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 인간은 하루만 산다

3화: 폐기 로그의 이름
검은 물은 바닥을 적시지 않았다.
문틈에서 흘러나온 액체는 손전등 빛을 흡수하고, 바닥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서윤은 직원들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현은 방화문을 더 열지 않고, 틈을 촬영했다. 서-48은 물을 보고 몸을 떨었지만, 스스로 문에서 떨어져 있었다.
상필은 현장에 도착해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검은 물이 훈련 장비의 냉각액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냉각액은 2년 전에 폐기됐고, 지하 구역의 전원도 끊겨 있었다. 현은 장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제한된 안전 점검을 요구했다.
서윤은 복제체의 동의를 확인했다. 서-48은 자신이 밖에 남아 기록을 돕겠다고 했다. 위험 구역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남은 세 시간 십이 분 중 일부를 조사에 쓰기로 선택했다.
문이 열리자 지하 통로에는 오래된 배양 장치가 놓여 있었다. 기계들은 전원이 끊긴 상태였지만, 한 화면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생체 폐기 로그가 연속으로 표시됐다. 복제체 번호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권미라, 원본 상태: 사망 처리, 기억팩 추출 완료’였다.
상필은 화면을 끄려 했고, 현은 손으로 막지 않았다. 그는 로그를 복사하기 전에 기록 장치의 일련번호와 현재 시각을 촬영했다. 서윤은 상필에게 자신이 자료를 삭제하면 윤리 조사 대상이 된다고 경고했다. 상필은 복제체 연구가 수천 명을 구조했다고 주장했다.
“하루짜리 복제체가 현장에 들어가 살아 있는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 성과가 동의 없는 기억 추출을 정당화하지는 않아요.”
현은 서-48에게 화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기록을 볼 권리와 보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서-48은 화면 내용을 듣고 자신이 원본 기억을 가진 복제체인지 물었다. 현은 확실히 모른다고 답했다. 기본 기억팩 외의 정보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면, 그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고 했다.
서-48은 자신의 활동 기록을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꿈의 출처를 확인하는 데 사용해도 좋다고 했지만, 원본과 같은 사람으로 기록하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서윤은 동의 내용을 녹음하고, 별도의 보존 서류를 작성했다.
지하 장치에서 한 개의 저장 매체가 튀어나왔다. 현은 맨손으로 잡지 않고 절연 집게를 사용했다. 매체에는 재난 현장의 영상이 저장돼 있었다. 화면 속 연구원 권미라는 빨간 방화문 안쪽에 갇혀 있었다. 문 밖에는 상필이 서 있었고, 그는 구조 요청을 듣고도 잠금 장치를 조작했다.
상필은 영상이 편집됐다고 주장했다. 타임코드는 끊겼고, 음성도 일부 손상돼 있었다. 현은 영상만으로 살인을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연구원이 안에 갇혔고, 문이 외부에서 잠겼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윤은 즉시 외부 조사기관에 자료를 넘기려 했다. 상필은 연구소 보안 규정을 내세우며 통신망을 차단했다. 현은 로컬 응급 송신기를 가동했지만, 장비가 과열됐다. 서-48은 남은 시간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활동 종료까지 3시간 12분.
“내가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지금은 안 됩니다. 구조대가 와야 해요.”
“그럼 이 기록을 들고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서윤은 위험을 설명했다. 통로의 압력이 불안정했고, 복제체의 신체 상태도 악화하고 있었다. 서-48은 멈추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상황을 판단하고, 안전선을 따라 통로 입구까지 걸어갔다.
현은 그의 활동 기록을 동기화했다. 생체 폐기 로그는 더 이상 자동 삭제되지 않도록 분리 저장됐다. 외부 조사기관의 응답이 들어왔다. 하지만 응답에는 현장 출동을 보류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상필은 화면을 보고 말했다. “이 자료를 밖으로 보내면 연구소 전체가 문을 닫습니다.”
서-48은 그를 바라봤다. “그럼 문을 닫기 전에 안에 있는 사람부터 꺼내야죠.”
서-48은 복도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현이 물을 건네자 그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끝이 자꾸 떨렸다. “내가 할 일은 이름을 말하는 거네요.” 현은 권미라의 이름을 다시 읽어 줬다. 서-48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을 내 입에 넣지 마세요. 내가 본 건 문 앞의 사람이었어요.”
서윤은 외부 조사기관에 자료를 보냈다. 상필은 연구소 통신실로 가서 차단기를 내렸다. 복도 조명이 꺼지고, 응급 송신기 팬이 멎었다. 현은 전원을 다시 올리려 했지만 상필이 손목을 잡았다. “이 기록 하나 때문에 구조 사업 전체가 끊기면, 다음 사고 때 사람들은 누가 구하죠?” 현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화상 흉터가 당겨 아팠다. “그 답을 당신이 혼자 정하지 마세요.”
서윤이 비상 통화 장치를 벽에서 뜯어냈다. 케이블 끝의 구리선이 불꽃을 튀겼다. 상필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고, 서-48이 의자를 끌어와 두 사람 사이에 밀어 넣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쓰러졌다. 몸을 일으킨 서-48은 숨이 가빠 말하지 못했다. 의료 담당자가 달려와 산소 마스크를 씌우려 하자, 그는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숨은 제가 쉴게요. 선은 연결해 주세요.”
그의 지시에 따라 현이 수동 송신기를 복구했다. 기계는 과열된 상태라 90초 넘게 켜 두면 내부 퓨즈가 나갈 터였다. 서윤은 접수처에 한 문장만 전송했다. ‘지하 폐쇄구역에 생체 신호가 있으며 현장 진입을 요청한다.’ 상필은 전원을 내리려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서윤이 먼저 차단함을 닫고 잠갔다. 열쇠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응답이 돌아오기까지 40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현은 손상된 저장 매체를 읽기 전용 장치에 물렸다. 영상 속 붉은 문에는 내부에서 긁은 자국이 있었다. 권미라가 구조 요청을 보냈는지, 상필이 살해를 계획했는지는 영상만으로 단정할 수 없었다. 대신 음성 파형에서 세 번의 충격과 뒤이어 두 번의 짧은 충격이 확인됐다. 현은 그 소리가 오늘 문 안에서 들린 신호와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48은 화면을 보지 않은 채 박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는 네 번째에 손을 멈췄다. “다음은 안쪽에서 답했어요.”
40분 뒤 구조팀의 도착 통보가 왔다. 서-48에게 남은 시간은 두 시간 32분이었다. 구조팀은 연구소의 출입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외부 통로로 들어오겠다고 했다. 상필은 그제야 지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전원은 끊긴 상태였고, 압력 균형을 맞추려면 수동 밸브를 돌려야 했다. 구조팀은 30분간 통로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현은 장갑을 끼고 밸브에 다가갔다. 손잡이는 녹슬어 꿈쩍하지 않았다. 상필은 오래된 도면을 꺼내 손잡이의 방향을 짚었다. “왼쪽으로 반 바퀴.” 서윤이 그를 노려봤다. 그는 도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날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여기까지야.”
“문을 잠근 것도요?”
상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이 밸브를 돌렸다. 압력이 빠지며 통로의 벽이 떨렸다. 두 번째 회전에서 손잡이가 부러졌고, 현의 장갑이 찢어졌다. 손바닥 상처에 녹물이 스몄다. 구조팀의 무전이 잡음 속에서 끊겼다. 안쪽에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서-48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현을 바라봤다. “제가 문을 열면 안 돼요. 제가 열고 들어가면, 그 사람의 마지막 장면을 또 제가 대신하게 돼요.”
그 선택은 구조팀에 넘겨졌다. 현은 남은 손잡이에 쇠막대를 끼웠고, 상필은 도면의 다른 쪽을 잡았다. 세 사람이 밀자 밸브가 겨우 움직였다. 18분 뒤 잠금장치가 풀렸다. 문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벽에 묶인 센서만 살아 있었고, 그 센서는 권미라의 것이 아니라 한서-49의 생체번호를 가리켰다. 아직 배양되지도 않은 다음 개체의 값이었다. 구조팀은 발생기를 격리하고 배선 흔적을 촬영했다. 센서의 전원을 안전하게 끊고 저장 매체를 회수하는 데 한 시간 26분이 걸렸다. 그동안 서-48은 현장으로 가지 않았다. 의료실에서 산소를 보충하고, 조사팀이 확인한 수치를 한 번만 들었다.
서-48은 무전으로 숫자를 듣고 눈을 감았다. “그 아이를 내 꿈으로 만들지 마세요.” 현은 저장 매체의 복제본을 끄고 원본을 밀봉했다. 서-48은 자기 이름으로 남길 증언과, 남기지 않을 기억을 하나씩 골랐다. 그는 목소리 기록에는 동의했지만 다른 복제체에 기억을 전송하는 칸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 문서를 들것 위에서 받았다.
현은 남은 현장 조사를 외부 조사팀에 넘기고 의료실로 돌아왔다. 그에게 남은 활동 시간은 18분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시간을 줄여 말하지 않았다. 현은 침상 옆에 앉아 창밖의 새벽을 설명했다. “하늘은 못 봐도 돼요.” 서-48이 말했다. “나한테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이면 충분해요.”
그는 현의 화상 난 손에 거즈를 감아 주었다. 매듭은 서툴렀지만 풀리지 않았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고 내가 한 일이네요.” 현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어 매듭을 확인했다. 서-48은 눈을 감았다. 의료 담당자는 그가 고른 음악을 낮게 틀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기 목소리로 이름을 한 번 더 말했다.
서-48이 떠난 뒤 조사팀은 지하 장치의 전원을 분리했다. 상필은 현장 밖으로 나가며 자신이 문을 잠근 이유를 진술하겠다고 했다. 서윤은 그를 막지 않았다. 현은 증언 파일의 제목을 ‘권미라의 진실’로 쓰지 않았다. ‘서-48이 들려준 세 번과 두 번’이라고 적었다.
새벽 기록 화면에 한서-49의 배양 예약이 자동으로 떴다. 현은 승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구소의 결재선이 아니라 외부 심의관의 이름이 먼저 필요했다. 화면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새 경고가 깜빡였다. ‘기억팩 출처: 미확인 / 승인자: 류현.’ 그 이름은 지금도 살아 있는 현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