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같은 동네 학부모가 됐다

7화: 흔들리는 선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밤새 불어닥친 찬 바람 탓에 골목 어귀의 은행나무 잎들이 보도블록 위로 노랗게 흩어져 있었다. 서윤은 유나의 노란색 유치원 모자 턱끈을 매만져 주며 작은 손을 꼭 쥐었다. 바닥에 깔린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엄마, 이거 봐. 바삭바삭 소리 나."
"그러네. 밤사이에 바람이 많이 불었나 봐. 감기 안 걸리게 옷 여미자."
유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종걸음을 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등원길이었지만 서윤의 발걸음은 유독 무거웠다.
어젯밤 놀이터 벤치에서의 대화가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평일 돌봄을 보태겠다는 도현의 조심스러운 호의를 서윤은 날 선 원칙을 내세워 단칼에 잘라냈다. 도현은 반박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인정하고 물러섰다.
차라리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면 이토록 속이 쓰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도현의 담담한 사과와 쓸쓸한 뒷모습은 서윤이 지난 일 년간 견고하게 쌓아 올린 방어벽에 작지만 선명한 균열을 남겨 놓았다.
햇살나무 유치원 정문 앞에는 벌써 아이들의 손을 잡은 학부모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끝에 도현이 서 있었다.
도현은 짙은 감색 코트 차림으로 민재의 가방 지퍼를 채워 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던 도현의 시선이 서윤과 마주쳤다.
찰나의 어색한 침묵이 공기 중에 번졌다.
"안녕하세요, 서윤 씨."
도현이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지나치게 친근하지도 매정하게 차갑지도 않은 그저 같은 동네 학부모로서의 완벽한 거리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자신이 어젯밤 요구했던 그 '경계'를 도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서윤도 짧게 목례를 건넸다.
"민재야!"
유나가 민재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민재도 커다란 안경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유나야, 이것 봐. 삼촌이 오늘 아침에 준 공룡 스티커야."
"우와, 트리케라톱스다!"
아이들이 금세 티 없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맞잡았다. 그때 새싹반 담임교사인 박 선생님이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유나 어머님, 민재 아버님, 마침 두 분 다 계시네요. 이거 꼭 확인해 주셔야 해요."
선생님이 건넨 노란색 안내문 상단에는 굵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2026 햇살나무 유치원 가을 배움 발표회 안내]
"이 주 뒤 금요일에 원내 강당에서 가을 배움 발표회가 열려요. 올해 새싹반은 모둠별로 이인 일조 역할극을 준비하기로 했거든요. 유나와 민재가 노랑 모둠 대표로 짝을 이뤄서 무대에 서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안내문의 세부 내용을 가리켰다.
"제목은 '숲속 동물들의 겨울 준비'예요. 유나는 숲을 누비며 부지런히 식량을 찾는 꼬마 다람쥐 역이고 민재는 겨울잠을 준비하는 아기 곰 역이에요. 두 아이가 대사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협동하는 게 핵심이라서요. 유치원에서도 연습하겠지만 대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가정에서도 함께 대사를 맞춰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유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엄마, 나 다람쥐야? 꼬리도 달고 무대에서 깡충깡충 뛰는 거야?"
"응, 유나가 주인공 다람쥐야."
민재도 도현의 옷자락을 잡으며 또렷하게 말했다.
"삼촌, 나는 잠꾸러기 곰이래. 대사가 여섯 줄이나 돼."
서윤은 손에 쥔 안내문을 내려다보았다. 노랑 모둠 연습 일정표와 무대 소품 준비 안내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가정 연계 연습 일정은 모둠 부모님들끼리 상의하셔서 이번 주 금요일까지 회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상에 붙일 도토리 소품도 함께 만들어 주셔야 하고요."
선생님이 다른 학부모를 맞이하러 돌아선 뒤 서윤과 도현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가정 연계 연습. 부모 간의 긴밀한 일정 조율.
불과 반나절 전 평일 돌봄을 나누자는 제안을 차갑게 거절했던 서윤의 귓가에 자신의 매정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도현의 시선이 안내문에서 서윤의 굳은 얼굴로 천천히 옮겨왔다.
서윤은 도현이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긴장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거봐, 결국 이렇게 될 텐데 왜 거절했어'라는 말이 돌아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안내문 잘 챙겨 보겠습니다. 유나 대본은 제가 저녁에 사진 찍어서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민재 가방에 두 장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서요."
도현은 어젯밤의 제안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발표회 준비를 빌미로 자신의 주장을 다시 밀어붙이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 부탁드릴게요."
서윤이 간신히 대답하자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민재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유나야, 이따 하원할 때 보자. 민재야, 들어가자."
도현이 민재의 손을 잡고 교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단정하고 올곧은 뒷모습을 보며 서윤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요구한 선을 완벽하게 지켜 주는 상대 앞에서 오히려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의 날카로움에 스스로 베인 듯한 통증이었다.
오후 두 시. 출판사 '도담아이' 편집실.
창문 너머로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서윤의 책상 위에는 인쇄용 원색 교정지와 수정 펜, 포스트잇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모니터 오른쪽 구석의 메신저 창에는 기획편집팀 단체 공지가 붉은 알림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긴급 공지: 유아 베스트셀러 '마음 씨앗' 전면 개정판 인쇄 일정 단축 안내]
인쇄소 용지 수급과 대형 서점 겨울 기획전 배포 일정 때문에 당초 다음 달 초로 예정되었던 마감일이 당장 다음 주말로 앞당겨졌다.
"한 대리님, 어쩌죠? 이번 주 안에 최종 교정 다 보고 목요일부터는 파주 인쇄소 직접 가서 색 감리 봐야 할 것 같아요."
후배 편집자가 울상을 지으며 교정지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인쇄소 공정 밀리면 겨울 배포 전체가 엎어진다고 대표님이 무조건 일정 맞추라고 하셨어요. 이번 주 야근은 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네, 알겠어요. 제가 일정 쪼개서 다시 정리할게요. 수진 씨는 3권 도판 오류 먼저 잡아줘요."
서윤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후배를 안심시켰지만 모니터 뒤로 감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목요일 파주 인쇄소 감리. 금요일 2차 인쇄 감리 및 최종 발송. 매일 저녁 이어질 야간 교정 작업.
유치원 정규 하원 시간은 네 시 반. 종일반을 신청하면 최장 일곱 시까지 아이를 맡길 수 있지만 파주에서 서울 은솔동까지 퇴근길 정체를 뚫고 오면 일곱 시를 맞추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게다가 유나의 가을 발표회는 바로 다음 주였다.
'가정에서도 함께 대사를 맞춰보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매일 밤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겨우 아이 밥을 먹이고 나면 대사를 외우기는커녕 씻기고 재우기에도 벅찰 터였다.
그때 책상 위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은솔동 책방 '페이지 사이'를 운영하는 대학 선배 지혜였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네, 지혜 선배."
"서윤아, 목소리가 왜 그래? 또 밥 거르고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지?"
수화기 너머로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지혜의 특유의 날카롭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에요. 신간 마감 일정이 좀 당겨져서 일정표 다시 짜느라 그래요."
"너 숨소리만 들어도 알아. 유나 유치원 끝나고 종일반에만 묶어 두고 너는 밤새 교정지 붙들고 씨름할 생각이지?"
지혜의 정확한 지적에 서윤은 말문이 막혔다.
"선배,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맡은 책이고 제가 책임져야 하는 일인데요."
"책임지는 건 좋은데 너 몸 부서지는 건 생각 안 해? 은솔동에 사람 하나 없니? 필요하면 손을 뻗어. 학부모든 이웃이든 도움을 청해야 버틴다. 혼자서 다 짊어지겠다고 버티는 건 독립이 아니라 미련한 고집이야."
"제 일이에요.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요. 선을 넘기 시작하면 나중에 더 복잡해져요."
서윤의 단호한 대답에 지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윤아. 선이라는 게 너를 지켜주는 울타리여야지 너 스스로를 가두고 옥죄는 감옥이 되면 안 되는 거야. 그 선 때문에 제일 먼저 숨이 차는 게 누구인지 잘 생각해 봐."
지혜의 말은 서윤의 가슴 한가운데를 무겁게 찔렀다.
전화를 끊은 뒤 서윤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키려던 그 단단한 선.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유나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그어 둔 그 경계가 지금은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유나의 일상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서윤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붉은 펜을 집어 들었다.
저녁 여섯 시 오십 분.
서윤은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올라 은솔동 골목길을 내달렸다. 찬바람이 코트 깃 사이로 사정없이 파고들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서류 가방이 옆구리를 둔탁하게 쳤다.
유치원 현관 유리문 너머로 따뜻한 주황색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종일반 교실 문을 열었을 때 교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교실 구석에 단 두 아이만이 남아 있었다.
유나와 민재였다.
낮은 나무 탁자 위에 두 아이의 노란색 스케치북과 코팅된 대본 카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유나는 작은 손으로 다람쥐 그림 카드를 쥔 채 종알종알 대사를 읊고 있었다.
"아기 곰아, 어서 일어나. 눈이 오기 전에 도토리를 같이 모아야 해."
맞은편에 앉은 민재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대본을 읽었다.
"으음…… 아직 졸린데. 다람쥐야, 도토리는 큰 바위 뒤에 숨겨뒀어."
"그다음엔 내가 바구니를 흔드는 거야! 민재야, 바구니 이렇게 흔들면 네가 벌떡 일어나야 해."
"알았어. 네가 바구니 흔들면 내가 하품하면서 일어날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서로의 눈을 맞추며 대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나의 뺨은 연습에 열중하느라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던 서윤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때 뒤편 복도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숨을 몰아쉬는 도현이 들어섰다. 작업복 패딩 점퍼에 흙먼지가 조금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장에서 곧장 뛰어온 듯했다.
도현과 서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두 사람 모두 턱 끝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삼키고 있었다.
"엄마!"
"삼촌 왔다!"
아이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나가 다람쥐 대본을 손에 꼭 쥔 채 서윤에게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나 다람쥐 대사 벌써 반이나 외웠어. 민재가 곰 목소리 진짜 잘 내. 흉내 내는 거 엄청 웃겨!"
민재도 도현의 손을 잡으며 신이 나서 말했다.
"삼촌, 유나가 바구니 흔들 때 내가 일어나는 건데 둘이 같이 하니까 진짜 재밌어. 선생님이 내일도 같이 연습해 오랬어. 우리 집에서 유나랑 연습하면 안 돼?"
유나도 기대에 찬 눈망울로 서윤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응? 민재네 집에서 삼십 분만 연습하고 가면 안 돼? 혼자 하면 재미없단 말이야."
순간 교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부탁 앞에서 서윤의 목구멍이 꽉 막혔다.
어젯밤 자신이 쏟아냈던 말들이 떠올랐다.
'평일 하원 후에 도현 씨가 수시로 유나를 데리러 오고 저녁을 먹이면 유나는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 경계는 다 무너져요.'
자신이 쳐 둔 울타리가 아이의 가장 자연스러운 배움과 기쁨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이번 주 내내 이어질 야근과 인쇄소 감리 속에서 유나와 마주 앉아 대본을 맞춰 줄 여유조차 없는 주제에 이 자리에서 "안 돼. 집으로 가자"라고 말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서윤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망설이던 바로 그 순간 도현이 무릎을 굽혀 두 아이의 눈높이에 섰다.
도현은 다정한 손길로 민재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 준 뒤 유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민재야, 유나야. 오늘 둘이 연습 아주 열심히 잘했네."
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유나 어머님도 오늘 회사 일로 많이 피곤하시고 지금은 집에 가서 따뜻한 저녁 먹고 푹 쉬어야 할 시간이야. 연습은 유치원에서도 매일 할 수 있잖아."
민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삼촌, 집에서 혼자 하면 유나 대사를 못 듣잖아."
"삼촌이 집에서 다람쥐 대사 같이 읽어줄게. 유나도 집에서 엄마랑 같이 연습하면 돼. 서로 약속한 시간은 지켜야 멋진 곰이랑 다람쥐가 되는 거야. 알았지?"
도현은 어젯밤 서윤이 강조했던 '약속과 경계'를 고스란히 지켜 내며 아이들을 차분하게 설득했다.
그 어디에도 서윤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제안이 옳았음을 과시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서윤이 곤란해하지 않도록 자신이 먼저 악역을 자처하며 물러서 준 배려였다.
유나는 서윤의 눈치를 살피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민재야, 내일 유치원에서 또 맞추자."
"응, 내일 공룡풀 물 주고 바로 연습하자."
아이들이 가방을 챙겨 메었다.
유치원 정문을 나서는 길에 늦가을 밤의 차가운 바람이 두 가족의 옷깃을 스쳤다.
도현이 민재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오늘 늦게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도현은 단정한 목례를 남기고 어두운 골목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서윤은 유나의 작은 손을 잡은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도현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도현이 철저하게 지켜 준 것은 서윤의 원칙이었지만 그 원칙 뒤에 남겨진 것은 피로에 지친 엄마와 아쉬움을 억누르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뿐이었다.
밤 열 시 반.
거실의 형광등을 끄고 식탁 위의 작은 팬던트 조명 하나만을 켜 두었다.
방 안에서 색색거리는 유나의 고른 숨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아이는 머리맡에 다람쥐 대본 카드를 소중하게 얹어 둔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피곤했는지 대본을 세 번도 채 읽지 못하고 눈꺼풀을 깜빡이다 스르륵 잠든 아이였다.
서윤은 식탁 앞에 앉아 붉은 펜을 쥔 채 한 장 한 장 교정지를 넘겼다.
하지만 활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흩어졌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붉은색 색연필로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인쇄소 마감 일정이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의 파주 일정에는 커다란 느낌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주말 칸에는 유나가 삐뚤빼뚤하게 그려 둔 커다란 아빠 동그라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주일 뒤.
그때까지 서윤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까.
파주 인쇄소에서 밤늦게 달려와 텅 빈 유치원에서 홀로 기다릴 유나를 데려오고 지친 몸으로 밥을 차리고 아이의 도토리 소품을 밤새 오려 붙이며 다람쥐 대사를 함께 외워 줄 수 있을까.
그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는 것이 정말 유나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이 상처받기 싫고 과거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부리는 비겁한 자존심일까.
'선이라는 게 너를 지켜주는 울타리여야지 너 스스로를 가두고 옥죄는 감옥이 되면 안 되는 거야.'
지혜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텅 빈 교실에서 아이들을 설득하며 자신의 경계를 지켜 주던 도현의 깊고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도현은 변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며 상대의 감정을 외면하던 사람이 이제는 상대의 상처와 원칙을 지켜 주기 위해 스스로 물러설 줄 아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변하지 않고 옛 상처의 껍질 속에 웅크린 채 고집을 부리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자기 자신일지도 몰랐다.
서윤은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메신저 앱을 열었다.
연락처 목록 한구석에 저장된 이름.
[강도현 - 민재 보호자]
대화창을 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주고받은 메시지는 오직 건조한 일정 확인뿐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열 시에 데리러 갑니다.'
'유나 열감기가 있어서 해열제 가방에 넣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서윤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입력창을 눌렀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도현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유치원 발표회 역할극 관련해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서윤은 숨을 멈추었다.
한 번 허물어지기 시작한 선은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상처받고 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방문 틈새로 보이는 유나의 작은 발과 머리맡의 대본 카드를 보는 순간 서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탁 풀려나갔다.
엄마로서의 책임은 혼자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활짝 웃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
서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판 위의 글자들을 지우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견고하기만 하던 서윤의 마음속 벽에 따뜻하고 위태로운 틈 하나가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