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계 폐선으로 우주 함대를 만듦

2화: 한 줄의 수리 도면
도윤은 출항 경로 대신 도면의 붉은 점을 눌렀다.
17번 격벽. 보조 추진기 냉각 배관이 지나가는 자리였다. 며칠 전에도 실란트를 덧발랐던 곳이다.
[관통부 기밀 균열 의심. 현장 측정 필요.]
그는 주머니 속 다면체를 내려다봤다. 케이블은 뽑혀 있었고 표면의 빛도 꺼져 있었다. 그런데 도면은 선명했다.
화면 구석을 펼치자 마지막 측정 시각이 나왔다. 추격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콘솔에 남은 기록을 보고 있던 셈이다.
도윤은 추진기 레버에서 손을 뗐다.
협곡을 빠져나가려면 방향부터 틀어야 했다. 보조 추진기 없이 주 엔진만 밀어붙이면 벽과 충돌할 수도 있었다. 우현 와이어는 끊어 버렸으니 아까처럼 배를 잡아 돌릴 수도 없었다.
[상환 잔여 시간 46시간 52분]
독촉 창을 한쪽으로 밀었다. 숫자를 가린다고 빚이 줄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배가 먼저였다.
그는 외부 송신기를 끄고 정비 회선을 따로 분리했다. 다면체에는 전류 제한기를 거친 저전압 케이블을 연결했다. 통신과 추진 제어로 넘어가는 단자는 빼 두었다.
푸른 선이 다시 들어왔다.
[장치 식별자: 아르카]
[연결 범위: 선내 정비 회선]
[정비 도면 열람: 선체 권한 확인 필요]
"아르카."
처음 입에 올려 보는 이름이었다. 장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선내에 보관된 모래갈매기 소유 증서와 정비 기록을 열었다. 자신의 정비용 인증키를 꽂자 열람 범위가 표시됐다. 등록 선체 한 척의 진단과 수리 도면. 그 아래 메뉴는 닫힌 채였다.
그는 허용을 눌렀다.
입체 도면의 일부가 회색으로 변했다. 센서가 끊어진 부분들이었다. 붉은 선이 전부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고 직접 재야 할 곳에는 빈칸이 남았다.
콘솔 아래 압력계의 바늘이 조금 내려갔다.
도윤은 유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바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벗어 놓았던 우주복을 끌어당겼다. 인양에 쓴 산소통을 빼고 벽에 걸린 예비 통을 끼웠다. 충전된 통이 있던 고정대 한 칸이 비었다.
17번 격벽 앞에는 오래된 실란트 냄새가 남아 있었다.
도윤은 헬멧을 닫고 장갑 끝으로 굳은 밀봉제를 긁었다. 평소에는 기름때만 닦고 덧칠했던 자리였다. 검지액을 문지르자 은빛 막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휴대 단말에 물린 탐촉자를 배관 지지대 아래로 밀었다. 녹슨 볼트 뒤쪽에서 파형이 갈라졌다. 실란트가 아니라 그 아래 금속까지 벌어져 있었다.
예인 케이블로 선체를 꺾을 때 이 지지대에도 힘이 걸렸을 것이다.
"겉만 막았네."
자기 손으로 덧바른 밀봉제가 장갑에 붙었다. 배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손이었다.
관통부 안쪽의 냉각수 귀환관에는 얼룩이 굳어 있었다. 누출을 막겠다며 감아 둔 띠 아래에서 새 방울이 맺혔다. 정지된 보조 엔진 쪽에도 순환 펌프는 여전히 냉각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손바닥에 규칙적인 떨림이 왔다.
펌프가 돌 때마다 지지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탐촉자의 균열 폭 표시도 함께 달라졌다.
[운항 추력 제한: 정격의 30퍼센트 이하]
[균열부 진동원 차단 필요]
도윤은 보조 냉각 순환 펌프의 차단기를 내린 뒤 분기 밸브를 잡았다. 반 바퀴쯤 돌자 손잡이가 걸렸다. 장갑을 벗어 힘을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바이저의 압력 하강 표시가 시야에 걸렸다.
그는 허리에서 짧은 렌치를 뽑아 손잡이에 물렸다.
끼긱.
잔압을 밀어내며 밸브가 돌아갔다. 펌프가 멎은 뒤로 지지대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별도 배관을 쓰는 주 기관 냉각계의 압력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공기는 계속 샜다.
다시 실란트를 바르면 당장 출항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윤은 굳은 조각을 손에 쥐었다가 공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선미 정비 통로를 한 번 더 훑었다. 사람은 없고 걸어 둔 공구와 접은 작업등뿐이었다. 필요한 렌치 두 개를 챙겨 안쪽 기밀문을 닫았다. 조종석으로 돌아가는 쪽에서 수동 잠금 바퀴를 끝까지 조였다.
살아 있는 공간과 새는 공간이 갈렸다.
휴대 단말의 거주구 압력 그래프가 수평으로 누웠다. 닫힌 문 너머의 압력은 계속 낮아졌다.
도윤은 문에 붉은 정비 표찰을 붙였다.
기밀 손상. 진입 전 우주복 착용.
배를 고친 건 아니었다. 더 잃지 않도록 문 하나를 닫았을 뿐이다.
작업실로 돌아오자 아르카는 입력한 탐촉자 기록을 도면에 겹쳤다.
[관통부 지지 구조: 도크 보강 필요]
[냉각 귀환관: 교체 필요]
도윤은 전체 교체 항목을 눌렀다. 격리한 통로를 열어 배관을 빼내고 외부 작업대에서 지지부까지 보강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부품값 이전에 도크가 필요했다. 그곳까지 갈 배도 필요했다.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의 질문에 화면은 바뀌지 않았다.
도윤은 보조 추진기의 마지막 정지 기록을 열었다. 냉각 압력 상실. 추진축 손상 경보는 없었다. 냉각을 되살리면 다시 시험해 볼 여지는 있었다.
그는 정비 기록의 ‘교체’ 옆에 ‘점검 후 결정’이라고 적었다. 고장 경보 하나가 없다는 이유로 멀쩡한 엔진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도윤은 도면을 직접 돌려 보조 기관실 위쪽을 확대했다. 출고 때 마련된 추가 냉각기용 예비 배관 두 개가 벽을 따라 지나갔다. 기관실 정비구를 열면 닿는 위치였다.
뚜껑만 닫혀 있던 예비 배관. 그는 이 배의 정비를 혼자 맡은 뒤로 그곳에 공구 가방을 걸어 두었다.
보조 기관실은 격리한 통로와 반대쪽 문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도윤은 공구 가방을 치우고 마개를 풀었다. 내부를 내시경으로 훑은 다음 시험 펌프를 물렸다. 압력을 걸어 둔 동안 도면에 입력할 치수를 쟀다.
기다리는 십 분이 유난히 길었다.
압력계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측정 기록을 정비 회선으로 보냈다.
푸른 선이 갈라진 관통부 앞에서 꺾였다. 예비 배관을 따라 올라간 선은 보조 엔진의 냉각 입구와 귀환부를 한 줄로 이었다.
[귀환 경로 우회안. 정격 성능 이내 복원.]
[독립 순환 펌프 및 밀봉재 필요.]
[기동 전 누설·부하 시험 필수.]
죽었다고 적어 둔 보조 추진기의 도면 위로 길 하나가 뚫렸다.
옆의 균열 표시는 여전히 붉었다. 냉각 경로를 바꿔도 격벽이 붙는 것은 아니었다. 도크에서 지지부를 보강하기 전까지 추력은 30퍼센트 아래로 묶였다.
도윤은 그 제한도 작업 메모에 옮겼다. 방향만 제대로 틀 수 있어도 협곡 입구까지는 배를 다룰 여지가 생겼다.
도윤은 선반에서 폐펌프를 꺼냈다. 나사 지름은 같았다. 그는 명판 사진을 올리고 호환 계산을 눌렀다.
[사용 불가. 작동 압력 및 밀봉재 규격 불일치.]
"이것도 안 맞네."
손에 쥔 것은 유압유용이었다. 냉각재를 채우면 밀봉재부터 망가질 물건이다. 나사만 맞으면 된다고 우길 상대도 없었다.
그는 폐품 장부를 열었다. 직접 산 물건들의 영수증과 입고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군용 코어도 희귀 합금도 없었다. 녹슨 모터와 깨진 전력변환기뿐이었다.
그중 퇴역 화물 승강기의 전력변환기에서 손이 멈췄다.
동력부는 타 버렸지만 냉각 카트리지가 아래쪽에 따로 붙어 있었다. 부품 계열 번호가 보조 추진기의 정비 기록과 같았다. 화물 승강기에도 같은 표준 냉각 모듈을 쓴 모양이었다.
그는 명판을 확대해 올렸다.
[동일 계열 후보. 분해 후 실물 검증 필요.]
필요한 밀봉 고리 두 개와 짧은 연결관의 규격이 이어졌다. 도윤은 수리함을 열어 밀봉 고리의 포장 번호부터 맞췄다. 두 개를 꺼내자 해당 규격 칸이 비었다. 연결관은 더 긴 것을 잘라 쓸 수 있었다.
그는 재료를 작업대 한쪽에 모았다. 후보 펌프만 쓸 수 있다면 조립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품 검증 완료 후 예상 작업: 3시간 40분]
[작업 방식: 수동. 연결된 작업 장치 없음.]
도윤은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설계선은 배관을 대신 옮겨 주지 않았다. 부품을 들고 보조 기관실까지 기어갈 사람도 볼트를 조일 사람도 자신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어디에 무엇을 끼워야 하는지 알았다.
폐승강기 전력변환기는 작업대 아래 묶여 있었다.
도윤은 고정 띠를 풀고 몸통을 끌어냈다. 모서리가 바닥에 긁히며 검은 가루가 떨어졌다. 매각표에는 620 C가 적혀 있었다.
일괄 매입. 주요 부품 분리 시 재감정.
그는 선체 수리함과 매각표를 번갈아 봤다. 내일 넘길 물건이었다. 통신이 닿는 곳에 나가면 매입상에게 인도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냉각 카트리지를 뜯고 나면 그 가격은 받을 수 없었다.
독촉장을 다시 열었다.
72,400 C.
전력변환기를 팔아도 배를 지킬 돈에는 못 미쳤다. 하지만 620 C면 산소와 연료를 조금은 채울 수 있었다. 지금 가진 것 가운데 확실하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었다.
도윤은 주머니에 넣어 둔 실란트 조각을 꺼냈다.
잘 붙어 있던 겉면 아래로 가느다란 금속 조각이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 보고 나서 손바닥을 털었다.
빈 배를 움직일 때마다 와이어를 끊어야 한다면 다음 예인 일을 받을 수 없었다. 620 C를 챙겨 돌아가도 상환 시계는 계속 줄어들 터였다.
그는 폐승강기 입고 영수증을 정비 기록 옆에 붙였다. 사 둔 물건을 수리 재료로 돌렸다는 증빙이었다. 청동 다면체에는 아직 그런 서류 한 장이 없었다.
그는 매각표를 떼어 뒤집었다. 뒷면에 냉각 카트리지의 규격과 나사 순서를 적고 전력변환기를 바이스에 고정했다.
육각 나사 하나가 녹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침투유를 먹이고 기다린 뒤 손잡이에 체중을 실었다. 나사가 짧은 소리를 내며 풀렸다.
아래 덮개를 열자 그을리지 않은 냉각 카트리지가 드러났다. 지워진 도장 아래 계열 번호는 도면과 일치했다.
도윤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는 카트리지를 빼내 시험 축을 끼웠다. 오른쪽으로 돌리고 다시 왼쪽으로 힘을 줬다.
움직이지 않았다.
장갑의 미끄럼 방지 면이 축에서 밀렸다. 냉각수가 말라붙은 틈에 갈색 찌꺼기가 두껍게 끼어 있었다.
도윤은 고착 상태를 입력했다.
[회전부 고착. 사용 가능 판정 보류.]
[고착 해소 시간은 예상 작업 시간에 포함되지 않음.]
시계에는 상환까지 45시간 46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펌프를 내려놓고 옆의 푸른 선을 보았다. 선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정작 그 위에 들어갈 작은 펌프 하나가 돌지 않았다.
도윤은 풀었던 바이스를 다시 벌렸다.
"축부터 살리자."
그는 펌프의 몸통을 물리고 분해용 렌치를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