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심장외과 천재의 분초 회귀5화

심장외과 천재의 분초 회귀

심장외과 천재의 분초 회귀

AD
스폰서 광고

5화: 허락된 의심

처치실의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서진은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거치대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맞물리는 딸깍 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검사실에 직접 사람을 보내겠다는군요.”

서진이 안경을 벗어 미간을 짚으며 낮게 말했다.

“연구 검증용 시료라서 임상 기록에 남으면 혼선이 생긴답니다. 환자 안전에는 영향이 없으니 공식 차트에서 삭제하고 추가 채혈도 멈추라고요.”

“환자 몸에서 나온 반응입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굳었다.

“위험한지 무해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사실이 먼저 감추는 건 원칙에 어긋납니다.”

“알아요. 나도 동의해요.”

서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도윤을 보았다.

“하지만 도윤 쌤. 지금 눈빛은 위험해요. 마치 거대한 음모를 밝히려는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요.”

“음모를 밝히려는 게 아닙니다.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니까요.”

“의사라면 절차와 기록으로 말해야죠.”

서진은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길이 단호했다.

“방금 이사실에서 온 요청 시각과 요구 내용을 전산 로그에 입력했습니다. 이건 지울 수 없는 안전 관리 기록이에요. 그리고 검사실 당직의에게 공문 보냈습니다. 보관 검체 잔여량과 출력된 원자료 시험지는 의무기록과 이관 전까지 임의 폐기하지 못하도록 봉인해 달라고요.”

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조급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하린이 한 번 심장을 멈췄었다는 기억도 오직 도윤의 뇌리에만 있었다. 현실의 동료들에게 도윤의 확신은 근거 없는 억측으로 보일 뿐이었다.

“외부 선별 의뢰서는 확인했습니까?”

“입원 사흘 전 세림바이오 협력 클리닉에서 작성된 서류예요. 보호자가 서명한 건 잔여 검체 연구 활용이라는 포괄적 동의서 한 장뿐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표지자를 보는지 설명이 없었군요.”

“네. R-7이라는 코드만 적혀 있고 세부 분석 항목은 비워져 있어요. 연구 동의의 불완전성을 지적받을 수 있는 상태예요.”

도윤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른쪽 머리를 찌르는 편두통이 가라앉지 않았다. 수술복 아래 숨긴 오른손 검지의 미세한 떨림도 남아 있었다.

“아침 회진 전에 새 혈액으로 재검을 해야 합니다. 보관 검체의 반응이 시료 변질로 인한 위양성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나 혼자 결정 못 해요.”

서진이 차트를 덮었다.

“이태준 교수님의 승인이 없으면 검사실도 이사실의 압박을 버티지 못합니다.”

“제가 교수님을 설득하겠습니다.”

“그 전에 박성호 환자부터 봐요. 수술 끝났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서진의 말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 한 명의 의문에 매몰되어 눈앞의 다른 생명을 놓칠 수는 없었다.


새벽 세 시 십오 분. 중환자실 4번 침상 앞에는 강민석이 서 있었다.

민석은 도윤의 발소리를 듣고 차트에서 눈을 뗐다.

“이제 오네. 집도의가 처치실에서 뭘 그렇게 오래 숨어 있었습니까?”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도윤은 빈정거림을 넘기며 모니터를 살폈다.

박성호의 가슴에는 임시 심장박동기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었다. 분당 80회의 인공 신호가 일정한 간격으로 찍혔다. 동맥압은 102에 64였다.

“수술 직후보다는 낫습니다.”

민석이 차트를 가리켰다.

“칼륨 4.1, 마그네슘 2.2로 전해질은 교정됐어요. 하지만 박동기를 끄면 자발 리듬이 분당 45회까지 떨어집니다. 심실 조기 수축도 튀고요.”

도윤은 12유도 심전도 출력지를 집어 들었다.

QRS파의 폭을 확인했다. 심폐기에서 떼던 직후 148밀리초까지 벌어졌던 간격이 지금은 136밀리초로 줄어 있었다. 호전이었지만 정상 기준치보다는 여전히 넓었다.

“전벽과 중격의 전도 지연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군요.”

“승모판 성형은 깨끗하게 끝났습니다. 잔류 역류도 거의 없고요. 그렇다면 이 전도 장애는 수술 중 발생한 일시적 허혈이나 기존 심방세동의 연장선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민석이 도윤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아까 수술실에서 했던 소리는 뭡니까? 화면에 보인 푸른 선이 어쨌다느니 하는 얘기 말입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럼 수치로 증명해 봐요.”

민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 환각 하나 때문에 판막 성형술의 성공까지 흠집을 낼 셈입니까? 박재현 이사 라인에서 이 환자 데이터도 보고 있다는 거 몰라요?”

민석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함께 미세한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박성호의 데이터가 일반적인 경로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민석 역시 느끼고 있었다.

“흠집 내려는 게 아닙니다. 박성호 씨는 심근 전도망이 취약해져 있을 가능성이 커요. 판막만 보고 박동기를 일찍 뗐다면 심박출량 저하로 쇼크가 왔을 겁니다.”

“그래서 박동기 유지하고 있잖아.”

“원인을 닫아두지 말자는 겁니다. 허혈 때문인지 다른 요인이 있는지 계속 감시해야 합니다.”

민석이 혀를 찼다.

“손 떨리던 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다음 수술이나 걱정하세요.”

민석은 차트를 덮고 돌아섰다.

도윤은 인공 박동에 맞춰 숨 쉬는 박성호를 내려다보았다. 동료조차 납득하지 못하는 가설은 의료 현장에서 독선일 뿐이었다.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려면 객관적인 수치가 필요했다.


새벽 네 시 십 분. 이태준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태준은 돋보기를 쓴 채 수술 기록지를 넘기고 있었다. 책상 한편에는 한진우의 이름이 적힌 누런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박성호 환자는?”

“임시 박동기 80회로 혈압 유지 중입니다. QRS 폭은 136밀리초로 소폭 줄었으나 자발 서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배액관 출혈은?”

“시간당 30밀리리터 이하로 양호합니다.”

태준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네 손은?”

도윤은 주머니 속 손가락을 가만히 쥐었다.

“안정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태준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집도의가 손을 숨기는 순간 메스는 흉기가 된다. 오늘 널 세운 건 네가 한계를 인정하고 팀의 보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술 끝나자마자 다른 데 신경을 팔고 다녔다고?”

도윤은 품에서 하린의 검사 결과지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반복 반응성 확인. 일반 심근염 패널로 의미 판정 불가.

R-7 선별군 / 외부 협력기관 의뢰.

태준의 눈이 붉은 인쇄 문구에 닿았다.

“이게 뭔가?”

“윤하린 환자의 보관 혈청 재검 결과입니다. 미확인 반응이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박재현 이사실에서 검사실로 연락해 이 결과를 보류하고 추가 채혈을 막았습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교수님. 박성호 환자의 전도 지연과 윤하린 환자의 부정맥 그리고 화면에서 스친 푸른 잔선은 이어져 있습니다. 12년 전 아버지께서 중단하셨던 연구의 흔적입니다.”

탁!

태준이 결과지를 책상에 내려쳤다.

“오만하구나 한도윤.”

태준이 천천히 일어섰다. 눈빛에 서릿발 같은 노기가 번졌다.

“지금 네 눈에 환자가 보이나 아니면 아버지를 버렸다고 믿었던 과거의 망령이 보이나?”

“교수님…….”

“노이즈 몇 줄과 확인되지 않은 밴드 하나로 거대 임상시험의 유해성을 단정하겠다고? 승모판 탈출과 악성 부전도로가 같은 병인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네가 언제부터 역학조사관이 되었나!”

태준의 호통이 방 안을 울렸다.

“의사는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자가 아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내놓는 자다. 설익은 직감으로 임상 연구를 공격하면 네가 살릴 수 있는 환자가 몇이나 될 것 같나? 박재현이 널 진료에서 배제하면 넌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 채 쫓겨난다.”

도윤은 숨을 멈추었다.

스승의 질타는 정확했다. 도윤은 5분이라는 시간의 무게에 쫓겨 모든 단서를 단숨에 꿰어 맞추려 서둘렀다. 검증을 건너뛴 확신은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뿐이었다.

“……제가 서둘렀습니다.”

도윤의 대답에 태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12년 전에도 그랬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아버지 한진우 박사도 이상 징후를 먼저 알았지. 하지만 성급하게 폭로하려다 이사회의 벽에 부딪쳐 연구실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가 뭔지 아나?”

태준이 도윤을 보았다.

“연구는 중단되지 않았다. 안전장치만 사라진 채 박재현의 손으로 넘어가 지금의 리듬-7이 된 거다.”

도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도망친 게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이었다.

“의심은 죄가 아니다.”

태준이 서랍에서 정식 처방 전표를 꺼냈다. 펜촉이 거침없이 종이를 갈랐다.

환자명 윤하린. 심근 손상 표지자 정밀 재검 및 면역글로불린 교차 반응 검사 의뢰. 주치의 이태준.

태준은 서명한 전표를 건넸다.

“추정은 꾸짖지만 확인은 허락한다.”

태준의 눈이 도윤을 꿰뚫었다.

“새 혈액으로 채혈해라. 이사실이 손대지 못하도록 중앙검사실 책임자에게 내 직권으로 블라인드 교차 검사를 의뢰할 거다. 네가 본 게 결함인지 실체인지 네 손으로 숫자를 가져와라.”

도윤은 전표를 받았다.

종이 한 장이 묵직했다. 스승이 건넨 방패이자 스스로 진실을 증명해야 할 시험지였다.

“확인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도윤아.”

태준이 덧붙였다.

“환자 보호자에게 고개 숙여라. 의심이 아니라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고 설명해라. 의사의 권위는 환자의 신뢰에서 나온다.”


아침 여섯 시. 중환자실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하린의 어머니가 간이의자에서 눈을 떴다. 하린도 눈꺼풀을 깜빡이며 도윤과 서진을 보았다.

“선생님들…… 아침부터 오셨네요. 저 어디 안 좋은가요?”

하린의 목소리에 어머니도 불안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하린이 심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도윤은 태준의 말을 떠올렸다. 복잡한 의혹을 꺼낼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안전을 위해 의사들이 무엇을 하는가였다.

도윤은 무릎을 낮추어 하린의 눈높이를 맞췄다.

“심장은 지금 아주 예쁘게 뛰고 있습니다. 어제 위험했던 고비는 완전히 넘겼어요.”

“그런데 왜…….”

“어제 치료 뒤 심장이 잘 회복하고 있는지 혈액검사로 마지막 확인을 하려는 겁니다. 입원 전 검사에서 수치 하나가 애매하게 나온 부분이 있었습니다. 숨은 원인까지 말끔히 확인하고 안전하게 일반 병실로 가기 위한 절차입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두르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피를 또 뽑아야 해요?”

하린이 입술을 내밀었다.

도윤은 하린의 손등을 토닥였다.

“딱 한 번만 더 뽑을게요. 졸업식 무대에서 힘차게 노래 부르려면 심장이 튼튼한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하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약속 지켜주시는 거죠?”

“반드시 지킵니다.”

어머니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하린이 잘 부탁드립니다.”

서진이 능숙하게 채혈을 마쳤다. 붉은 혈액이 시험관 세 개에 채워졌다. 도윤은 태준의 서명이 적힌 전표를 붙였다.

“제가 직접 검사실 책임 교수님께 전달할게요.”

서진이 튜브를 챙겨 일어섰다.

도윤이 복도로 나왔을 때 단말기 화면에 공지가 깜빡였다.

[긴급 회의 소집]

일시: 금일 08:30

안건: 세림바이오 협력 고위험 부정맥 임상 프로토콜 준수 점검

주관: 세림바이오 임상총괄 겸 세림대병원 이사 박재현

참석 대상: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심장내과 임상강사 및 펠로우 전원.

복도 저편에서 민석이 공지를 보며 도윤을 돌아보았다.

도윤은 주머니 속 주먹을 쥐었다. 손끝의 떨림과 관자놀이의 통증은 여전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허락된 의심 위에서 마침내 정면 승부가 시작되고 있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