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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빚을 추심합니다2화

죽은 사람의 빚을 추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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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유품의 이동 경로

수아는 나경의 채무 확인서를 열기 전에 발신 번호부터 기록했다.

문서는 전자 서명된 PDF였지만, 서명 시각은 나경의 휴대전화가 꺼져 있던 시간이었다. 도하는 파일 원본과 메일 헤더를 보존하고, 나경에게 링크를 다시 누르지 말라고 했다. 채무는 4,800만 원에서 0원으로 표시돼 있었고, 상태는 ‘책임자 확인 대기’였다.

“돈을 갚으라는 게 아니라, 이름을 넣으려는 것 같아요.” 수아가 말했다.

도하는 먼저 나경의 서명 동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문서에는 서명이 없었고, 인증 로그도 비어 있었다. 그는 채권 회사에 채무자 변경 근거와 동의 기록을 요구했다. 그 사이 태오가 다시 연락해 왔다. 보관소의 주소를 알려 줄 수 있지만, 원본 계약서는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나경은 어머니의 자개 상자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도하는 물건을 옮기지 않고 현장에서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태오와 함께 폐업한 장례 대행 업체 창고로 갔다. 건물은 외벽이 뜯겨 있었고, 출입문 자물쇠는 새것이었다. 태오는 열쇠를 갖고 있었지만, 창고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저도 물건을 맡긴 적이 있습니다.”

“누구 물건이죠?”

“제 어머니의 반지요. 계약서에 서명했을 때는 보관증이라고 들었습니다.”

창고 안에는 금속 선반이 열 개 놓여 있었다. 선반마다 이름 대신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경은 어머니의 번호를 찾았다. 자개 상자의 번호와 같은 칸에는 빈 상자만 남아 있었다. 태오는 물건이 여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하는 선반 안쪽의 긁힘을 확인했다. 최근에 상자를 꺼낸 흔적이었다.

수아는 바닥의 먼지를 촬영하고, 번호표가 붙은 자리를 기록했다. 물건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면 보관 기록이 필요했다. 창고 관리대장에는 입고 날짜와 보관료만 적혀 있었고, 출고자 이름은 비어 있었다. 나경은 어머니의 상자가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해 얼굴이 굳었다.

“제가 가져간 적 없어요.”

“아직 누가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도하가 말했다.

그들은 옆 선반에서 다른 고인의 유품을 발견했다. 낡은 손목시계, 어린이 운동화, 붉은 실타래. 각 물건에는 계약 번호가 붙어 있었다. 태오는 자신도 이 창고의 회수 업무를 맡았지만, 물건을 열거나 처분할 권한은 없다고 했다. 그의 위임장에는 채권 회수원이 아니라 보관물 전달자라고 적혀 있었다.

“왜 가족들에게 물건을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계약 당사자가 찾아오지 않으면 반환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는 고인입니다.”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도하는 그가 일부러 물건을 숨겼는지 의심했지만, 태오는 자신이 이 창고를 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창고 출입 로그에는 지난달 세 차례 출입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 번은 태오, 두 번은 다른 사람이었다.

수아가 번호표를 확대했다. 세 계약의 공증 번호는 같지만, 잉크가 찍힌 방향이 달랐다. 번호를 복제한 게 아니라 한 원본 계약서에서 여러 장을 눌러 찍어낸 흔적일 수 있었다. 창고 선반 가장자리에는 붉은 왁스가 굳어 있었다. 나경이 들고 온 자개 상자 안쪽과 같은 색이었다.

“상자가 여기 있었던 건 맞아요.”

“그렇다면 누군가 옮겼습니다.”

태오는 옛 보관소 직원이 이름을 말해도 물건을 찾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나경은 어머니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창고 안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선반 아래 작은 서랍이 저절로 열렸다.

서랍 안에는 나경의 어머니, 나경, 그리고 태오의 어머니 이름이 적힌 계약서 사본이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날 서명했지만, 같은 날짜에 같은 문장에 동의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창고 안쪽의 잠긴 서랍은 번호판이 새것이었다. 태오는 자기 열쇠 꾸러미에서 맞는 열쇠를 찾지 못했다. 나경은 도하에게 허락을 구했고, 그는 열쇠를 억지로 돌리지 말라고 했다. 잠금 장치가 파손되면 누가 언제 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수아는 서랍 외부와 바닥을 촬영하고, 수사기관에 연락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그때 창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선반 위의 종이 상자가 젖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관을 타고 서랍 쪽으로 흘렀다. 도하는 상자를 옮기지 않고, 방수포를 선반 위에 걸쳐 물길을 막았다. 태오는 손을 뻗어 젖은 봉투를 잡으려 했지만, 수아가 멈춰 세웠다.

“지금 옮기면 이동 기록이 끊겨요.”

“젖으면 글자가 사라집니다.”

“사진을 먼저 찍고, 종이 받침을 넣어서 한 장씩 옮기죠.”

태오는 숨을 고르고 수아가 촬영하는 동안 기다렸다. 나경은 봉투 위의 이름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읽으면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책임자로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도하는 이름 대신 봉투의 번호와 젖은 범위를 기록했다.

수사관이 도착하기 전, 서랍 틈에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나경은 어머니의 필체를 알아봤다. 그녀는 그 종이를 집고 싶었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수아는 삼각 집게로 종이 끝을 받쳐 꺼냈다. 종이에는 ‘이 물건을 받으면 계약이 시작된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쓴 게 맞아요.” 나경이 말했다.

“글씨만으로 작성자를 확정할 수는 없어요.” 도하가 답했다. “필적 감정과 문서 생성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 문장은 경고였을 수도, 계약 조항이었을 수도 있었다. 나경은 어머니가 유품 상자를 자신에게 맡기며 버리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상자를 받는 순간 계약이 시작됐다면, 어머니는 딸을 빚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했을지 모른다.

태오는 선반에서 자기 어머니의 반지 상자를 찾았다. 상자는 닫혀 있었지만, 자물쇠는 없었다. 그는 안을 열기 전에 도하와 수사관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이걸 열면 제 이름이 계약서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미 이름이 올라간 것 같습니다.” 나경이 말했다.

“그렇더라도 동의 없이 열지는 않겠습니다.”

태오는 반지 상자를 그대로 선반에 두었다. 그는 회수원이면서도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 선택을 했다. 도하는 그 결정이 계약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다고 경고했다. 태오는 모르는 사이에 가족을 빚에 묶는 것보다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했다.

수사관은 창고의 출입 기록을 확보했다. 최근 출입자 목록에는 태오 외에 세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폐업한 업체의 전 직원, 두 명은 현재 상속 대행 사무소의 직원이었다. 수아는 공증 번호가 반복된 계약서 세 장을 나란히 놓고 필압을 비교했다. 서명 자체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같은 펜으로 한 번에 작성된 것처럼 잉크가 번져 있었다.

“서명 이후에 이름만 바꿨을 수 있어요.”

도하는 그 가능성을 기록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계약서 사본을 원본으로 착각하게 만든 사본일 수도 있었다. 수사관은 종이를 봉인하고, 나경에게 어머니의 유품을 임시로 별도 보관하겠다고 안내했다. 나경은 동의하면서도 상자를 자신이 직접 인계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상자를 수사관의 손에 넘겼다. 상자를 놓는 순간 안쪽에서 열쇠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누구도 상자를 열지 않았는데, 잠긴 자개 상자 안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도하는 계약서 사본의 서명 부분을 확대해 나경이 평소 쓰는 글씨와 비교했다. 모양은 비슷했지만, 그녀의 서명에는 마지막 획이 왼쪽으로 돌아가는 습관이 있었다. 문서의 서명은 오른쪽으로 길게 뻗었다. 필적 감정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위조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본인이 작성하지 않았다는 진술과 맞지 않았다.

수아는 전자 문서의 생성 메타데이터를 확인했다. PDF는 계약 날짜보다 4년 뒤에 만들어졌고, 세 개의 계약서가 같은 컴퓨터에서 연속으로 저장됐다. 문서의 주민번호 일부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맞았지만, 계약 조항과 공증 문구는 완전히 같았다. 누군가 오래된 유품 보관 동의서를 바탕으로 새 계약을 편집했을 수 있었다.

나경은 그 사실을 듣고 어머니가 서명한 원본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서명했어도, 지금 있는 사본을 만든 건 다른 사람일 수 있겠네요.”

“네. 서명한 시점, 설명 받은 내용, 나중에 문구가 바뀌었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도하는 그 차이를 소송 준비서면의 항목으로 나눠 적었다. 나경은 아직 소송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남긴 물건을 돌려받고 싶을 뿐이었다. 도하는 돈을 다투는 절차와 유품을 찾는 절차를 따로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사관은 서류가 젖지 않도록 창고에 임시 배수판을 설치했다. 태오는 선반을 옮기려다 멈췄다. 그가 한 번만 손을 대도 보관 상태가 달라질 수 있었다. 나경은 고인의 물건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기억을 계약의 증거로 만드는 건 원치 않았다. 도하는 그녀의 선택을 기록하고, 누구도 이름을 추가하거나 상자를 옮기지 않도록 현장에 봉인 테이프를 붙였다.

수아는 계약서의 날짜를 휴대전화 사진의 촬영 시각과 비교했다. 사진은 서명이 이뤄졌다고 적힌 날보다 2년 뒤에 찍혔다. 그 시점에 나경의 어머니는 이미 다른 주소로 이사한 상태였다. 사진 속 계약서는 한 장 더 접혀 있었고, 접힌 자국 아래에는 별도의 조항이 가려져 있었다. 문서를 펴지 않고도 눌린 흔적을 촬영해 두었다.

도하는 상자에 붙은 번호를 계약서와 대조했다. 번호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채무 이전을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보관 경로를 확인할 이유는 충분했다. 나경은 금고 열쇠를 자기 손에 쥐고 있겠다고 했다. 누군가 물건을 가져가려면 먼저 그녀에게 알려야 했다.

나경은 자신의 이름을 보고 손을 뗐다. 서명은 그녀의 글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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