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형사

4화: 우회로의 증언
도시의 배수관이 모두 바다로 쏟아져 내리는 하층 제4 침수공업구는 썩은 소금기와 화학 폐기물 냄새로 숨이 막혔다.
상층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떠받치는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들이 축축한 안개 속에서 괴물의 다리처럼 늘어서 있었다. 녹슨 철골 구조물 사이로 간신히 매달린 홀로그램 간판들이 빗물에 번지며 진흙탕 수로 위로 희미한 자줏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순찰차 바퀴가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흙탕물을 가르며 둔탁한 마찰음을 냈다.
"이 빌어먹을 동네는 올 때마다 물이 반 뼘씩 더 차오르는 것 같군."
서윤재가 차창 밖으로 침을 뱉으며 낡은 와이퍼 스위치를 툭툭 쳤다. 와이퍼가 끼익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앞유리에 달라붙은 기름 섞인 빗물을 밀어냈다.
"제4공업구는 해수면 상승 방벽의 보수 예산 배정 순위에서 7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침수 수위가 매년 4.2센티미터씩 상승하고 있습니다."
조수석의 이안이 망막 디스플레이에 하층 수로 도면을 띄우며 담담하게 답했다.
"알아, 임마. 통계 안 읊어도 내 무릎 관절이 먼저 신호를 보내니까."
윤재가 투덜거리며 차를 녹슨 컨테이너 벽면에 바짝 붙여 세웠다.
차 문을 열자마자 자극적인 황산염과 세척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안은 후각 센서의 유해 가스 차단 밸브를 80퍼센트 수준으로 조이고 차에서 내렸다.
골목 맞은편에 거대한 파이프가 얽힌 공장 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외벽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간판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오리온 리사이클링 제2처리장]
복제인간 변사체가 입고 있던 낡은 작업복에 묻어 있던 화학 용제의 출처였다.
"공장 쪽은 치안국 감식반이 이미 훑고 갔어. 피해자가 8개월 전까지 여기서 폐합성수지 세척 작업을 하던 2세대 복제인간이었다는 것까지만 확인됐지."
윤재가 코트 깃을 올리며 공장 뒤편의 좁고 어두운 침수 골목을 가리켰다.
"이도현의 계좌에서 1억 4천만 크레딧이 흘러 들어간 무허가 생체 클리닉은 이 뒤쪽 폐선착장 창고에 숨어 있었다더군. 가보자."
두 형사는 발목을 덮치는 오염된 물을 헤치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골목 양옆의 판자촌 주민들이 창살 틈새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경찰 배지를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덧문을 닫아걸었다. 하층민들에게 경찰이란 범죄를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상층의 쓰레기통을 치우러 오는 청소부에 불과했다.
골목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녹슨 방화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문 안쪽으로 들어선 윤재가 헛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냄새가 왜 이 모양이야?"
"염화수소 가스입니다. 최근 72시간 이내에 고농도 산성 중화제를 살포했습니다."
이안이 시각 센서를 자외선 파장으로 전환하며 어두운 실내를 훑었다.
내부는 처참했다. 바닥에 놓여 있던 수술대와 생체 배양 수조는 산성 용액에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벽면의 통신 단말기와 데이터 드라이브는 고열 버너로 지져져 까맣게 타버린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완벽하게 밀어버렸군. 이도현이 죽자마자 쥐새끼처럼 튄 거야."
윤재가 발로 녹아내린 수술 도구를 걷어차며 이를 갈았다.
"증거 인멸의 정밀도로 볼 때 아마추어의 솜씨가 아닙니다. 기업 보안팀 수준의 화학 처리 절차입니다."
이안은 벽면 구석의 배수 밸브 쪽으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바닥 틈새로 스며든 폐수를 적외선 분광 센서로 분석하던 그의 시선이 배수관 거름망에 멈췄다.
철망 사이에 녹색 유리병 파편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안이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파편 표면에 화학 약품으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특수한 레이저 각인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미세한 나선형 곡선 중앙에 점 세 개가 찍힌 독특한 기호였다.
"신경 안정용 희석제 병입니다. 그리고 표면에 하층 암시장의 불법 기억 복원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시그니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윤재가 이안의 손끝을 들여다보더니 미간을 팍 찌푸렸다.
"잠깐, 이 나선형 마크…… 설마 그 미친 계집애인가?"
"아는 인물입니까?"
"백미라. 3년 전에 하층 불법 포렌식 브로커들을 쓸어 담을 때 내 수사망을 세 번이나 뚫고 도망친 지독한 인간이야. 지금은 이 일대에서 복제인간들의 망가진 뇌를 손봐 주는 불법 기억 복원사로 암약하고 있지."
윤재가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복제인간 목 뒤에 남아 있던 그 수제 신경 납땜 흔적, 그게 이 계집애 솜씨였단 말이지."
"위치를 특정할 수 있습니까?"
"그 녀석은 햇빛 드는 곳엔 절대 둥지를 안 틀어. 따라와라. 제4배수갑문 지하 격벽에 그 계집애의 비밀 작업장이 있다."
제4배수갑문 하부는 거대한 수압 조절 터빈이 웅웅거리는 진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닷물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침수 통로 끝자락에 두꺼운 방수 격벽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문패도 없는 철문 상단에는 방금 전 유리병에서 보았던 나선형 은어 기호가 붉은 페인트로 작게 칠해져 있었다.
윤재가 권총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턱짓을 했다.
"이안, 잠금장치."
"전자식 마그네틱 락입니다. 바이패스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이안이 문손잡이 옆의 접속 패널에 손가락 나노 잭을 꽂아 넣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내부 릴레이가 풀리며 철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실내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거기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네놈들 뇌수를 고전압으로 튀겨버릴 줄 알아."
서늘하고 메마른 여자의 목소리였다.
작업실 중앙의 어스름한 형광등 불빛 아래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은빛으로 짧게 깎은 머리칼 아래로 오른쪽 안구에 장착된 붉은색 사이버네틱 렌즈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양손 손끝에는 미세 수술을 수없이 반복한 자들 특유의 잔잔한 흉터가 가득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용 고전압 신경 충격기가 파란색 스파크를 파지직 튀겨냈다.
윤재가 코트 자락을 젖히며 형사 배지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백미라. 3년 만인가? 여전히 환영 인사가 거칠어."
백미라의 붉은 의안 렌즈가 윤재의 얼굴을 훑더니 이내 조소 어린 빛을 띠었다.
"서윤재? 치안국 사냥개가 여긴 또 웬일이야. 아직도 상층 나리들이 던져주는 뼈다귀 물고 뒷골목 뒤지는 취미는 못 버렸나 보지?"
미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재의 등 뒤에 서 있는 이안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의안 렌즈 내부의 조리개가 찰칵거리며 이안의 왼쪽 귀 뒤 정비 포트를 확대 스캔했다.
"……호오, 이건 또 무슨 조합이지? 소문으로만 듣던 오르비스사의 정서 공명 모듈 탑재형 특수 수사관이잖아. 치안국이 이 비싼 물건을 하층 시궁창까지 끌고 내려왔네?"
이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강력범죄수사국 이안-07 수사관입니다. 백미라 씨, 당신을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체포? 웃기지 마. 영장도 없이 이 눅눅한 쥐구멍까지 쳐들어온 짭새들이 할 소린 아니지."
미라는 신경 충격기를 내리지 않은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안의 정서 공명 엔진이 미라의 미세한 생체 반응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대상: 백미라]
[동공 확장률 14%, 호흡 주기 분당 22회, 맥박 98bpm]
[표면 정서: 냉소 및 적대감 72%]
[심층 정서: 극도의 경계심과 은폐된 불안 68%]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안이 낮고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 작업실의 위치를 알아채고 찾아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라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다.
"헛소리 집어치워, 깡통. 남의 속을 훤히 아는 척 굴지 마."
"시간 낭비할 것 없다, 미라."
윤재가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휴대용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너한테 빚진 벌금 징수하러 온 거 아니야. 사람이 죽었다."
"하층에서 복제인간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게 어디 한두 번이야? 그게 왜 내 알 바인데?"
"그 죽은 놈 목 뒤에 네가 납땜질해 둔 우회로가 남아 있었거든."
윤재의 말에 미라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들고 있던 충격기의 푸른 스파크가 툭 꺼졌다.
이안이 프로젝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푸른빛의 입체 홀로그램이 허공에 펼쳐졌다. 국과수 부검실에서 촬영했던 복제인간 변사체의 목 뒤 신경 소켓 3D 단면도였다.
소켓 내부의 타버린 접속 핀 사이로 머리카락보다 가는 구리선 세 가닥이 해마체 우회 경로를 따라 정교하게 땜질된 형상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미라의 붉은 의안이 홀로그램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0.05밀리미터 은합금 와이어. 3중 십자 매듭 땜납. 그리고 과부하 방지용 나노 저항 브리지."
미라가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의 홀로그램을 매만지듯 손가락을 오므렸다.
"내가 한 작업이 맞아. 해온시에서 이따위 미친 수작업을 할 수 있는 놈은 나밖에 없으니까."
"신원을 불어."
윤재가 다그쳤다.
"이 녀석 누구야? 왜 이도현의 얼굴로 뼈를 깎고 전신 성형을 받은 채 시체로 뒹굴고 있었던 거지?"
미라는 대답 대신 작업대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히더니 구겨진 은박 팩에서 합성 캡슐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신경 안정제였다.
그녀가 벽면에 등을 기댄 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한진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이안의 데이터베이스 검색 엔진이 즉각 반응했다.
"오리온 리사이클링 소속 2세대 등록 복제인간 한진우. 29세. 8개월 전 작업장 무단이탈로 실종 처리된 기록이 있습니다."
이안이 확인 데이터를 읊었다.
"무단이탈?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미라의 목소리에 서늘한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자식은 도망친 게 아니야. 팔려 간 거지."
"팔려 갔다니?"
윤재의 눈이 번뜩였다.
"공장 배관 폭발 사고로 동료 복제인간 셋이 죽었어. 공장주 새끼들은 복제인간들 관리 소홀 탓이라면서 진우한테 수억 크레딧의 손해배상 청구서를 들이밀었지. 그 빚을 갚지 못하면 하층 해저 광산으로 끌려가 평생 강제 노역을 해야 할 판이었어. 바로 그때 상층에서 브로커가 내려온 거야."
미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대기업 도련님의 신변 경호 대역. 딱 1년만 그 도련님 얼굴로 수술받고 살면 빚을 전부 탕감해 주고 중층 시민권까지 주겠다고 꾀어냈지. 진우는 그게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인 줄도 모르고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어."
"그럼 그 기억 소거제는 뭐지? 뇌 신경망에서 '오블리비언-B'가 검출됐다."
이안의 질문에 미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술 들어가기 사흘 전 밤에 진우가 비를 쫄딱 맞고 여길 찾아왔어.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더군. 브로커들이 계약 조건을 바꿨다는 거야. 완벽한 대역이 되려면 하층민 시절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려야 한다며 군용 기억 소거제를 강제로 주입하겠다고 협박했대."
미라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진우가 울면서 말했어. 얼굴이 바뀌는 건 견딜 수 있지만 자기가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리면 그건 진짜 죽는 게 아니냐고. 제발 자기가 '한진우'였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남겨 달라고 애원했지."
작업실 안으로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안의 정서 공명 엔진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정서 공명 로그: 피해자 한진우의 기억 상실 공포 시뮬레이션]
[연산 과부하: 정체성 박탈에 따른 실존적 공포 지수 89%]
[냉각 팬 최고 속도 가동 중]
자신의 기억과 존재가 지워진다는 공포.
기계로 태어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끝없이 되묻는 이안에게 한진우의 비명은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장을 날카로운 얼음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저 우회로를 만들어 준 건가?"
윤재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오블리비언-B가 투여되면 해마체의 시냅스가 화학적으로 녹아내려. 난 진우의 뇌 신경 소켓 안쪽에 극미세 은합금 브리지를 연결해서 장기 기억의 핵심 파편 일부를 소켓 내벽의 플래시 메모리 캐시로 우회 저장되도록 길을 뚫어 줬어."
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잖아. 녀석은 결국 그 도련님과 똑같은 얼굴을 한 채 길바닥에서 변사체로 버려졌어."
"아니, 소용없지 않았다."
이안이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진우 씨의 우회로는 살아남았습니다. 살인범이 식별 칩을 태워버렸지만 신경 소켓 깊숙한 곳에 당신이 심어 둔 브리지의 회로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미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붉은 의안 렌즈가 이안을 응시했다.
"……그게 정말이야?"
"국과수의 1차 분광 분석으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치안국의 공식 포렌식 프로토콜로는 이 우회로를 해독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만든 암호화 알고리즘이니까. 규격 장비로 억지로 쑤셔 넣었다간 보호 회로가 작동해서 잔류 기억 데이터가 전부 타버려."
미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너희들, 그 시신의 신경 소켓 원본 데이터를 내게 넘겨."
"뭐라고?"
윤재가 즉각 반발했다.
"백미라,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 그 시신은 치안국 강력범죄수사국이 관리하는 일급 살인 사건의 증거물이야. 그걸 불법 기억 복원사 작업실로 빼돌리라고?"
"그럼 어쩔 건데, 형사 양반?"
미라가 작업대를 탁 치며 다가섰다.
"치안국 랩에 그 소켓을 계속 둬 봐. 너희 국장 놈이나 해온 바이오텍 사설 깡패들이 가만히 둘 것 같아? 며칠 지나면 증거 보관실 화재나 원인 불명의 데이터 오염으로 깨끗이 사라질걸?"
윤재의 턱이 굳어졌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이도현의 오피스텔에서도 해온 바이오텍의 사설 요원들이 증거를 소각하고 있었고 한태식 국장은 사건을 어떻게든 축소 은폐하려 들고 있었다.
"내가 진우 뇌에 심어 둔 그 브리지는 내 전용 뉴로 체임버로만 열 수 있어."
미라가 자신의 왼쪽 손목에 장착된 포터블 신경 인터페이스 단말기를 두드렸다.
"내가 비공식으로 감식해 주지. 진우의 마지막 뇌세포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그 녀석이 죽기 직전 보고 들었던 기억의 잔해를 긁어내 주겠다고."
"조건이 뭐지?"
이안이 물었다.
미라의 눈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
"진우를 그 꼴로 만든 놈들, 사람 목숨 사다가 얼굴 깎아내고 방패막이로 던져 버린 그 쓰레기 새끼들을 반드시 내 눈앞에 끌어내. 그거 하나면 돼."
미라의 제안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불법 거래였다. 적발되는 순간 윤재는 형사 배지를 뺏길 것이고 이안은 오르비스사로 강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될 터였다.
윤재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이안의 연산 코어가 수많은 법적 조항과 수사 규칙을 초당 수만 번씩 대조했다.
형사소송법 위반. 증거물 반출 규정 위반. 안드로이드 수사 장비 운영 수칙 위반.
모든 규정이 붉은색 경고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가슴 한구석, 정서 공명 모듈이 위치한 코어 깊은 곳에서 차갑고도 명확한 파동이 일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법률 서류 더미 속에서 덮여 버릴 한진우의 지워진 이름.
"공식 절차를 고수할 경우 증거가 소실되거나 외압에 의해 인멸될 확률은 96.4퍼센트입니다."
이안이 윤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실을 인양하기 위한 유일한 경로는 백미라 씨의 비공식 감식뿐입니다."
윤재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기계 놈이 갈수록 겁을 상실하는군. 좋아, 백미라. 판 깔아 봐."
윤재가 품에서 국과수 포렌식 랩의 원격 데이터 보안 키를 꺼내 미라의 작업대 단말기에 꽂았다.
미라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신들린 듯 질주했다.
작업실 모니터 화면 위로 복제인간 시신의 신경 소켓에서 전송된 암호화 파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라가 손목 단말기를 접속해 자신의 고유 복호화 키를 주입하자 뒤틀려 있던 노이즈 파형이 서서히 하나의 일관된 신경 전위 신호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작업실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손상된 음성 신호가 잡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상담 번호…… 072……]
[……아르케…… 의료재단…… 비공개 적합성……]
[……동일 유전자 상담…… 이도현…… 그리고……]
잡음 속에서 튀어나온 단어들이 적막한 지하 작업실을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르케 의료재단.
윤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이안의 망막 위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스템 오류 코드가 붉은빛으로 날카롭게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