가 된 도현, 그리고 매일 이 문을 열고 들어올 하린과 주민들.

윤서는 연필을 쥐고 도면 첫 머리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모과 라운지 : 사람이 머무는 자리]

시작된 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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