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새벽의 공작부인

2화: 믿음의 조건
세레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약혼 의정서의 새 조항이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올랐다. 장부 사본을 제출하라는 문구 아래 찍힌 새벽 인장. 전생에서는 그 문서가 약혼식 뒤에 나왔다. 이번에는 하루 빨랐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새 조항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벨로르 공작은 서류를 천천히 읽은 뒤 서명란을 덮었다.
“왕실이 왜 장부를 요구하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다. 북부 배급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건 계약과 무관한 요구야.”
“서명하지 마세요.”
공작은 딸을 오래 바라봤다. “네가 왕실을 의심하는 이유를 말해 보렴.”
세레나는 전생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어젯밤 확인한 필사본과 에드릭의 잉크 묻은 장갑을 설명했다. 공작은 장부를 직접 보겠다고 했다. 리아가 가져온 사본에는 어제와 같은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공작은 페이지마다 봉인 자국과 필기 순서를 확인했다.
“이 인장은 벨로르 가문의 것이 맞지만, 내가 찍지는 않았다.”
“누구든 인장을 찍을 수 있나요?”
“인장함은 집안 사람만 열 수 있다. 다만 지난달 왕실 회계관이 세금 문서를 검토한다며 가져간 적이 있어.”
그는 집안 관리인에게 인장함의 열쇠를 맡겼다. 조사를 시작하면 왕실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었다. 세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믿어 준 것에 안도하면서도, 전생에 그가 반역 혐의로 끌려가던 기억을 떨쳐내지 못했다.
“제가 직접 카시안 변경백과 이야기하겠습니다. 북부 군량 문제를 함께 조사할 수 있어요.”
“그와 동맹을 맺으면 왕실은 약혼을 깨려는 시도로 볼 거다.”
“약혼식 전이라면 아직 보류를 요구할 수 있어요.”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네가 그를 신뢰하느냐?”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의 목적은 분명해요. 북부의 식량을 지키려 합니다.”
“그 목적이 우리와 같다고 해서 동맹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쓰려고 해요.”
공작은 허락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는 세레나에게 직접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약속하라고 당부했다. 세레나는 그 말을 기억하며 왕궁 부속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리아와 함께했다. 두 사람은 공개된 회의실에서 카시안을 기다렸다.
카시안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는 북부 군량 협의 자료를 품에 들고 있었다.
“왕실 회계원이 장갑을 벗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잉크가 묻었지만, 그 사실만으로 장부 조작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증거가 아닌 것을 증거라고 부르지 않는군요.”
카시안은 의자에 앉지 않고 세레나가 내민 계약 초안을 읽었다. 첫 조항은 상호 동맹의 기간, 둘째는 자료 공유, 셋째는 어느 쪽도 상대의 가족이나 부하에게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넷째 조항은 상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조를 요청할 수 있으나, 응답 여부는 당사자가 정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조항은 동맹보다 자비에 가깝습니다.”
“강제할 수 없는 일을 의무라고 쓰면 계약은 거짓말이 되니까요.”
“당신은 자신이 위험해져도 내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요청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이 거절해도 계약 위반은 아니죠.”
카시안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쓰면 내가 당신을 도울 이유가 줄어듭니다.”
“그 이유는 계약서 밖에서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레나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했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비웃지 않았다. 그는 계약서 옆에 자신의 조건을 적었다. 북부의 군량 장부를 확인할 독립 증인을 두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본을 한 곳에 몰아두지 않는다. 왕실에 공개할 자료는 사전에 양측이 검토한다.
“좋아요. 다만 독립 증인은 누구로 하죠?”
“상단의 회계사, 의회 서기관, 그리고 당신 쪽 인물 하나.”
“리아를 추천합니다.”
리아는 놀라 세레나를 보았다. “제가요?”
“필사본의 차이를 발견했어. 증인이 되려면 당신이 직접 결정해야 해.”
리아는 계약서를 읽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적는 대신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자신이 제출한 필사 자료는 원본과 대조할 기회를 보장받고, 거짓 증언을 강요받으면 계약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카시안은 그 조항을 받아들였다.
“당신의 시녀는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군요.”
“시녀라는 이유로 발언권을 잃어서는 안 되니까요.”
카시안은 계약의 서명란을 비워 두었다. “원본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벨로르 저택의 장부만으로는 조작 전 숫자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세레나는 전생의 기억을 뒤졌다. 창고에 불이 나기 전, 누군가 지하 보관실에서 푸른 표지를 가진 장부를 옮겼다. 그 장부가 원본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 속 인물은 얼굴이 없었다.
“서리 장부의 원본은 중앙 창고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북부에 보낸 곡물의 인수표와 함께 보관했을 겁니다.”
“그 정보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전생에 들었던 말이 있어요. 출처는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카시안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는군요.”
“아니요. 확인할 단서를 드리는 거예요. 맞는지 직접 살펴보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세레나도 이름을 적었다. 리아는 증인란에 서명했다. 서류에 잉크가 마르기 전에 카시안은 계약서를 두 장으로 나누어 각자 한 부씩 보관했다.
“이제 약혼 의정서를 보류할 수 있겠군요.” 세레나가 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왕실에 보류 사유를 제출하려면, 혼인 외에 공적인 동맹이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 오후 의회 서기관에게 초안을 접수합시다.”
“그럼 왕실도 우리가 손을 잡았다는 걸 알겠네요.”
“숨기려다 들키면 더 큰 약점이 됩니다.”
세 사람은 의회 서기관실로 갔다. 접수 담당자는 계약서의 공증을 거부했다. 두 귀족이 혼인 의정서를 앞두고 정치 동맹을 맺는 것은 왕실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카시안은 북부의 군량권이 침해된 상황에서 별도 동맹은 자치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담당자는 판단을 미루고 왕실 법무관에게 문의하겠다고 했다.
그 사이 복도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 세레나를 알아봤다. 한 명은 그녀의 약혼자가 될 왕자의 측근이었다. 그는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넨 뒤 카시안과의 만남이 약혼 조건에 포함됐는지 물었다. 세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약혼 의정서에 동맹 금지 조항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왕실의 뜻을 거스르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겠군요.”
“왕실의 뜻은 문서로 확인하는 편이 정확하겠죠.”
측근은 더 묻지 않고 떠났다. 리아는 그의 이름과 질문을 기록했다. 카시안은 세레나에게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남긴 말을 다음 증거로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레나는 카시안에게 물었다. “왜 계약의 구조를 이렇게 세심하게 따지죠? 한쪽이 더 많은 힘을 가진 계약이면 유리할 텐데.”
“그런 계약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북부는 중앙에 수십 년 동안 군량을 빌려줬지만, 돌려받을 때마다 조건이 바뀌었어요. 약속의 문장을 믿지 못하면, 군대도 세금도 결국 한쪽의 손에만 남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왜 서명했습니까?”
“당신이 의심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확인할 자료를 내놓았죠.”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판단이었다. 세레나는 그가 자신을 믿었다고 착각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서로가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해가 질 무렵, 리아가 공작저에서 온 쪽지를 펼쳤다. 관리인이 인장함을 조사하다가 잠금 장치 안쪽에서 금속 가루를 발견했다고 했다. 인장 모양을 본뜬 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쪽지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서재에 낯선 발자국이 있습니다.”
세레나는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다. 카시안은 동행하겠다고 했다.
“계약서에는 상대의 집안에 들어갈 때 사전 동의를 구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초대하겠습니다. 단, 조사실에는 저와 리아가 함께 들어갑니다.”
“동의합니다.”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다. 책상 위 서류는 그대로였지만, 벽장 뒤에 있던 비상 편지함이 사라졌다. 세레나는 그것을 아침에 다시 숨겨 두었다. 안에 있던 새벽 인장 열쇠도 함께 사라졌다.
리아가 바닥을 살폈다. 먼지에 남은 발자국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관리인의 구두 자국, 다른 하나는 발뒤꿈치가 닳은 군화 자국이었다.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어요.”
세레나는 창문 쪽을 확인했다. 걸쇠에는 새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카시안은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는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신발은 왕궁 경비대가 신는 형태입니다.”
“당신은 그걸 알아볼 수 있어요?”
“북부에 파견된 경비대의 장비를 확인했으니까요.”
그는 무릎을 굽혀 뒤꿈치의 흙을 살폈다. 흙에는 흰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 저택의 정원 흙과 달랐다. 리아는 장화 자국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세레나는 비상 편지함이 사라진 것이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열쇠를 원했다면, 새벽 인장의 보관처를 찾고 있었다.
그날 밤, 왕실 서기관의 답신이 도착했다. 동맹 계약은 공증할 수 있지만, 약혼 의정서의 보류 요청은 왕실이 직접 심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세레나는 답신 아래 추가된 문장을 읽었다. 벨로르 영애는 군사 기밀 문서를 외부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다음 날 왕궁에 출석하라.
세레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본 것은 아직 비밀이었다. 서리 장부 사본을 가진 사람은 리아뿐이었다. 누군가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사본이 아니라 그들이 조사에 나선 사실을 감시한 것이다.
카시안은 외투를 걸쳤다. “내일 왕궁에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면 북부의 문제까지 묶여요.”
“계약서에 적힌 동맹 기간은 첫 의회 심리까지입니다. 그 심리가 시작됐으니 함께 갑니다.”
세레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왕궁 출석 요구서에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리아 모렌.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문구 아래, 그녀의 어머니가 왕실 장부를 훔쳐 달아난 혐의가 처음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