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6화: 선과 온기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서윤은 거실 바닥에 유나의 작은 배낭을 펼쳐 두고 짐을 확인했다. 갈아입을 얇은 카디건과 속옷, 칫솔 세트, 그리고 유나가 좋아하는 딸기 맛 씹어 먹는 비타민 세 알. 유치원 알림장과 주말 과제용 색종이 묶음도 가방 앞주머니에 가지런히 넣었다.
이혼 후 일 년 동안 격주 토요일마다 반복해 온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짐을 싸는 공기가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 다가오면 집 안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나는 어딘가 위축된 얼굴로 제 방 장난감을 정리했고 도현이 도착하기 십 분 전부터 현관 신발장에 앉아 구두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지금 유나는 거실 카펫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스케치북에 공룡을 그리고 있었다. 초록색 크레용을 쥔 손끝에 거침이 없었다.
"엄마, 아빠 오면 이거 보여줄 거야. 트리케라톱스 뿔 세 개 다 그렸어."
"뿔이 아주 뾰족하네. 유나야, 가방 다 쌌으니까 양말 신자."
"응!"
유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스케치북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서윤은 아이의 보드라운 발에 하얀 레이스 양말을 신겨 주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부모의 이혼이 제 탓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뒤 유나는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지도 않았고 먹기 싫은 달걀노른자를 슬그머니 서윤의 숟가락 위에 얹어 놓는 어리광도 되찾았다.
그 변화가 눈물겹도록 고마우면서도 서윤의 가슴 한구석에는 묘한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빌라 현관 인터폰이 맑은 소리로 울렸다. 도현이었다. 도현은 약속 시간을 단 일 분도 어기지 않았다.
서윤은 유나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 계단 끝에 선 도현은 짙은 회색 니트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평일의 작업복 차림보다 한결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특유의 단단한 어깨와 곧은 자세는 여전했다.
"아빠!"
유나가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신발도 채 바르게 신지 못한 채 쪼르르 달려 나갔다. 도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도현은 허리를 숙여 달려오는 유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유나, 잘 잤어?"
"응! 아빠, 나 어제 트리케라톱스 그렸어. 가방에 넣었어!"
"그래? 집에 가서 삼촌이랑 민재랑 같이 보자."
도현이 유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난 목요일 유치원 등나무 벤치 아래서 함께 아이를 안고 눈물 흘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찰나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윤이 먼저 가방을 도현에게 건넸다.
"비타민이랑 알림장 챙겼어요. 내일 유치원 숙제로 나뭇잎 붙이기 해야 하니까 공원에서 잎 몇 개 주워 주시면 좋겠어요."
"알았어. 내일 저녁 여섯 시까지 데려다줄게."
도현이 가방을 받아 들며 담담하게 답했다. 늘 오가던 익숙한 대화였다.
하지만 도현은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창백한 얼굴과 눈 밑의 짙은 그늘에 잠시 머물렀다.
"서윤 씨, 잠은 좀 잤어? 얼굴이 많이 상했네."
서윤은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감 주간이라 그래요. 괜찮아요."
도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를 핑계로 선을 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도현이 유나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은솔동 어린이 도서관에 가자고 조잘거렸다.
서윤은 빌라 앞 골목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도현의 집은 여기서 걸어서 불과 십 분 거리였다. 주민센터 바로 뒷골목.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이렇게 커다란 가방을 싸 들고 이 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넘겨주는 행위가 오늘따라 유독 기이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도현의 빌라는 햇빛이 잘 드는 삼 층이었다.
거실에는 민재의 공룡 장난감 상자와 작은 공부상이 놓여 있었다. 민재는 거실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나 왔다."
민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반갑게 맞이했다. 유나는 신발을 벗어 던지듯 벗어 두고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민재 앞으로 달려갔다.
"민재야, 이것 봐. 내가 그린 트리케라톱스야."
"뿔이 날카롭네. 그런데 티라노사우루스가 더 세."
"아니야. 뿔로 들이받으면 티라노사우루스도 도망가거든?"
두 아이는 금세 작은 실랑이를 벌이며 거실 바닥에 나란히 엎드렸다. 도현은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뒤 주방으로 가 보리차를 끓였다.
오후에는 셋이 함께 은솔동 어린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은솔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로 가득했다. 유나와 민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가며 길가에 떨어진 도토리와 붉은 단풍잎을 주웠다.
"아빠, 이거 숙제할 나뭇잎이야. 예쁘지?"
유나가 손바닥만 한 플라타너스 잎을 활짝 펼쳐 보였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아이가 모은 나뭇잎을 정성껏 담았다.
도서관 볕이 드는 열람실 구석에서 세 사람은 그림책을 읽었다. 민재는 공룡 백과사전을 넘겼고 유나는 동물들이 나오는 팝업북을 도현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도현은 서윤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던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글자를 짚어 나갔다. 유나는 도현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까르륵 웃었다.
그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도현은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는 내일 저녁 여섯 시가 되면 다시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음 이 주 동안은 유치원 등하원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 외에는 아빠를 온전히 만날 수 없다.
같은 은솔동 하늘 아래 살면서 유치원 바로 옆길을 매일 지나치면서도 법적으로 합의된 날짜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와 어른은 서로를 타인처럼 지나쳐야 했다.
일요일 오후 네 시가 되자 유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거실에서 블록을 쌓던 유나는 벽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도현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이는 도현의 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물었다.
"아빠, 나 이제 두 시간 있으면 엄마 집 가?"
"응. 여섯 시에 엄마한테 가야지."
도현이 유나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부드럽게 답했다. 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은솔동은 아빠 집이랑 엄마 집이랑 진짜 가까운데 왜 꼭 토요일에만 와야 해?"
도현은 숨을 들이켰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정면으로 쏟아붓는 순수한 질문 앞에서 어떤 법적 원칙도 구차하게 느껴졌다.
"엄마랑 아빠가 그렇게 약속했거든. 유나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하려고."
"그럼 내일 유치원 끝나고는 아빠 못 봐? 민재는 삼촌 매일 보는데."
유나의 곁에 앉아 있던 민재가 거들었다.
"우리 삼촌 매일 저녁에 맛있는 거 해줘. 유나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
유나는 민재의 말을 듣고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기대와 아쉬움이 뒤섞인 눈망울이었다. 도현은 아이의 작은 어깨를 그러안으며 가슴 밑바닥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아이를 위한 원칙이 아니었다.
이혼 당시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 둔 차가운 벽이었을 뿐이다. 이제 같은 동네에서 아이의 일상을 함께 지켜보는 부모가 된 이상 과거의 경직된 울타리를 아이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서윤의 빌라 앞 골목 가로등이 주황색 불빛을 깜빡이며 켜졌다.
골목 어귀에서 유나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은 앞치마를 벗어 두고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도현의 한 손에는 유나의 배낭과 도토리가 든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유나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엄마!"
유나가 달려와 서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서윤은 유나를 안아 올리며 아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우리 딸 재미있게 놀았어?"
"응! 민재랑 도서관도 가고 아빠가 단풍잎도 이만큼 주워 줬어. 내일 숙제 다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네. 유나야, 손 씻고 옷 갈아입고 있어. 엄마가 좋아하는 카레 끓여 놨어."
"와, 카레다!"
유나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신나게 뛰어 들어갔다.
현관문이 반쯤 닫히고 복도에는 서윤과 도현 두 사람만 남았다. 차가운 저녁 바람이 계단 참을 훑고 지나갔다. 서윤은 가방을 건네받으며 평소처럼 짧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 했다.
"유나 잘 챙겨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지만 도현은 가방을 건네지 않았다. 도현은 차분하지만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 씨, 잠깐 시간 있어? 오 분이면 돼."
서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무슨 일인데요? 현관 앞에서 말씀하세요."
"밖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유나 듣지 않게."
도현의 단호하면서도 정중한 태도에 서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아이에게 불필요한 긴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요. 외투 챙겨 올게요."
서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왔다. 유나에게는 엄마가 슈퍼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해 두었다.
두 사람은 빌라 앞 작은 어린이 놀이터 옆 벤치로 걸어갔다. 주말 저녁이라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두 사람의 발밑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도현은 벤치 끝에 겉옷을 정리하고 섰다. 앉으라는 권유도 없이 서윤의 편안한 거리를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유나 면접교섭 일정 말이야."
도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조정했으면 좋겠어."
서윤의 가슴속에서 팽팽하게 유지되던 안전장치 하나가 탁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정이라니요? 무슨 뜻이에요?"
"기존의 격주 주말 일박 이일 방식 말고 동네 생활에 맞게 현실적으로 바꾸자는 거야."
도현은 서윤의 굳은 표정을 확인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랜 시간 숙고한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 지금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살아. 유치원도 같은 곳에 다니고 생활 동선이 완전히 겹쳐. 그런데 이 주일에 한 번 여행 가듯 아이를 데려갔다 데려오는 게 과연 유나한테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래서요?"
서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주말을 줄이자는 건가요, 아니면 더 늘리자는 건가요?"
"평일 하원 후에 주 일 회나 이 회 정도 내가 유나를 데리고 저녁을 먹이고 숙제를 봐준 뒤 여덟 시쯤 집에 데려다주는 방식을 생각했어. 주말은 격주로 온종일 데려가는 대신 하루만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걸로 조율하고."
도현은 서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서윤 씨 요즘 마감 때문에 매일 밤샘 작업 하잖아. 유치원 종일반에 유나 혼자 늦게까지 남겨 두는 날도 많고. 내가 평일에 한두 번 유나를 맡아 주면 서윤 씨도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유나도 아빠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어."
서윤은 턱 끝을 바짝 치켜들었다. 도현의 말은 지극히 논리적이었고 아이를 향한 현실적인 배려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느라 지쳐 있는 서윤의 처지까지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합리성이 서윤의 깊은 방어 본능을 자극했다.
"도현 씨."
서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원칙이 왜 생겼는지 잊었어요?"
골목을 지나가는 바람이 서윤의 옷자락을 차갑게 흔들었다.
서윤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찌릿한 통증을 남겼다.
"우리가 이혼할 때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결국 법원 앞에서 도장 찍으며 합의한 게 바로 그 일정이었어요. 감정 섞지 말고 서로의 일상을 침범하지 말자고. 선을 명확하게 그어야 아이도 혼란스럽지 않고 우리도 각자의 삶을 지킬 수 있다고 합의한 원칙이라고요."
도현의 눈빛이 짙게 흔들렸다.
"그때는 우리가 서로 다른 구에 살았잖아. 상황이 바뀌었어."
"상황이 바뀌었다고 원칙까지 흔들 수는 없어요!"
서윤이 마침내 언성을 조금 높였다. 가슴속에 억눌러 두었던 두려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평일에 도현 씨가 수시로 유나를 데리러 오고 저녁을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면 유나는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엄마랑 아빠가 이제 다시 같이 사나 보다',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는 건가' 하고 헛된 기대를 품지 않겠어요?"
서윤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지난 목요일에 겨우 아이한테 말해 줬잖아요. 엄마 아빠는 따로 살지만 널 사랑한다고. 그런데 평일까지 도현 씨가 내 삶의 반경에 불쑥 들어오면 그 경계는 다 무너져요. 유나한테 또 다른 혼란을 줄 순 없어요. 그리고……."
서윤은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나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내가 혼자서 유나를 온전히 키워 내겠다고 다짐하고 일 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버텼어요. 그런데 도현 씨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내 생활의 리듬도 내 독립도 전부 흔들려요. 난 그렇게는 못 해요."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쏟아져 내렸다.
서윤은 도현이 과거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답답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혹은 매서운 논리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들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 생활 내내 갈등이 생길 때마다 도현은 늘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침묵하지 않았다. 도현의 표정에는 반박이나 짜증 대신 깊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도현이 천천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윤과의 거리를 넓혀 주며 그녀가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려는 몸짓이었다.
"미안해."
도현의 낮고 부드러운 사과에 서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서윤 씨 입장을 다 헤아리지 못했어. 유나 생각만 앞서서 서윤 씨가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혼자 버텨 왔는지 그 경계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있었네."
도현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억지스러움도 없었다. 진심으로 상대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무게였다.
"강요하려는 거 아니었어. 서윤 씨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면 어떤 좋은 방법도 다 의미 없어. 유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엄마의 안정이니까."
도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기존 일정 그대로 지키자. 격주 토요일 열 시부터 일요일 여섯 시까지. 약속대로 할게."
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현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서며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수용해 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기 조심해. 유나랑 맛있는 저녁 먹고."
도현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돌아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을 걸어가는 도현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서윤은 벤치에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자신의 원칙을 완벽하게 지켜 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시리고 무거운 걸까. 도현이 건넨 것은 침범이 아니라 아이와 자신을 향한 조심스러운 온기였다는 것을 서윤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빌라 현관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구수한 카레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유나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아빠와 함께 주워 온 나뭇잎을 스케치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이 주 뒤 토요일에 색연필로 커다랗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유나가 고개를 들고 서윤을 향해 활짝 웃었다.
"엄마, 아빠가 주워 준 나뭇잎으로 내일 사자 갈기 만들 거야. 멋있겠지?"
"응…… 정말 멋있겠다."
서윤은 신발을 벗으며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해맑은 얼굴과 달력에 새겨진 외로운 동그라미 사이에서 서윤이 평생을 걸쳐 쌓아 올린 견고한 원칙의 벽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