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고 온실 카페나 차리렵니다

6화: 별비단꽃을 찾는 손님
“여기가 베르데 글라스입니까?”
아델리아는 문고리를 쥔 채 멈춰 섰다.
카시안이 남긴 발자국 위로 살얼음이 얼어붙는 시간이었다. 정문 너머에 선 사내는 두툼한 여행용 모직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비쳐 나온 옅은 금빛 머리칼에 녹은 눈방울이 맺혀 반짝였다.
“맞습니다만 아직 정식 개장 전입니다.”
아델리아는 문을 반 뼘만 열어둔 채 말했다. 사내는 언 뺨을 문지르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었다. 푸른 눈동자가 온실 안쪽을 민첩하게 훑었다.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상인조합 앞 게시판 공고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공고를 보셨군요.”
“네. 외곽에 온실 카페가 생긴다는 소식이 흥미로웠거든요. 눈길을 오래 걸었더니 발끝에 감각이 없더군요. 가엾은 나그네에게 훈기라도 잠시 쐬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능청스러우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발음은 거친 눈길을 떠도는 방랑자답지 않게 반듯했다.
아델리아는 사내의 어깨에 얹힌 잔설과 가죽 장화를 살폈다. 추위를 피해 찾아온 이를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안전 검사 중이라 창가 자리 네 곳만 이용하실 수 있어요. 다른 구역은 둘러보시면 안 됩니다.”
“서 있을 자리만 빌려주셔도 감지덕지입니다.”
아델리아가 문을 열어주자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정문 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마리가 양손에 서류를 쥐고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사장님! 저 왔어요! 위생과 접수증 하나 받는데 하루가 다 갔네요…… 어라? 손님인가요?”
마리는 낯선 사내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사내는 모자를 벗어 품에 얹으며 단정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길을 가다 잠시 온기를 빌리고 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마리는 사내의 수려한 외모와 태도에 흠칫 놀라더니 아델리아 곁으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사장님, 옷은 평범한데 귀티가 철철 흐르는데요?”
“길을 지나다 들른 손님이야. 마리, 접수는 잘 끝났어?”
“그럼요. 다음 주 화요일에 주방 검사관이 나오기로 했어요. 오븐 점검만 마치면 통과예요.”
마리가 서류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사내가 창가 쪽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그 자리에 앉으세요.”
사내는 망토를 벗어 등받이에 걸쳤다. 안쪽에는 짙은 감청색 튜닉을 입고 있었다. 장식은 없었지만 옷맵시가 유난히 정갈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이 참 좋군요. 흙냄새 사이로 달콤하고 쌉싸름한 풀내가 납니다.”
“온실 뜰의 로즈마리 향이에요. 개업 전이라 따뜻한 보리차나 구운 사브레 정도만 가능합니다.”
아델리아가 담담하게 안내하자 사내는 턱을 괸 채 푸른 눈을 빛냈다.
“공고문에서 마음의 피로를 덜어 주는 식물 디저트를 연구한다고 보았습니다.”
“과장된 소문입니다. 식물은 치료제가 아니에요. 가쁜 숨을 고르고 긴장을 잠시 누그러뜨릴 뿐입니다.”
“겸손하시군요. 실은 제가 몇 달째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낮에도 머리가 깨질 듯 아프거든요. 혹시 ‘별비단꽃 쿠키’를 맛볼 수 있을까요?”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아델리아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리 역시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별비단꽃이요? 손님, 그 꽃을 어떻게 아세요?”
별비단꽃은 왕실 연구소의 옛 문헌이나 약초학자가 아니면 이름조차 알기 어려운 희귀 식물이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떠돌이 약초 상인에게 들었습니다. 깊은 밤에 푸른 비단처럼 피는 꽃인데 상실감과 공포를 달래고 나쁜 꿈을 줄여 준다고 하더군요. 옛 황실 연구소 온실이라면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아델리아는 사내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했다. 유쾌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떠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손님이 아니었다.
“별비단꽃은 생화 채취가 법으로 금지된 보호 식물입니다.”
아델리아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온실에도 성체는 없어요. 관습에 따라 밤사이 자연스럽게 떨어진 꽃가루만 극소량 채취해 보관할 뿐입니다.”
“꽃가루는 남아 있다는 뜻이군요.”
“옛 관리실에 소량 보관된 것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과자를 만병통치약처럼 내놓을 수는 없어요. 악몽을 완전히 없애 주지도 못하고 많이 드시면 오히려 나른함과 어지럼증이 올 수 있으니까요.”
아델리아의 확고한 대답에 사내의 눈이 커졌다. 희귀 식물에 온갖 효능을 덧붙여 폭리를 취하려는 여타 상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예상보다 훨씬 정직한 대답이군요.”
사내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감탄이 묻어났다.
마리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을 얹었다.
“손님,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저희는 거짓말은 안 팝니다. 그래도 너무 지치셨다면 시험 삼아 구워 드릴 수는 있어요. 별비단꽃 꽃가루를 눈곱만큼 섞은 사브레 반죽이 숙성실에 딱 한 덩이 있거든요.”
사내는 손뼉을 가볍게 치며 반색했다.
“기꺼이 맛보고 싶군요. 그 사브레와 따뜻한 보리차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금방 구워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리는 활기찬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뛰어갔다.
주방 쪽에서 오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작 타는 훈훈한 냄새가 번져 나왔다.
아델리아는 차를 끓이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채웠다. 불씨를 살피는 사이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창가에 앉아 있어야 할 사내가 중앙 통로를 걷고 있었다.
“손님, 창가 자리 외에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델리아가 돌아서며 주의를 주었다. 사내는 두 손을 뒤로 얹은 채 천장의 금 간 유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리 보수가 쉽지 않겠습니다. 무거운 눈을 버텨 낸 게 용하군요.”
그는 산책하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아델리아가 붉은 분필로 두껍게 그어 둔 폐쇄 구역이었다. 선 너머 축축한 돌벽 아래에는 육중한 철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왕실 연구소 시절부터 굳게 닫혀 있던 잠긴 지하문이었다.
사내의 시선이 문 앞 바닥에 멎었다. 돌 틈에 희미하게 낀 거무스름한 결정, 즉 검은 서리의 흔적을 훑는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멈추세요.”
아델리아가 빠르게 다가가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발아래에는 선명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선을 넘지 마세요. 그쪽은 출입 금지입니다.”
사내는 뻗으려던 손을 허공에 멈췄다. 서늘한 눈빛이 아델리아의 단호한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찰나였지만 여행자의 태도 밑에 숨겨져 있던 묵직한 위압감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이 문은 무엇입니까?”
사내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옛 연구소의 지하 창고입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바닥이 무너졌을 위험이 크기에 닫아 두었습니다.”
“단순한 창고라기엔 문이 지나치게 견고하군요. 왕실 인장이 찍힌 자물쇠까지 걸려 있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에 아델리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손님, 여행자라면서 왕실의 봉인 인장까지 알아보시는군요.”
사내는 자신이 한순간 방심했음을 깨달았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도 근처에서 자란 이라면 관청 문장쯤은 눈에 익기 마련이니까요. 문이 신기해서 다가가 본 것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그는 군말 없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나 분필선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아델리아의 귓가에 미세한 진동이 스쳤다.
식물의 감정을 읽는 ‘청록의 청음’이었다.
창가의 어린 마음잎에서 느껴지던 호흡과는 달랐다. 지하문 너머 깊은 땅속에서 거대한 나무뿌리가 숨을 쉬듯 아주 낮고 무거운 고동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바닥에 흩어진 검은 서리 가루 근처에서 그 울림이 둔탁하게 끊겼다.
아델리아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카시안이 보았던 어두운 바닥, 그리고 이 낯선 사내가 파헤치려던 문. 이 지하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언가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낯선 손님 앞에서 내색할 때가 아니었다.
“안전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손님이 다치거나 오염된 먼지를 마시면 온실의 책임이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공간의 주인이 정한 법을 따라야지요.”
사내는 순순히 물러나 창가 자리로 돌아갔다.
마리가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을 때 온실 안에는 고소한 버터 냄새와 밤안개 같은 서늘한 향이 감돌았다.
“기다리셨죠! 갓 구운 별비단꽃 사브레예요!”
마리는 둥근 과자 세 개와 김이 오르는 보리차 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노릇하게 구워진 사브레 표면에는 은은한 보랏빛 가루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색이 아주 곱군요.”
사내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드시기 전에 안내문부터 확인해 주세요.”
아델리아는 사브레 접시 옆에 손수 적은 종이를 놓았다.
‘별비단꽃 사브레: 악몽으로 인한 불안과 가슴 두근거림을 잠시 누그러뜨립니다. 피로와 불면을 완전히 없애 주지 않으며 하루 두 개 이상 드시면 나른함이 올 수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드세요.’
사내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필요한 만큼만 드세요’라…… 참 독특한 가게군요. 보통 장사하는 이들은 하나라도 더 팔려 애쓰는데 말입니다.”
“더 많이 판다고 손님의 몸이 더 편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아델리아의 담담한 말에 사내는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과자 하나를 베어 물었다.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버터 맛이 퍼졌다. 뒤이어 혀끝에 감도는 맑고 서늘한 기운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사내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수도에 드리운 마력 오염과 식물청 비리를 감시하느라 며칠 밤낮을 짓누르던 두통이 잦아들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지만 굳어 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려났다.
“……훌륭합니다.”
사내는 진심이 실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맛있는 과자가 아니군요. 사람의 숨통을 틔워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다만 과신하지는 마세요. 오늘 밤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을 정도의 도움일 뿐입니다.”
“그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최근 몇 달 동안 그런 밤을 맞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사내는 차를 마시며 두 번째 사브레를 비웠다. 그러고는 안내문에 적힌 대로 세 번째 과자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절제된 몸가짐이었다.
어느덧 유리창 너머로 푸른 어둠이 짙게 깔렸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여몄다. 품에서 은화 주머니를 꺼내려 하자 아델리아가 손을 가로저었다.
“정식 개장 전이라 재료 원가인 동화 석 닢만 받겠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 동화 석 닢이라니 양심이 찔리는군요.”
“나머지는 정식으로 문을 연 뒤에 오셔서 지불하세요. 그때는 제값을 다 받을 테니까요.”
아델리아는 장부를 내밀었다.
“대신 시험 손님 명단에 이름을 적어 주세요.”
사내는 펜을 쥐고 장부를 내려다보다가 첫 줄에 적힌 글씨를 발견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카시안. 마음잎 차 한 잔. 매일 방문 예정.’
사내의 푸른 눈에 찰나의 흥미가 번졌다.
그는 펜을 움직여 그 아래 칸에 단정한 필체로 이름을 적었다.
‘루시엔. 별비단꽃 사브레. 따뜻한 보리차.’
가문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직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루시엔 씨군요.”
“네. 편하게 루시엔이라 불러 주십시오.”
루시엔은 모자를 고쳐 쓰며 정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정식 개업일이 기다려지는군요. 그때는 줄을 서서라도 찾아오겠습니다.”
“규칙을 지켜 주신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루시엔이 문을 열고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온실 안으로 흩날렸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 저 손님 정말 단순한 여행자 맞을까요? 글씨도 그렇고 풍기는 태도가 어지간한 귀족보다 우아한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델리아는 장부에 나란히 적힌 ‘카시안’과 ‘루시엔’이라는 두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매일 오겠다고 선언한 전남편과 잠긴 지하문을 날카롭게 살피고 간 낯선 여행자.
아델리아는 몸을 돌려 남쪽 구역의 지하문을 바라보았다. 붉은 분필선 너머로 차가운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베르데 글라스의 봄은 결코 조용하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